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들이 한국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시니, 딱히 한국정치에 대해 얘기할 생각은 안든다...

그저...

20년 전 대륙에서는...

1976년 중국 최고권력자였던 모택동이 사망한 이후, 등소평이 중국 최고지도자로 부상하게 된다.

등소평에겐 두명의 심복이 있었는데, 호요방과 조자양이다.

등소평은 1982년 호요방을 당 서기에 임명하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는데,

호요방은 등소평이 추진했던 점진적 개혁에 가속을 밟는다.

정치적으로는 과거 중국공산당의 치부였던, 티벳 자치화, 문화혁명 피해자들의 복귀 등을 추진하였고,

경제적으로는 기적적인 수준의 경제성장을 이뤄낸다.

호요방은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도 용납하고 귀를 기울이며, 중국에 민주화의 물꼬를 텄고,

비밀경찰의 감시와 체포의 공포 때문에, 정치적 발언은 커녕 사고마저도 금지당했던 중국인들은,

민주화와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게 된다.

1986년 12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학생 시위가 터지고,

정치적 불안을 느낀 등소평은 시위와 무관한 이유를 들어 호요방이 사직하도록 한다.

1987년 호요방의 사직 이후 중국 정부에 보수파의 입김이 강해지기 시작했고,

중국 경제는 침체기에 들어섰으며,

호요방은 사직한 지 2년 후인 1989년 4월 17일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호요방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추모를 위해 천안문 광장에 빈소를 설치하고 시위를 하였다.

이전의 시위가 학생들 중심이었던 것과 달리 호요방에 대한 추모 행진에는 시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그들은 호요방의 명예 회복과, 호요방이 물러난 이후 중단된 민주화의 재개, 부패 척결, 자유와 인권등을 요구하였다.

처음에는 다소 방관적 태도를 취하던 등소평, 리붕 등의 공산당 보수파와 인민일보 등의 국영언론은 시간이 갈수록 시위대에 공격적 태도를 취하였고,

호요방의 뒤를 이어 당서기를 맡고 있던 조자양은, 등소평과 리붕으로부터 시위대를 지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마지막 방해물이었던 조자양마저 실각시킨 중국 정부는 시위를 “동란”으로 규정하고,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89년 6월 3일 인민 해방군이 베이징 시로 진입하여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사망하였으며, 수많은 지식인들과 민주화 인사들이 해외로 빠져나갔고, 중국의 민주주의는 원점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지금도 중국은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민주적 정권은 커녕 민주화에 대한 열망마저 사라졌으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권탄압국가의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1989년 천안문 사건이다.



여담이지만, 한국으로 귀화한 바둑기사 장주주9단과 루이나이웨이9단도 천안문 사건에 참여하였다가 중국을 떠나게 된 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