2003년도에 있었던 글입니다.


한국인은 대체로 착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부패했다. 자신이 부패했다는 걸 느씨지 못할 정도로 '부패의 생활화'가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이루어져왔다. 그래서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촌지'에서부터 연고와 정실에 의한 봐주시를 '사람 사는 인정' 쯤으로 가볍게 생각한다.


한국인의 부패는 한국인의 인성인가? 아니다. 그건 처절한 '생존술'이었다. 집권세력이 위에서부터 밑에까지 다 썩어 있다면 보통 사람들이 무슨 수로 생존을 꾀할 수 있을 것인가?



부정부패는 정권안보의 대들보



독재권력은 권력 유지와 강화를 위해 민중을 부패시키며 민중의 부패는 새로운 민주권력의 성공을 어렵게 만든다. 일단 부패가 시작되면 가장 좋은 제도도 쓸모가 없으며, 자유롭고 공개된 토론은 민중에게 덕성이 있을 때엔 귀중하지만 그들이 부패했을 때에는 위험하다. 또 독재 체제에서 혜택을 누렸던 사람들은 정직하고 명시적인 기준에 의해서만 존경과 보상이 주어지는 자유로운 사회에 분개하기 때문에 새로운 민주주의 지도자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마키아벨리로부터 배우는 지도력』이라는 책에 소개된 마키아벨리의 주장이다. 마키아벨리의 말이라고 해서 폄하할 필요 없다. 정치인들만 마키아벨리의 후예들이 아니다. 한국적 삶은 대부분의 평범한 아저씨와 아줌마들을 마키아벨리로 만들었다. 한국에서 필요 이상으로 마키아벨리를 욕하는 이상 풍조는 역으로 해석해야 옳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너무 싫어서 괜히 더 욕하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 국민의 약 80%는 한국 사회의 부패가 심각하다고 보고 있으며 20대와 30대의 절반이 '이민을 갈 수만 있다면 떠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최근의 한 조사 결과(『한국일보』4월 24일)을 읽으면서 마키아벨리의 위와 같은 주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인은 대체로 착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부패했다. 자신이 부패했다는 걸 느씨지 못할 정도로 '부패의 생활화'가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이루어져왔다. 그래서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촌지'에서부터 연고와 정실에 의한 봐주시를 '사람 사는 인정' 쯤으로 가볍게 생각한다.


한국인의 부패는 한국인의 인성인가? 아니다. 그건 처절한 '생존술'이었다. 집권세력이 위에서부터 밑에까지 다 썩어 있다면 보통 사람들이 무슨 수로 생존을 꾀할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조선조 말기 이래로 몇 세 개에 걸쳐 민중은 공권력과 공적(公的) 영역을 신뢰할 수 없었다. 정부로부터 과도한 수탈만 당하지 않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건 오직 사적(私的) 영역 뿐이었다. 당연히  사적 영역은 연고와 정실 위주로 움직였고 한국인들은 그 네트워크를 근간으로 하여 생존을 도모하였다. 억울하면 개인적으로 출세할 일이었지, 공적 영역에 그 어떤 해결책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는 이미 1970년대사를 통해 박정희 18년 체제가 '정권 안보'를 위해 부정 부패의 전 사회적 창궐을 획책했거나 방임해왔다는 걸 잘 살펴보았다.


전두환 체제 7년은 그러한 총체적 부패구조의 성숙기 또는 완성기였으며, 부정부패는 '정권안보'의 대들보로 우뚝 섰다. 5공이 내세운 '정의 사회 구현'은 실제론 '부패 사회 구현'이었으며, '정의'라는 말은 길거리 쓰레기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


극우 독재체제와 부정부패가 손에 손을 맞잡고 같이 가는 동반자라는 건 이미 전 세계적으로 충분히 입증된 사실이다. 이는 국제투명성기구의 2002년 '국가별 부패지수'를 살펴보더라도 잘 드러난다. 10점을 가장 투명하고 공평한 무(無) 부패의 사회, 그리고 1점을 가장 부정부패가 심한 사회로 했을 때, 각 나라별로 순위와 지수를 매겨보면 다음과 같다.


1위 핀란드(9.7), 2위 덴마크(9.5), 4위 아이슬란드(9.4), 6위 스웨덴(9.3), 10위 영국 (8.7), 12위 노르웨이(8.5) 16위 미국(7.7), 18위 독일(7.8), 40위 한국 (4.5), 44위 그리스(4.2), 59위 중국(3.5), 71위 러시아(2.7), 96위 인도네시아(1.9)


이러한 결과에 대해 박노자는 최근 저서 『나를 배반한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북유럽의 사민주의 국가들(핀란드, 덴마크, 스웨덴 등)에게서 부패정도가 가장 적게 나타난 점이다. 이와 반대로, 극우들이 오랫동안 파쇼적 독재를 해왔던 남유럽(이탈리아, 그리스 등)은 한국과 비교될 정도로 상대적으로 부정부패가 심하다. 마키아벨리의 조국 이탈리아에서도 무솔리니(1883∼1945) 정권이 20년 동안 국정을 휘어잡는 동안 부정 부패가 거의 제도화되었다. 지금도 금전 거래가 수반되지 않은 인사청탁은 비도덕적 행위나 범죄로 보지 않을 정도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극우주의와 봉건적 잔재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엿볼 수 있다. "


copyright 2003 강준만
출처 : 강준만, <머리말>,『한국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권』, (인물과 사상, 2003) 14 ∼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