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흔히 돌아다니는 이야기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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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부합되지 않는 내용이지만...
꼭..한번씩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운영자님 삭제는 함 봐주세요^^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2004년 4월 17일,
이젠 고인이 되신 故 서부희님과
‘D’ 출판사에 근무하며 ‘K’ 대학 경영학부 야간 1학년에 재학중인
‘김’모씨는 서로에 대한 설렘을 안고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 후 2005년 3월까지 둘은 보통의 남녀가 그러하듯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자살 후에 발견된 유서와
고인의 어머님께 전해들은 소식은 우리가 들었거나
짐작했던 사실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고인은 전부터 남자친구의 대한
주위사람들의 평판이 신경 쓰여
좋은 점만을 얘기했고 힘든 모든 일들을
어머님에게만 얘기했었습니다.
특히 고인께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관계를 거부하시다
‘너와 결혼하겠다. 내가 널 책임질 테니 날 믿어라’는 한마디에
너무도 어리석게도 허락하여 첫 관계를 맺은 후부터
돌변한 ‘김’모씨의 행동에 대해
어머님께 전해 들은 저희는 정말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했습니다.
더욱이 유서에 남겨진 것과 같이
교제 기간 동안 관계를 맺기 위해 자신을 믿으라며
‘김’모씨는 고인과 함께 구체적으로 혼수와 신혼 집에 대해 얘기했고
양가 부모님께도 허락을 받아
양가가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교제를 해왔습니다.

고인과 ‘김’모씨와의 만남부터 오늘의 이르기까지의 모든 얘기들을
이 좁은 종이 위에 모두 거론하기엔 모자라지만
故 서부희님께서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마음 고생하며
괴로워하던 몇까지의 사건들을 이곳에 정리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2004년 8월 故 서부희님과 ‘김’모씨는 ‘김’모씨가
여름휴가를 빌미로 만난 지 4개월 만에 제주도로 여행을 갔습니다.
고인께서 어리석으셨던 것일까요?
단순히 연인 관계에서의 여행이라 생각하고
별다른 준비 없이 여행을 떠난 그곳에서
‘김’모씨는 결혼을 전제로 하여
자신이 고인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한 후
관계 맺기를 수 차례 요구했습니다.
고인은 만난 지 4개월뿐이 되지 않았고
더욱이 처음 경험하는 것이기에
두려움과 걱정으로 끝까지 관계를 거부하였습니다.
하지만 ‘김’모씨는 이곳까지 왔고 또 결혼을 약속한 상태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며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다녀온 후부터 ‘김’모씨는 독립해 나오라며
자신의 집 근처인 화곡동 언덕 맨 꼭대기에
이미 경매로 넘어가 싸게 나온 집을 얻게 하였습니다.
고인께서 집을 얻은 후부터 ‘김’모씨는
결혼을 빌미로 집 열쇠를 하나 얻어내고
자신의 집처럼 고인의 화곡동 전셋집을 오가며
계속하여 관계를 맺었습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관계로 인해
고인은 임신을 하게 되었고 여성으로서는
죽기보다 더 고통스러운 자연 유산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김’모씨는 고인과 같이 병원에 몇 차례 다녀와 주었지만
이때부터 고인을 무시하며
결혼에 대한 얘기를 외면하고 행동마저 돌변하여
관계를 요구하는 때 이외에는
외식이나 데이트 없이 연락하는 횟수가 뜸해졌다고
고인의 어머님께 자주 하소연 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 잦은 다툼과
책임 회피에 고인은 ‘김’모씨에 대해 실망하여 올해 3월
헤어지기로 합의하고 헤어졌지만
며칠 뒤 다시 만나 “앞으로 사람답게 살겠다”고
“고인과 고인의 어머님께 정말 잘할 테니 지켜봐 달라”며
다시금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사귀는 것을 빌미로 3일간 계속하여
관계를 맺고 이때의 관계로 인하여
고인은 두 번째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3일이 지나자
다시 헤어지자고 하며 고인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끝으로
핸드폰도 받지 않은 채 연락이 두절됐다고
고인의 어머님께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에 분통하신 어머님은
자신이 직접 ‘김’모씨를 만나겠다고 했지만 고인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만나 잘 얘기해 보겠다며 ‘김’모씨가 재학중인 K대학교로
2005년 4월 11일에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김’모씨를 만난 고인은
잠시 대화하기를 부탁하였고 이에 ‘김’모씨는 대화를 하겠다며 같이
‘김’모씨의 차로 갔습니다. 그러나 대화를 하며 언성이 높아지고
‘김’모씨가 임신에 대하여 책임회피를 하자 고인은 오른손을 들어
‘김’모씨의 뺨을 때리려 하였지만
‘김’모씨가 고인의 오른손을 낚아채고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때리려 하였습니다.
그렇게 손을 잡힌 고인께서
“차라리 때려라”는 말에 ‘김’모씨는 “개 값 물기 싫다”며
차에서 내려 조수석으로 걸어와
고인을 차문 밖으로 끌어내렸습니다.
그때 차에서 밀쳐져 바닥으로 떨어지며 구두굽이 부러진 고인은
이에 너무도 상처를 입고서 어머님께 전화하여
‘이제는 정말 끝났다’며 하소연 하였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어머님께서 너무도 화가 나셔서
평소 지병이신 저혈압으로 집에서 쉬고 계시던 2005년 4월 12일
‘김’모씨에게 연락하여 만나기를 청했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딸과
결혼까지 약속하고 만나던 사위 같은 사람이었기에
‘김’모씨가 만나기 편한 곳을 정하고 연락해 달라고 부탁하였지만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아 재차 전화를 했을 때야
‘김’모씨가 정한 시간에 인근 커피숍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커피숍에서 ‘김’모씨를 만난 어머님은
그래도 자신의 딸이 사랑했던 사람이기에 좋은 말로 타이르며
둘이 대화를 통해 잘 해보길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김’모씨는
어머님의 얘기를 듣는 척도 안하며
‘어머님께 일일이 보고할 의무도 없고
모든 얘기를 들으실 권리도 없지 않습니까? 라 말하고
대답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로 어르고 달래도 듣지 않자
너무도 속상하셨던 어머님은
끝내 딸이 ‘김’모씨가 걱정할 테니 얘기하지 말라던
두 번째 임신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같이 병원에 다녔던 ‘김’모씨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애가 내 애가 맞느냐? 임신을 했다 해도
그저 정자 덩어리일 뿐이다. 임신은 어차피 당사자의 일이고
성인 남녀로서 가질 수 있는 성적인 것일 뿐이다’며
어머님께 반문했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어머님이 ‘김’모씨에게
장모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으로서
너를 안 때리고는 못 가겠다고 하시며 안경을 벗으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김’모씨는 순순히 안경을 벗었고 어머님은 ‘김’모씨에게
우리 사랑하는 딸 눈에 눈물 흘리게 한 죄,
책임지겠다고 약속해놓고 못 지킨 죄,
마지막으로 앞으로 사람답게 살라며 ‘김’모씨의 왼쪽 뺨을
자신의 오른손바닥으로 세 대 때렸습니다.
그러자 ‘김’모씨는 바로 안경을 쓴 후
커피숍의 웨이터를 호출하여 경찰에게
어머님을 폭행혐의로 신고하도록 했습니다.
물론 웨이터는 몇 번이나 극구 말렸으나
‘김’모씨는 자신의 어머님과 같은,
장모님 되셨을 뿐을 경찰에 고소했습니다.
그 후 출동한 경찰에게 연행당하여
처음에는 파출소로, 그 후에는 경찰서로 불려가셨습니다.
고인은 평소 지병인 저혈압으로
병원에 계셨던 어머니께서 몇 시간 동안 조서를 꾸미시고
온몸의 마비증상으로 열손가락에 지장 찍는 것마저 겨우 마친 후
유치장에 들어가셔서 쓰러지시자
어머니가 더 이상 험한 꼴 보시지 않도록
경찰서에 동행한 ‘김’모씨에게 무릎을 꿇고
일단 합의하여 어머님 만이라도 집으로 모시자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김’모씨는 ‘법대로 해라’며
고인이 발목을 잡고 애원하느라 벗겨진 신발을
손에 든 채 경찰서에서 빠져나갔습니다.
그 이후 어머니가 계속 쓰러지시며
마비증상이 오시자 보다 못한 고인은
다시금 ‘김’모씨에게 전화하여 울며
어머니를 풀어달라 애원했지만 ‘김’모씨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습니다.
자신도 장모님이 되실 뻔한 연세의 어머님이 계시면서도
‘김’모씨는 전화를 끊은 직후 경찰서 담당 형사에게 전화해
‘지금 연기하는 거 아니냐? 혹시 동정을 얻으려
쑈 하는 거 아니냐?’고 담당 형사에게 한말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이때 전화를 받은 담당 형사님도 어머님이 저혈압으로 돌아가셨기에
그녀의 어머니가 쓰러진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다급한 상황임을 인식하시고 전화를 한 ‘김’모씨에게
당신도 어머님이 계신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다른 누구도 아닌 장모님이 되셨을 분한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고 고함을 치신 후
전화를 끊으신 채 위급한 상황의 어머님께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시도록 해주셨습니다.
그 후 어머님께서 저혈압과 마음에 상처로 인하여
계속하여 마비 증세가 오시며 호흡곤란까지 겪으시자
고인은 어머님을 병원으로 모셨습니다.

이후 병원에서 호흡곤란으로 산소 마스크를 쓰신 채
깨어나시지 못하는 어머님을 지켜봐야만 했던 고인은
어떤 심정이었을지 살아있는 저희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유서에 나와있듯이 이때 자살을 결심한 것으로
유가족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간이 한참 지나 산소 마스크를 쓰고 계시던
어머님이 깨어나실 때 어머님의 눈가에서
쏟아지던 눈물을 보며 고인은 ‘엄마 미안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 잔인한 사람 만나
엄마 아프게 해서 미안해. 엄마 미안해’란 말만을 되풀이 하다
끝내 ‘엄마 다시는 이런 일 안 겪게 해줄게’라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혼자 자취하던 화곡동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물건들을 하나 하나 정리한 뒤 2005년 4월 16일
(병원에서 어머님이 깨어나신 지 4일 후이자 ‘김’모씨를 만난지
딱 1년에서 하루 모자라던 날)에 어머님께서
불면증으로 처방 받으시고 복용하시던
신경 안정제 90봉을 한꺼번에 복용한 뒤 눈도 감지 못한 채
코에서 한말의 피를 쏟으며 돌아가셨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고인께서 돌아가신 그때
어머님께서 병원에 계시고
‘김’모씨 외에는 집 열쇠를 가진 사람이 없었기에
유가족들의 연락이 없는 가운데
고인이 홀로 방에 남겨지신 채로
일주일이 지난 2005년 4월 22일 밤에야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고인의 집에 들어가
고인을 발견한 것은 어머님과 ‘김’모씨 였음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김’모씨는 한번도 연락하지 않은 채
핸드폰을 꺼두고 있었습니다.
이에 유가족과 지인들이 계속하여 음성을 남기고 문자를 보내자
그제야 마지못해 장례식 마지막 날인 새벽1시경에
‘김’모씨란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분노한 유가족들과 살아생전의 지인들이 모두가
쳐다보는 가운데에서도 ‘김’모씨는 장례식장의 영정 사진 앞에서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채
그녀의 부모님께 죄송하단 말 한마디 미안하단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앉아만 있었습니다. 미리 연락을 해둔 것인지
나중에 ‘김’모씨라는 사람의 둘째 형이 찾아와
‘김’모씨를 데려 가려 했고, 유가족들은 그래도 1년간 교제하며
헤어진 지 한달도 채 안되 고인이 되신 분 앞인데 마지막 가는 길은
봐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자 둘째 형은 당연하다는 듯이
경찰관을 대동하여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둘째 형이란 사람이
경찰관에게 유가족들과 지인들 모두가 빤히 보는 앞에서
감금을 당했다며 ‘김’모씨가 나오도록 얘기했고
‘김’모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양복을 챙긴 채 고인의 영정사진 한번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신발을 손에 든 채 ‘김’모씨의 형과 함께 도망갔습니다.
나중에야 전후 사정을 들은 경찰관계자 분들은 서둘러
‘김’모씨란 사람에게 연락했지만 핸드폰은 꺼져있었고
지금까지도 연락이 두절된 상태입니다.

이 한 장의 종이에 적힌 몇 마디 글로 어찌 딸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을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신경안정제를 과다 복용한 채
두 눈 똑바로 뜨고 코피를 흘리며
싸늘하게 시체가 되어있던 자신의 딸을 보낸
어머니의 심정을 어찌 이 몇 글자 글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방에서 일주일이나 방치되어
뼈와 살이 썩어 들어가 마지막 가는 길까지
편히 눈감지 못한 그녀의 한을 어찌 이 한 장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찾아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미안하단 말 한마디 안하고
두 눈 똑바로 뜬 채 자신의 형이 오자
부랴부랴 도망간 그 사람을 보며
고인의 어머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셨겠습니까?

마지막으로 ‘김’모씨란 사람에게 이 몇 마디 글로 복수하겠다거나
사회생활을 못하게 하겠다는 복수심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단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쓴 각서의 내용을, 그 약속의 내용을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지켜주길 바랄 뿐입니다.
(결혼에 대한 약속마저 지키지 않았던 사람이기에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생전에 지키지 못한 약속을
지켜주겠다며 자필로 쓴 그 약속을 지켜주길 바랄 뿐입니다.)
또한 故 서부희님을 아는 사람들 중
대체 그토록 해맑고 다른 사람들에게 따스하던 그녀가
90봉지에 들었던 수없이 많은 약을 억지로 입에 구겨 넣은 채
눈조차 감지 못하고 사랑하던 어머니의 곁을
떠 날 수 밖에 없었던 지에 대해,
‘김’모씨란 사람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웃으며
뒤로는 철저히 한 영혼을 짓밟은 모습에 대해
알아주길 바랄 뿐입니다.
용서도 복수도 이해도 아닌,
그저 우리 시대에 또 한 사람의 작은 영혼이
아무런 이유 없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주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으로 씁니다.

화사하게 핀 봄의 꽃들조차 다 보지 못한 채 좁고 작은 단칸방에서
옛 사진을 바라보며 눈조차 감지 못하고 우리 곁을 잠시 떠나신
故 서부희님의 명복을 빕니다.
진심으로 애절하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싸이월드 부희님 홈피 입니다..
http://www.cyworld.com/tomato117
추모카페 입니다..
http://cafe.daum.net/tomato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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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저 정도 일 때문에 자살을 선택하다니............

고인이 애초에 세상 오래살고싶은 마음도 있기나 했던걸까 의심스러워집니다.

정말 죽도록 사랑했었고 그 때문에 믿었고 그러다 배신당한것이라면 차라리 복수나 응분의 조치를 취하는게 옳은일 아니었을까요?


겨우 저런일때문에 그 괴로움을 못참고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다니...... 씁쓸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