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지방 모 일간지에 실린 오피니언 글입니다. 많은 것을 느껴서 올려봅니다.


회개하라 이긴 자들이여

자기의 땅에서 쫓겨나 수천 년을 유랑하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있다. 유랑하던 그들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로부터 물려받은 멸시와 차별, 그리고 질기고 잔인한 폭력의 기억이 그들을 강인한 민족으로 단련시켰다. 돌아온 고향에서 그들을 맞이한 건 척박한 땅과 바람, 그리고 가난한 이민족들의 마을이었다. 영문도 모르는 이민족들의 마을을 부수고 그들의 잠자리를 빼앗아 마침내 새로운 나라를 세웠을 때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 수십 년, 펄럭이는 난민들의 천막과 나뒹구는 밥그릇을 딛고 그들은 악착같이 번성했다. 세상이 그들의 편이었고 부자들이, 강대한 나라들이 친구가 되어주었다. 아니 그들의 동족이 구석구석 세상을 두루 다스리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어려울 것 없이 승승장구 했다.
해가 갈수록 이교도들의 땅은 좁아졌고 그들의 구차한 살림살이는 거대한 장벽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땅과 자유와 먹을 것을 잃은 이교도들은 세상을 향해 자비와 동정을 구걸하다가, 눈물로 애원하다가, 마침내 어린 자식들의 몸에 폭탄을 둘렀다. 폭탄은 더 큰 폭탄을 부르고 작은 죽음은 큰 죽음을 불렀다. 이긴 자들과 그들의 친구들은 어린 이교도들의 몸에 두른 폭탄을 손가락질하며 끔찍한 야만인들이라고 저주하고 외면하였다. 한 해가 가고 새해의 붉은 태양이 뜨는 축복의 시간 동안, 쫓겨난 이교도들의 마을은 무너진 집들과 울음소리와 찢긴 시신들이 즐비한 거대한 무덤으로 변했다. 이긴 자들의 마을에서는 신의 은총을 찬양하며 승리의 축배를 높이 들어올린다. 저 축복받은 선민의 해사한 처녀들은 무너져 불타는 담 넘어 마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한다.
이것은 연극 속의 한 장면이 아니다. 지나간 오래 전의 역사 이야기가 아니다. 2009년 새해 벽두에 비행기로 채 하루가 안 걸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시대의 첨단 미디어들이 생생하게 친절하게 담아서 전 세계에 전해주고 있는 ‘지금 여기’의 이야기이다. 어린 소녀의 가냘픈 몸에 두른 폭탄을 제거한답시고 그녀의 가족과 이웃과 마을과 친구들과 학교와 병원과 구호소까지 수백 대의 비행기와 수천 톤의 폭탄으로 불구덩이를 만드는 나라-, 그 위대한 신의 나라 이야기이다.
국제사회에 이 야만의 살육을 제어할 힘이 있는가? 유엔의 특별조사관마저 공항에 억류했다가 강제출국시켜버리는 이 안하무인의 살인자들을 응징할 장치는 과연 있는가? 돈과 권력과 그를 바탕으로 한 로비력, 거기의 거짓 신의 권위까지를 총동원하여 벌이는 이 만행을 말릴 이는 과연 누구인가?
  “어머니의 빵이 그립습니다.
   어머니의 커피도
   어머니의 손길도
   아이의 마음이 내 속에서 자라납니다.
   하루 또 하루
   저는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제가 죽으면,
   어머니의 눈물이 부끄러우니까요!“
예수가 거닐던 갈릴리 바닷가에서 태어났고 재작년 전주에도 다녀간 팔레스타인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시이다. 악화된 건강에서 불구하고 막걸리잔을 부딪히며 희망을 이야기 하던 그는, 전주를 다녀간 지 몇 달뒤에 고인이 되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다시 벙커버스터의 불바다가 재연되고 있다. 희망은 시인의 몫이지만 회개는 이긴 자의 몫이다. 신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세상의 모든 이긴 자들이여, 힘 없고 가난한 이들, 가자의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 죽은 아이들의 영혼에 눈물로 회개하라.

                                                                -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곽병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