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22화에 나온 롱기누우스의 창은 거대한 창으로 에바나 사도의 AT 필드를 무력화 시키는 강력한 무기이다. 터미날 도그마의 릴리스의 몸을 봉인 시켜둔 것으로써 자세한 내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사도를 파괴 시킨 후 이 병기는 달의 표면에 박혀 버려 회수가 불가능 했었으나 에바 극장판(Death and Rebirth)에서 다시 한번 등장한다. 종교적 상징물로 여겨지는 이 병기는 악과 선을 심판하는 고대 이집트의 종교적 상징물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찔렀다고 전해지는 창. 여기에 찔리게 되면 창으로 상처를 덮지 않으면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고 하는 황당한 물건. 성배 등과 동열.
롱기누스 : 예수 처형의 장에 입회했던 백인대장의 이름
2003.01.28 22:52:55 (*.243.134.82)
양파
저번에 마님이 이야기 해주셨는데 롱기누스라는
병사가 예수를 향해 창을 찌를때 그 속에 악마가 들어 갔답니다.....흠 자세한건 저는 모르겠음 -_-;;;
2003.01.28 22:55:55 (*.187.82.216)
신궁
성경속에서의 롱기누스
예수의 십자가 곁에 서서 로마병을 지휘한 백부장(마 27:54, 막 15:39, 눅 23:47). 그는 예수의 최후의 감동적인 모양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도다]라고 고백했다. 물론 이 [하나님의 아들 uiJo;" qeou' ]이라는 말에는 정관사가 동반해 있지 않고, [신적(神的)인 인물](demigod)이라는 정도의 뜻으로서, 엄격한 신학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아들 oJ uiJo;" tou' qeou' ]과는 구별된다. 외전 복음서에서는 이 백부장의 이름은 페트로니우스(petronius), 또는 롱기누스(Longinus)인데, 이 롱기누스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 [창(槍) lovgCh (logche)]으로 찌른 기술에서 온것(요 19:34)이라고도 말해지고 있다.
3. 고넬료라는 백부장(행 10:1). 그는 베드로의 전도로 그리스도교인이 된 최초의 이방인 회심자였다.
4. 예루살렘에 주재하여 치안 유지에 임하고 있던 무명의 백부장(행 22:25-).
5. [율리오]라는 백부장(행 27:1, 6). 그는 근위대인 아구사도대(-隊)의 백부장으로, 바울의 로마 호송을 맡고 있었는데, 바울에 대하여 이해 있는 취급을 했다
2003.01.28 22:56:28 (*.187.82.216)
신궁
아참
성경있으신분
마태복음 8장 5절 찾아보세요
성경마다 다르니;
흐음...
2003.01.28 22:57:44 (*.187.82.216)
신궁
요한복음 19:31-37
여기에도 나와있군요
예수의 처형(요한복음 19:31-37)
그리스도가 죽으신 후 그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는 기사는 본 복음서 기자만이 기록하고 있다.
Ⅰ. 유대인들의 미신적 관습을 먼저 고찰하여 보자. 본문의 사건은 이 관습이 동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본문에(31절) "이 날은 안식일을 위한 예비일이었다. 그런데 이 안식일은 유월절 주간에 속하여 있었으므로 그들은 특히 이 안식일에 경의를 표하여 큰 날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이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않기를 바랬다. 그리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눈에 띄지 않게 묻어 달라고 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조치는 필연적인 것이었으나 이같이 서두룬 것은 잔인스러운 조치였다. 본문을 통하여 아래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1. 그들은 다가올 안식일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였다는 소리를 사람들에게 듣고 싶었다. 왜냐하면 이 날은 누룩을 먹는 날들 가운데 한 날이었고 첫 소산물을 드리는 날이기도 하였다. 모든 안식일이 다 거룩한 날이요 즐거운 날이었으나, 이 날은 me=galh h`mera - 즉 큰 날이었다. 유월절 기간 중의 안식일은 큰 날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성례 집행 주일, 성만찬 일은 큰 날들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날들을 위해서는 보다 정성된 준비가 있어야 한다. 이는 이 날들이 "하늘 나라에서의 날들처럼" 우리에게 진실로 큰 날이 되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2. 만일 시체가 십자가에 메달린 채 남아 있으면 이 날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본래 유대인의 법에 따르면 시체는 당일에 장사하도록 되어 있었다(신 21:23). 그러나 이 경우에 유대인들은 이 날이 비범한 날이 아니었더라면 로마인의 관습대로 따르려고 하였었다. 하지만 이 날에는 각처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드는 날이었고 그러기에 시체를 남겨두면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나 않을까 저희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각처에서 모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린 모습을 참고 볼 수도 없으리란 점을 알았다. 그들의 양심이 화인맞지 않은 한 그들의 분노의 열기가 진정되면 자기들을 비난할 것을 대제사장들은 알았다.
3. 그들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저희들의 시체를 치워 달라고 빌라도에게 간청하였다. 그들은 저희를 목 베거나 목을 졸라서 죽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는 마치 불란서인들이 마차 바퀴에 매달아 돌려서 찢어 죽이는 형을 당하는 사람에게(이른바 블란서인들이 부르는 명칭대로) coup de grace - 즉 자비의 최후의 일격을 가하므로 죽는 자를 편안하게 해 주듯이 저희를 그들의 비참함에서 속히 놓여나게 해 주는 인정심 많은 행동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장 격렬한 고통 속에서 저희들이 죽도록 저희의 다리를 꺾어서 치워 달라고 청하였다. 다음 사실들을 기억하자.
(1) "악인이 베푸는 자비는 친절을 위장하지만 실상은 잔악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위선자들의 허위된 거룩함은 가증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들 유대인들은 사람들로부터 자기들이 안식일을 대단히 존경한다는 소리를 듣기를 원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정의와 의(義)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죄 없으시며 훌륭한 분을 십자가에 매다는데 아무 거리낌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시체를 십자가에 매달아 두는 일은 주저하였다.
Ⅱ.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의 처분(23절). 빌라도는 아직도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여 그들의 요구대로 명을 내렸다. 그러자 "병사들이 와서" 애석한 마음을 감추고 모진 각오를 가지고 "두 강도의 다리를 꺾었다." 다리를 꺾을 때 강도들은 단발마의 비명을 질렀다. 훗날 잔인한 성격의 네로가 흔히 하였듯이 병사들은 죽는 자들이 스스로 죽음을 의식할 수 있도록 형을 가하였다. 이 강도들 중의 한 사람은 회개한 사람이었고 그리스도로부터 그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자였다. 그럼에도 그도 다른 강도와 같은 고통을 느끼며 비참한 가운데 죽어갔다.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똑같이 이루어졌다"는 말씀과 같다. 사실 하늘 나라에 간 많은 사람들도 죽음이란 운명을 면하지 못하고 영혼의 비통 속에서 죽어갔다. 하지만 죄악의 고통스러운 죽음도 죽음 저편에 준비된 생생한 위로에 거룩한 영혼들이 들어가는데 장애가 되지는 못한다. 그리스도는 죽어 낙원으로 가셨다. 그리고 그는 거기까지 그를 경호해 줄 한 호위병으로 이 강도를 임명하셨다. 하늘 나라로 가는 대는 먼저 "첫 소산물이시며 첫 주자(走者)이신 그리스도가 서시고 다음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자들이 그 뒤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Ⅲ. 그리스도의 죽음 여부를 가리려는 검증 및 그가 죽으셨다는 확실한 판결.
1. 그들은 그가 죽은 것으로 단정하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였다"(33절).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예수는 못 박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죽는 것보다 일찍 돌아가셨다. 그의 몸의 구조는 아마 비범하게 섬세하였으므로 고통을 받으시자 더 빠르게 부서지고만 것으로 보여진다. 아니면 이 사실은 그가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셨다는 것과 비록 그가 손에 못이 박혀 움직일 수는 없었으나 원하실 때 죽으실 수 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보여 진다. 그는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셨고 결코 죽음에 정복당하지는 아니하셨다.
(2) 그는 원수들은 그가 참으로 죽은 것을 알고 만족해 하였다. 형장 곁에 서서 형이 효율적으로 집행되는 것을 보던 유대인들은 그에게 형을 가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이 서기까지는 이 잔학스러운 짓을 계속하려고 하였다.
(3) '인간이 심중에 무슨 계획을 하든지 여호와의 뜻은 설 것이라"는 것이다. 그의 다리를 꺾으려는 것은 완벽한 계획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다른 데 있었으므로 그 일은 저지되고 말았다.
2. 그들은 그가 죽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으므로 논쟁의 여지가 없도록 그의 몸을 검증해 보려고 하였다. 실은 이미 "병사 한 사람이 창으로 그의 심장을 겨누고 찌른 것이 그의 옆구리를 찔러 거기서 피와 물이 흘러 나오기까지 했던 것이다."(34절).
(1) 그 병사는 예수의 죽음의 여부를 알아내려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예수는 그의 옆구리에 난 명예로운 상처 때문에 저희가 다른 두 명에게 취하였던 수치스러운 처리 방법을 면할 수 있었다. 전승에 의하면 이 병사의 이름은 "롱기누스(Longinus)"였다고 한다. 그는 눈에 병이 걸려 있었는데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몇 방울의 피에 의하여 그 병을 즉시 고침을 받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신빙성만 확립될 수 있다면 이 사건은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2)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실을 통하여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점을 나타내시려는 경륜을 가지고 계셨다.
[1] 그가 진실로 죽으셨음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더 나아가 그의 부활의 확실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만일 그가 실신 또는 기절하신데 불과하였다면 그의 부활은 허위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검증에 의하여 그가 죽으셨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왜냐하면 창이 그의 생명의 근본을 격파시켰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과 질서에 의하면 이같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또 거기서 그만큼 피를 흘리고 인간의 신체가 살아 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2] 그의 죽으심의 경륜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죽음에는 많은 신비가 있었다. 이 사실은 같은 상처에서 "피와 물"이 명백히 분리되어 흘러 내렸다는 기적적인 사건을 통하여 그의 죽음의 신비는 엄숙하게 입증되었다. 적어도 그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요한 사도는 요한 5장 6,8절에서도 매우 괄목할 만한 사간으로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 그의 옆구리가 뚫렸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었다. 우리가 우리의 신실성을 입증하려 할 때, 우리 마음의 생각과 의도가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마음에 창(窓)이 있기를 바랄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옆구리에 열린 이 창문을 통하여 우리는 그 마음을 들여다 보고 거기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타오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거기에 우리의 이름이 쓰여진 것을 보게 되리라. 어떤 이들은 이 일을 무죄한 아담의 옆구리가 열린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제2 아담이 신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깊은 잠(죽음)이 드셨을 때, 그의 옆구리가 관통당하였고 그 열린 틈에서 그의 교회가 유래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스스로 교회와 혼인 관계를 맺으셨다. 에베소서 5장 30, 32절을 참조하라. 신앙이 깊었던 시인 죠지 하버트(Mr. George Herbert)씨는 "가방"(The Bag)이라는 그의 시에서 우리 구세주가 옆구리를 찔리셨을 때 그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감명 깊게 서술한다.
"너희가 나의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있는가?
또는 그에게 아뢸 사연이라도 있는가?
(나는 전할 우편 가방은 없노라. 그러나 여기 그것을 수용할 구멍이 열려 있으니)
(나를 믿고 거기 넣으라)
그러면 하나님께 도착되리라.
나는 너희의 전언을 기억해 두겠고
나의 심장 한편에 간직하리라.
또한 앞으로 나의 친구될 모든 이들이여
나를 이러한 일을 위한 문으로 사용하리라.
그 문은 언젠가 열릴 것이다.
또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을
너희에게 전달하리라.
아니 그 이상 넘치게 주리라.
하나님 영광을 가리움없이
너희의 모든 탄식들을 그에게 전하리니
무엇이든 고하라.
그리고 절망일랑 멀리 가 버리거라."
둘째, 그곳에서 "피와 물"이 흘렀다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었다.
a. "피와 물"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얻게 될 두 가지 아름다운 이익을 의미한다. 즉 우리에게 의인과 성화가 주어짐을 뜻하는 것이다. 피가 사면을 뜻한다면 물은 중생을 의미하며 또 전자가 구속을 뜻한다면 후자는 순결을 뜻하였다. "피와 물"은 율법 아래서도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범죄는 피에 의해서만 사해질 수 있었다. 또한 더러운 것은 "순결의 물"에 의해서만이 씻겨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항상 병존해야만 했다. 그래서 바울도 "너희가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이 두 가지를 함께 연합하셨다. 고로 우리도 이 두 가지를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안 된다. 이 두 가지는 우리 구세주의 관통된 옆구리에서 흘러 나왔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우리가 의롭게 되는 특권을 받았으며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성령과 은혜를 받았다. 우리에게 전자(의롭게 됨)가 필요한 것처럼 후자도(거룩하게 됨)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다(고전 1:30).
b. "피와 물"은 세례와 주의 만찬 이 두 가지 아름다운 규례의 전조가 되었다. 이 두 규례에 의하여 믿는 자들에게 여러 가지 유익함이 주어지고 보장되고 믿는 자들로 유익함을 얻기에 적합하게 해 준다. 그런데 이 규례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것이요, 그를 통해서만이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를 "씻어서 다시 나게 해 주는" 물은 그리스도의 정면이 아닌 측면에서 흘러 나왔다. 또한 양심을 회복시키고 영혼을 새롭게 하는 것은 포도즙으로 상징되는 피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인 것이다. 이제 반석이 갈라졌고(고전 10:4) 샘물이 터졌다(슥 13:1). 이제 구원의 우물이 파진 것이다(사 12:3). 그리고 여기 "우리 하나님의 성을 기쁨으로 채울 시내"와 강이 있는 것이다.
Ⅳ. 이 사실이 참됨은 목격자(3절), 곧 본 복음서 기자 자신에 의해 입증되었다.
1. 그가 이 사실에 대하여 증거한 증거는 충분한 것이었다.
(1) 그가 기록하여 전한 내용은 직접 그가 본 것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풍문을 통하여 들어서 또는 자신의 추측에 의하여 기록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이 일의 목격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한 것이라"(요일 1:1; 벧후 1:16)하였고 누가는 "그 모든 일을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눅 1:3)고 하였다.
(2) 그는 본 것을 신실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신실난 증인으로서 그는 진실을 말하되, 진리 전체를 말해 주었다. 그는 입의 말로써 이 사실을 증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in perpetuam relmemoriam - 즉 영원한 기념이 되기 위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3) "그의 기록"은 틀림 없는 "진실"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사실을 자신의 개인적 지식과 관찰을 통하여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는 진리의 성령의 지시에 의해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4) 그는 자기가 기록한 것의 진실성에 대하여 스스로 확신을 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는 믿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믿도록 설득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자신이 진실을 말하였음을 확신하였다."
(5) 그는 이 사실들을 "우리를 믿게 하기 위하여" 증거하셨다. 그는 자신의 만족이나 그의 친구들의 사적용도만을 위해 단순히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아니하였고 세계에 전파하려고 기록하였다. 또한 그는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거나 자신의 지혜를 스스로 즐기려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로 자신들의 영원한 번영을 위하여 복음을 믿게 하려고 기록하였다.
2. 이 특별한 내용을 기록하는 일에 본 복음서 기자가 보인 깊은 배려. 그는 우리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진실성을 확신케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심장의 피 곧 그의 생명의 피가 흘러 나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 사실을 증거하여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두려움을 몰아내자. 그리고 "그들이 불의할지라도 멸절당하지 아니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소망을 고무해 주자. 우리가 멸절되지 아니할 것은 그리스도의 관통된 옆구리에서 흘러 나온 물과 피가 우리를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누가 "이 사실을 어떻게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을 본 자가 기록하여 전해 주었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Ⅴ. 이 모든 사실 속에 이루어진 성서의 성취(36절). 그러므로 본문에 "이 일이 이룬 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다. 이로써 구약의 영예가 보존되고 신약의 진실됨이 확고해지게 된다. 본문에 성서가 성취된 두 가지 사실이 기록되고 있다.
1. 그의 다리가 꺾이지 않고 보존됨으로 성서의 약속이 성취되었다. 즉 "그의 뼈가 상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1) 이 약속이 모든 의인들에게 주어진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의인(義人)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라고 말씀된 것이다(시 34:20). 다윗도 성령으로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라고 말한다(시 35:10).
(2) 유월절 어린 양에서 본문의 유형이 나타나고 있다. 본문에서는 특별히 이 어린 양을 말하려고 한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 인용된 말씀은 출애굽기 12장 46절로써 거기서 "뼈를 꺾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고 이 내용이 민수기에서 반복되어(민 9:12) "너희는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고 하였다. 이 율법을 만든 분의 의도는 율법 자체ㅏ 당신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이 유형은 한 원형을 지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고린도 전서 5장 7절에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으니라" 하였고 그는 곧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1:29)고도 하였다. 그는 참된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그의 뼈는 꺾이지 않고 보존된 것이다. 고로 이 계명은 요셉이 자기 뼈에 대하여 미리 말한 것처럼(히 11:22)예수의 죽으실 때 그의 뼈에 관하여 주어진 말씀인 것이다.
(3) 이 사건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몸의 힘은 뼈에 있다. 히브리어로 뼈는 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뼈가 하나도 꺾임을 당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그가 연약함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셨지만" 구원하는 그의 힘은 손상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죄는 그것이 다윗의 뼈를 상하게 하였듯이(시 51:8) 우리의 뼈를 상하게 한다. 그러나 죄가 그리스도의 뼈를 상하게 하는 못하였다. 그는 무거운 멍에를 메고도 확고히 서실 수 있었으며 구원하는 능력을 이루시었다.
2. "그의 옆구리를 찌름으로 성경이 응하였다"(37절). 고로 본문에 "저희가 그 찔리운 자를 보리라" 하였다. 스가랴 12장 10절에도 같은 말씀이 쓰여지고 있다. 거기 보면 은혜의 성령을 부어 주시고 또한 바로 거룩한 예언자들의 하나님이 "그들이 나를 바라 보리라"고 하셨는데(한글 개역에는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로 되어 있다) 이것이 본문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이 되어 "저희가 그를 바라 보리라"고 하였다.
(1) 스가랴의 말씀은 본문에서는 메시야가 찔림을 당할 것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말씀은 여기서 "그의 손과 발이 찔린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이상으로 성취되고 있다. 그는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거민들에 의하여" 찔림을 당하셨고 스가랴 13장 6절의 말씀처럼 "그의 친구들의 집에서 상처를 받으셨다."
(2) 스가랴 서에 "성령이 그들에게 부어지면 그들이 그를 바라보고 애통할 것"이 약속되고 있다. 이 말씀은 그를 배반한 자들과 죽은 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그를 믿게 됨으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또한 이 말씀은 자비 속에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받게 될 때" 더욱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또한 불신앙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진노 가운데 "그들이 찌를 그를 볼 것이요, 또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라"(계 1:7)과 하였다. 이 경우는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이같이 우리 모두가 주 예수를 찌른 죄를 지었으므로 애정을 가지고 그를 바라보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꺄악~너무긴가..
2003.01.28 23:16:14 (*.146.107.210)
카나에
아.. 롱기누스의 창도 있네요. 요기에 적혀 있는 내용은 아더 왕 전설(켈트신화)의 갤러해드경의 성배탐색과 관련되며 기독교와도 관련되네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때 창으로 배를 찌르는데 그 때 찌른 병사이름이 룽기루스(이름이 제대로 된건지 모르겠군요-_-;)라고 합니다.
음.. 그런데 순전히 기억력만 의존한거라 가물 가물 합니다.-_-;
틀리면...........
석양을 향해 달려갑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