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에버퀘스트나 다옥을 하면서 주로 힐러나 인첸터 같은 직업을 했었습니다.

여기서 힐러를 하게 되면 파티의 최후방에 서게 되죠.

즉, 모든 파티원을 시야 안에 넣고 모든 전투 상황을 가장 뒤에서 냉철하게 분석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겁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그로인해 거의 우리 파티의 패배가 확실했었던 전투들을 여러번 뒤집은 전과가 있고,
그런 경력들이 쌓이면서 자연스레 어떤 파티에 가던 파티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바로 힐러였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리냐구요?
좀 더 읽어주십시오.



전사의 시야...

전사의 경우 전투 도중에 끊임없이 적들의 움직임을 파악해야 합니다.
몹들의 어그로 관리부터 시작해서
자기 이외에 공격당하고 있는 파티원들이 있는지,
새로 팝업되는 크립들이 있는지, (혹은 팝업 타이밍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계산,)
맵 상의 적들의 움직임이라든지,
만약 전투가 패배로 이르게 될 경우 어떻게 파티의 힐러를 살릴 것인지(힐러만 살리면 그 파티가 전멸을 한다고 해도 다시 부활 가능...)
어떤 최후를 맞이 할 것인지...

이런 것들이 바로 전사의 시야이지요.



누커의 시야...

누커는 항상 공격의 핵심이자,
가장 치밀하게 어그로를 계산하는 클래스입니다.
사실 힐러가 위험에 빠졌을 때 힐러를 구할 수 있는 클래스는 누커 밖에 없습니다.
크립이 힐러를 공격하려 할 경우
누커는 자신이 가진 가장 빠르고 강력한 마법으로 크립들에게 퍼부어 몹들의 어그로를 모두 자신에게 끌어옵니다.
그리고 힐러를 대신하여 죽음을 맞이하죠.
여기서 좀 더 파티원들이 능숙하다면,
그리고 누커가 조금 더 치밀하게 움직이는 자라면
얼마든지 누커 자신도 목숨을 구할 수는 있습니다만...
고난이도의 던전에선 그리 쉬운 일은 아닐겁니다.




힐러의 시야...

말씀드렸다시피 힐러는 모든 파티원들의 최후방에 섭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지요.

그리고 그것이 어느 일정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단순히 크립들의 움직임과 파티원들의 움직임, 전투 양상 따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앞서 설명한 전사의 시야나 누커의 시야를 마치 독심술을 하듯이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을 보는 자] 가 되는 겁니다.

힐러가 힐만 하니까 재미가 없을 거라고요?
천만에요.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은 정말 오랫동안 디아블로 식 공격 일변도의 온라인 게임에만 길들여져 오신 분들입니다.


힐러는 전투에서 힐과 버프를 거는 역할을 주로 수행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전투 상황을 배후에서 지켜 보게 되지요.

그리고 그런 경험들이 쌓이다보면, 힐러는 어느새 전투를 지휘하는 사령관이 되어 있습니다.
이는 힐러가 잘나서가 아니라, 말씀드렸다시피 가장 시야가 넓고
그것을 분석할 여유가 상대적으로 많은 클래스가 바로 힐러이기 때문입니다.



다옥(다크 에이지 오브 카멜롯)이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RVR (알비온 Vs 하이버니아 Vs 미드가드)로 유명한 게임이지요.

최근엔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이들 3 세력 중에 가장 유저수가 많은 것은 알비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RvR에서 알비온의 압도적인 우세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지요.


하이버이나나 미드가드는 처음엔 정말 암울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새인가 부터 서서히 흐름이 바뀌기 시작하더군요.
압도적인 열세였던 하이버니아가 알비온을 상대로 차츰차츰 승리를 거두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곤 결국에 가서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갖춘 알비온을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그 때,
그 기적같은 전투,
.........아니 사실은 놀랍도록 치밀하고 정교한 전술을 짜내고
저 거대한 알비온을 굴복시킨 기적을 이루어 낸 것은

승리만을 위해 뭉친 수많은 하이버니아 길드들과 유저들로부터 리더 중의 리더로 추대받아
전투 에선 완전히 손을 뗀 채
아니, 전장 근처에도 가지 않으면서
각지로부터 들어오는 첩보들을 토대로 최후방에서 서서 치밀하고 노련하게 지휘했던
오직 단 한명의 힐러, 그 힐러 클래스를 가진 하이버니아의 커맨더 였습니다.


지금도 다옥 게시판이나 팬사이트를 뒤져 보면 나올 겁니다.
그분의 아이디는 잊어버렸지만
거의 삼국지의 제갈량을 보는 듯한 치밀하고 정교한 전술들을...



힐러...
단순히 힐만 하는 기계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힐러...
하다가 조는 클래스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힐러...
파티의 최후방에 서고

힐러...
파티원 모두의 시야와 생각을 꿰뚫어 보고...

힐러...
모든 전투의 흐름을 가장 주의 깊게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는 자입니다.





힐러를 하면서 졸게 되신다는 분들은
아주 극심하게 피로하셨던 것이거나...

아니면
그 전투가 지루할 정도로 수준이 낮았던 것이겠지요.

그도 아니면
힐러라는 자신의 클래스에 대해 절반 밖에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거나요.




기분 나쁘게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지만
저 아래 글의 리플에서 했던 소릴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이런 스타일의 서구형 롤플레잉 게임의 고향인 북미나 유럽의 유저들은
자신들보다 심할 경우 10렙 이상의 던전을 정복하기 위해 파티를 구성합니다.
때문에 모든 전투가 아슬아슬하고,
그냥 딱 한마디로 불가능해 보이는 전투에 뛰어드는 게 그네들의 주된 스타일이죠.

예를 들자면 렙 10대 초중반 유저들로 이루어진 파티가 놈리건의 대배반 퀘스트까지 클리어 하는 수준의 전투를 한다는 겁니다.



  

반면에 한국 유저들의 대체적인 성향을 보니 실속파 이더군요.
한국 유저들의 주된 스타일은
전투의 난이도와 경험치량을 비교해서 너무 난이도가 높지도 않고, 그렇다고 경험치 량이 적지도 않은 던전을 택합니다. 여기에 + 아이템 도 한몫하죠.
외국 유저들처럼 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외국 유저들처럼 오랜 시간을 들여서 엄청나게 고난이도의 던전에 도전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들의 레벨에 적합한 던전을 같은 시간에 여러번 정복하는 길을 택합니다.
(물론 다 이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도 세계최초로 오닉시아를 쓰러뜨린 추츤 길드 같은 정말 노련하고 배짱있는 길드가 존재하니까요.)




이것이 아래의 힐러분들께서 전투 중 조는 이유가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외국에서 리딩을 하는 자는,
한번의 전투를 위해
스스로 종이에 던전의 지도를 그리고 크립들의 이동 경로를 분석하고
여기에 온갖 돌발 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책자를 만들어 정리해 둘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런 리딩을 하는 자는 주로 힐러지요.

파티의 최후방에 서고
모든 파티원들의 사정을 꿰뚫어 보고
위급한 상황에서 다른 모든 파티원들이 죽는다해도 어떤 특정 클래스에게만 힐을 하는 냉정함을 가지고 있고(궁극적인 승리를 계산하며)
가장 뒤에서 모든 것을 관찰하며 그것을 분석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자...




자...

힐러가 졸렵다고요?

그것은 게임 자체가 재미없거나,
혹은 지나치게 낮은 수준의 전투 중 이시거나,
혹은 정말로 피곤하시거나,

그것도 아니면... 스스로 '힐러' 라고 말하는 님들 스스로 힐러라는 클래스에 대해 절반 밖에 이해를 못하고 계신 겁니다.


힐러는 직접적인 공격에는 가담하지 않는...
그저 힐만 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님이 진정한 힐러라면... [모든 것을 보는 자] 가 되어 있어야 할겁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움직이는 자] 로 거듭나셔야 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