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서울대학교 화공과에 재학 중 1954년 도미, 미국 마이애미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여 196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입자물리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1~1962년 프린스턴고급과학연구소 연구 후, 1963년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교수가 되고, 1966년부터 미국 스토니브룩의 뉴욕주립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1972년부터 페르미가속기연구소의 이론물리학 연구부장이 되고 시카고대학교 교수를 겸하였다.

1960년대부터 입자의 복합모형이 제창되어 수학의 리군이론이 많이 사용될 때 그 발전에 기여하였다. 1967년 이후에 와인버그와 A.살람이 입자물리학의 네 힘 중에서 특히 전자기력과 약한 상호작용을 통일하여 만든 전기약작용을 재규격화할 수 있다는 이론적 증명을 함으로써 입자물리학 발전에 획기적 공헌을 하였다. 특히 1970년대에는 네번째 쿼크인 참쿼크의 존재가 예견되었을 때 이와 관련된 이론적 연구업적은 잘 알려져 있다.

1974년에는 서울대학교에 대한 국제개발처(AID) 교육차관 타당성 조사단의 일원으로 일시 귀국하여 한국 물리학계에도 큰 자극을 주었다. 1977년 6월 16일 콜로라도주(州) 국립과학연구소의 초청강사로 가는 도중 의문의 자동차 사고로 42세로 죽었다.

이휘소는 누구인가?

한국이 낳은 천재이다.

아이슈타인 다음으로 물리학에 있어 최고로 꼽혔던 그 주인공.

그의 인생은 드라마였다.

그리하여 이휘소의 생애가 1993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라는 소설로 출판되고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천재 이휘소는 우리 나라에서 공부를 하며 물리학에 대해 지식을 갖고 미국으로 건너가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그때 당시 핵을 개발하고있던 나라는 미국과 구소련 밖이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은 이휘소의 머리로 인해 핵개발을 급속도로 진행하였다.

미국에서는 이휘소를 보며 "야 한국에서도 이런 놈이 다있네~?"

" CIA에 연락해서 이놈 스파이짓 못하게 철저 감시하라고해"

" 이놈이 본국인 한국에 가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자나"

미국의 핵개발 권위는 모두 이휘소의 두뇌에 있었다.

이휘소가 미국 핵개발의 대장이였으며 미국의 핵개발을 지도하였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이휘소를 다른나라에게 안뺏길려고 막대한 자금을 부여하며
이휘소를 미국에서 살게 하였다.

이휘소는 미국에서 잘해주는지 알고 좋아라 하며 핵개발에 더욱 치중할 당시
미국은 뒤에서 이휘소를 철저한 감시를 하였다.

한편 한국에서는 박정희가 핵에 관심을 두고있었다.

그 때 박정희 아래에 있는 사람이 " 미국에 이휘소라는 사람이 있는데 핵개발에 있어
중요한 인물입니다" 라는 말을 하고 박정희는 이휘소에게 당장 연락하여 우리 한국으로
다시 와서 핵개발을 맡아달라고 전화를 하였다.

이휘소는 애국자로 자기가 고국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거에 대해 기뻐 좋아라 했다.

하지만 그때 이휘소는 뭔가 모른 낌새를 느꼈다.

CIA의 감시였다.

이휘소는 생각을 하였다. 핵개발 칩을 어떻게 한국에 가져갈수 있을까?

결국 생각한게 자기의 허벅지 안쪽을 파서 그 안에 칩을 넣고 한국으로 건너갔다.

그 후로 한국과 미국을 여러번 들락날락 거리면서 일을 하였을때 미국에서는 눈치를챘다.

"이 놈 우리가 잘 대해주니깐 스파이짓을하네"
" 안되겠어 죽여야되겠어"

결국 CIA는 이휘소를 죽이려 하였다.

죽이는 방법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교통사고였다.

미국이 눈치를 챘다는걸 모르는 이휘소는 그 날 가족과 드라이브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반대에서 거대한 트럭이 들어박아 그자리에서 사망을 하였다.

한편 미국에서는 "불의의 죽음 이휘소" 라는 설로 그 사고를 안타까운 사고로 뒤덮어버렸다.

이휘소는 그 당시 노벨 물리상의 후보에 올라있었으나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내 못받았다.

한국이 낳은 비운의 천재... 이휘소..


출처 : 온라이프21 "풍운아" 님께서 쓰신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