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전의 왕녀 (조선 왕조최후의 황태자비) = 이 방자(李 方子 / 리 마사코)

1901(메이지 34년)년 ~ 1989(헤이세이 원년)년

조선왕조 황태자 이은(李垠)의 비

1901(메이지 34년)년 11월 4일, 久邇宮(쿠니노미야) 朝彦親王의 제 4왕자로 1885년(메이지18년)년에 梨本宮家를 지낸 梨本守正(나시모토 모리마사 = 프랑스 육군대학교졸업, 제1 여단장 및 제16사단장을 지내하고, 1942(쇼와 17년)에 원수가 된다. 전후, 황족 중 유일하게 전범으로서 체포되지만 석방되었다.)과 佐賀藩 第11대 당주 鍋島直大(나베시마 나오히로)의 차녀 伊都子(이츠코)의 자녀(쇼와 텐노의 비, 香淳皇后의 사촌 동생)으로 태어났다.

쇼와 텐노의 비(키사키)의 제1후보 불린 최중... 의 1916(다이쇼 5년)년 8월 3일 아침, 언제나처럼 대기의 별저(梨本宮家는, 渋谷에 약2만평의 저택을 보유하고 있었다.)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었던 학습원 중등과의 생도(쇼와 텐노의 비가 된 久邇宮良子[쿠미노미야 나카코]는 方子(마사코)의 1년 아래)로서 15세의 方子(마사코)는, 그 날 신문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이 왕세자의 어경사 -  梨本宮方子女王(리본 궁 방자 여왕 / 나시모토 노미야 마사코 죠오)와 결혼’ 이라는 기사를 봤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진의 곁에는, 조선왕조 고종 왕국의 제7왕자 이은(李垠 / 1897~1970 / 일본명 昌徳宮李王垠 [창덕궁이왕은 / 리오 긴]. 1907년 순종의 황태자가 되어 11세에 인질로서 유학의 명목으로 일본에 옮겨져, 일본의 육군대학교 졸업. 1910년 일한합방이 되어, 일본의 황족대우를 받았다. 패전 시에 육군중장)의 사진이 거재되어 있었다.

게다가 당시의 황실전범은, 황족은 황족 혹은 화족(중에서고 구 섭정 가 클래스)와 결혼 할 수 밖에 없다는 규정이 있었지만, 일한합방 후, 구 한국황제의 친족이나 일족에 관한 칭호인 왕족과 공족, 즉 ‘왕공족’과의 결혼은 예정되지 않아서, 당시에 그런 규정은 없었다. 이은(李垠)과 마사코(方子)의 결혼을 위해 1918년에 황실전범의 ‘증보’(구 황실전범은 대일본제국헌법과 동격의 불마[不磨]의 대전이었기 때문에 보통의 법률처럼 ‘개정’이 아닌 증보로서 처리되었다.)하여, ‘황족여자는 왕족 및 공족에 시집가는 것을 허락한다.’의 문장을 추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로부터 4년 후, 여자학습원 고등과를 졸업한 마사코(方子)는, ‘일선의 다리’ ‘일선융화의 주춧돌’로서의 역할을 하기위해 1920년 4월 28일, 동경륙본목・조거판(東京六本木・鳥居坂)의 동경・이왕저(東京・李王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그 때, 결혼에 반대하는 조선인 대학생이, 피스톨과 폭탄을 갖고서 이왕저에 침입을 시도했지만 검거되었다).

그 때의 감상을 마사코(方子)는. ‘백견지에 자수를 한 영국풍궁 궁정대례복, 로프디콜테 드 트랜을 입고서, 닷츄의 날개를 장식한 츌을 머리에 쓰고 있었기 때문에 다이아를 붙인 왕관을 쓴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이 움직여, 동시에 구 조선왕비로서의 책임이 느껴졌다.’ 라고 말했다.

-> 이 부분은 번역이 조금 이상하게 되었습니다.(역자 주)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인도 조선인도 모두 일본의 국민이라고 하는 ‘내선일체(일선융화)’의 상징으로서 국가를 합치는(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한) 정략결혼이었지만, 마사코(方子)는 일본인이라는 것을 그만두고, 이은(李垠)과 같이 조선인이라는 생각으로 그를 이해하고, 지탱했다.

이은(李垠)과 결혼하고 도쿄에 살게 된 마사코(方子)는 결혼 2년 후 왕자를 출산했다. 이름은 晉(진)이라고 명명했지만, 조선 측의 강한 요망에 의해 생후 8개월의 진(晉)을 데리고 마사코(方子)는 남편과 함께 처음으로 1923년 4월 26일, 관부항로의 新羅丸(신라 환 / 시라기 마루)로 조선에 향했다. 조선 측은 부부를 열렬히 환영해, 2주간 귀국행사는 멈추지 않고 마무리되어, 일본에 귀국하는 날에 비극은 일어났다.

헤어짐의 만찬회 후, 방에 돌아가 보니 진(晉)이 청록색의 무언가를 토해내는 걸 보았다. 그리고 3일후, 격렬한 뇌우 속에서 진(晉)은 겨우 8개월의 생을 마쳤다. 일본인의 의사들은, 급성 소화불량이라고 판단했지만, ‘혈통을 중히 여기는 조선왕가가 일본인의 피에 더렵혀지는 을 싫어했다.’ 라는 독살설이 유포되었다.

1931년 12월 29일, 마사코(方子)는 2번의 유산을 계속하다가, 왕자 玖(구)를 출산, 남편은 1935년 우도궁(宇都宮) 제 14단 보병 제 59연대의 연대장으로서 부임, 1943년에는 제1 항공군 사령부에 부임했다.

그리고 패전.

점령군의 민주화 정책의 일환으로서 이루어진 황족의 특권 박탈[신적 강하 : 구 헌법 하에서, 황족이 그 신분을 떠나 신적이 되는 것. 황족으로서 남은 것은 텐노(天皇)와 직접 피가 이어진 직관(直宮 시키미야)의 秩父・高松・三笠의 3궁가(3宮家)뿐. 게다가, 전쟁 전 일본(대일본제국)에서는, 황족은 秩父, 高松, 三笠의 3궁가와, 東伏見, 山階, 伏見, 賀陽, 久邇, 朝香, 梨本, 東久邇, 北白川, 竹田, 閑院의 11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에 의해, 이은(李垠)은 (역주 : 일본제국 속국인 조선국의)왕족으로서의 신분을 잃어, 재일한국인으로서 등록되었다.

1950년에는 맥아더가 불러들인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과 이은(李垠)이 회담을 했지만, 이승만은 고국으로 귀국을 희망한 이은에게 ‘귀국하고 싶다면 귀국하라.’라고 전했다.

차갑게 취급된 이은은 결국 귀국을 포기했다.

1960년에 대통령에 4번째 당선된 이승만이었지만, 그 다음해에 부정선거에 격노한 학생들에 의해 민주화 혁명에 의해 실각되었다. 쿠데타에 성공하여 권력을 쥔 박정희가 뇌혈전으로 쓰러진 이은(李垠)을 상태를 생각해서 한국에서의 생활비와 의료비를 한국정부가 보증할 테니 귀국하라는 연락을 했다.

1963년 11월 22일, 황태자로서 11세에 고국을 떠난 이후로, 조선전쟁(6.25 한국전쟁)의 결과 38도선에서 남북이 분단된 조국한국에, 실로 56년 만에 귀국하는 남편 이은(李垠)을 따라 한국 국적을 취득한 마사코(方子)는 한국에 왔다.

이승만 정권에 의한 12년간에 이르는 엄격한 배일정책의 결과, 반일감정은 극한에 달했지만, 한국국민은 부부의 귀국을 대환영, 길이 끊어질 정도로 많은 사람이 손을 흔들고 환영하였다. 하지만, 뇌혈전과 뇌연화증으로 이미 의식이 없어진 채로 침대에 누워있던 이은(李垠)은 그것조차 보지 못한 채로, 나라의 땅을 밝아보는 일 없이, 그대로 병원차로 서울의 성모병원에 직행할 수밖에 없었다. (귀국 7년 후 1970년에 이은(李垠)은 사망).

한국에 귀국하는 것은 인정되었지만, 이전의 국왕으로서의 재산은 몰수되었기 때문에, 한국정부에서 지급된 경비는, 이은(李垠)의 입원비와 생활비로 없어져 버렸다. 그러던 중에  방자(方子)는 자금을 모으기 위해 취미로 만들던 七宝焼(칠보소)를 팔기 시작하는 한편, 포리오등으로 마비된 아이들의 자립능력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정신박약아의 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방자(方子)의 노력은 지적장해아 시설 ‘명휘원’(明暉園 ‘明暉’는 이은(李垠)의 어릴 적 호칭)을 설립, 그 후 정신박약아를 위한 ‘자혜학교’를 창설로 결실을 이뤄, 많은 한국국민이 ‘한국장해아의 어머니’로서 경애 받는 존재가 되었다. 1989년, 87세로 서거했다.)

여기서, 15세 때의 ‘일한의 다리’가 되려고 한 결의대로, 그 후 72년간 ‘파란의 길’을 걸어온 방자(方子)는, 그 험한 인생을 마쳤다.

방자(方子)의 장례의식은 준 국장(準 国葬)으로서 취급되어, 1989년 5월 8일, 한국에서는 수상인 강영훈, 일본에서는 三笠宮同妃両殿下(삼립궁동비량전하)가 참례했다. 옛날 방식으로 1000명이 장례 행렬이 되어, 많은 수의 한국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선왕조 왕궁에서부터 이미 19년 전에 세상을 떠난 이은(李垠)이 잠든 왕가의 묘까지 2키로의 길을 장례행렬이 지나갔다.

게다가 2002년 5월 31일, 한국을 방문중인 高円宮(타카마도 노미야 : 1984년, 三笠宮崇仁[타카히토] 친왕의 제3황자 憲仁[노리히토] 친왕 [2002년 11월 22일, 47세로 사망]이 창립) 부부는, 방자(方子)가 처음으로 창립한 서울에 있는 장해자복지시설에서 방자(方子)가 쓴 예복과 구두 등의 유품이 전시된 명휘원(明暉園)을 방문했다. 그 때, 방자(方子)의 친구인 한국인 여성 김수임(金寿妊 81세)씨가 ‘天皇陛下[텐노 폐하]에게 방자(方子)의 묘에 한 번 와달라고 전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니, 타카마도 노미야(高円宮)는 ‘예, 전해드리겠습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이방자 저 ‘지나간 세월’(명휘원1968년 비매품)

이방자・이보혜 저 ‘세월이여 왕조여’ - 후에 조선왕비자전 -(삼성당 1987년)

이방자 저 ‘흘러가는데로’ (강담사 1968년)

이방자 저 ‘동란중의 왕비’ (계우사 1984년)

参考文献

李方子著『すぎた歳月』(明暉園1968年 非売品)

李方子・李保慧著 『歳月よ王朝よ』-後の朝鮮王妃自伝-(三省堂 1987年)

李方子著『流れのままに』(講談社 1968年))

李方子著『動乱の中の王妃』(啓佑社 1984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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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cc.matsuyama-u.ac.jp/~tamura/rimasako.htm#zouho 에서 직접 번역
최초 번역일 2004 - 8 -  2
중간 수정    2004 - 8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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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자 2005 - 7 -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