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뭐 하는 사람인지도...왜 이런 쓰잘데 없는 글을 썼는냐고 묻지 말라...

그냥 그냥 게임과 예술의 경계에서 헤매는 사람의 주절거림이라고.......

멀티미디어 시대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창조"는 예술가의 '천재성'에서 나오는 것인가?
예술가의 환경-매체-기술적 노력의 결과인가?

필자는 위의 질문에 이렇게 생각한다. 아티산과 아티스트의 차이라고....
즉 전자는 기술이 예술적 능력보다 뛰어난 장인이고 후자는 기술력보다는 예술적 천재성이 뛰어난 예술가인것이다.
이말은 무엇인고 예술을 함에 있어 천재성과 그주위를 둘러싼 환경매체 기술력등등 이모든것이 톱니바퀴 굴러가듯이 조화를 이루어야만이 된다는 것이다.
생각속에 아무리 천재적이며 예술적 상상력이 들어 있다해도 그것을 밖으로 표출해낼 기술력이 없다면 그것은 공상인것이다.
가령 화가가 머리속에 아무리 예술적인 그림을 구상한다 해도 캠퍼스에 그것이 옮겨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술로 존재자체를 할수없는것이다.
또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 표현양식이 주위 환경과 기술력에 의해 변하게 된다.
또한 뛰어난 기술가의 창조된 부산물을 예술이라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엔지니어의 부산물이 뿐이다.
바로 예술가의 주관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새로운 기술과 시대의 변화로 인해 인터렉티브 아트란 말을 심심치 않게 들었을것이다.
이런 형식의 예술은 기술력이 예술을 표현하는 데 있어 굉장히 중요한 역활을 한다.
이 문제는 어쩌면 뒤샹이 오브제를 차용한 그 시점 부터 발생했다고 말할수 있다.
우리는 예술가이다. 자 어느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적 영감을 밖으로 나타낼때 보다 효과적인 도구를 마다하겠는가?
그런 관점에서 인터렉티브 아티스트들은 발전된 기술문명을 자신의 도구로 삼은것이다.
화가가 붓과 캠퍼스를 도구로 사용하는것처럼...(예술작품의 표현도구인 붓과 캠퍼스도 기술의 부산물이다. 서양화전공들 반성해라. 캠퍼스 하나만 해도 시대별로 얼마나 많은 기술력이 응집되었는지 아는가? 그대들이 사용하는 유화물감이 그당시는 첨단 기술력의 상징인것을 아는가?)
꼭 서양화가는 붓으로 조각하는 사람은 나무난 돌을 깍아야 예술가라는 관념은 이제 그만 버려라.
그런 생각을 한다면 당신은 구시대의 산물이다.
그당시는 기술의 발전이 지금과는 상대적으로 느렸기 때문에 지금 시점에선 별것 아닌것처럼 보이지만 그당시 뛰어난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예술 작품에 그당시 최고의 기술력을 집어넣었다.
테크놀러지적인 기술력을 이용해 자신의 주관을 밝힐수 있는 사람은 정말 노력하는 예술가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기술을 자신의 작업에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 기술에 대해 기술자 수준만큼 알아야 한다.
알아야 면장질이라도 하는것처럼......
이처럼 어느 한 가지만 취해서는 예술창조라는 것 자체가 성립될수 없는것이다.
필자와 같은 인터렉티브 아트를 하는 사람은 (저번에 필자의 작품이 관람객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멀티미디어적 인터렉티브 아트이다. 근데 전부 이해를 못하더군....흑흑흑) 멀티미디어 시대에 있어 위의 질문에 끝없이 대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래는 필자가 작업을 하면서 누군가 "이봐 네가 하는 작업이 예술이라고 주장할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냐?"라고 물어오면 그것에 대해 대답할려고 준비했던 논문(?)인데 아무도 안물어봐 보여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번 기회에 공개한다.....필독해라......(원령공주의 예를 들지 않아 미안치만 미야자키 역시 나와 같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선 인터넷이란 공간을 이용한 공모전이나, 디지털 매체를 활용한 미술흐름이 미술계에 등장하고 있다.
발전하는 디지털 문명을 예술세계에 접합시킨다는 것은 항상 새로운 시도를 찾는 미술가들에게 좋은 소재를 제공해 주고 있으면 어찌보면 뒤상의 오브제 발견이후 정말 미술사에 획을 긋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글을 쓰는 본인 역시 일찍이 디지털 기기와 미술의 연결성과 효과적인 작품제작에 관심이 있었고 요새 대두되기 시작하는 인터랙티브 아트를 이용한 작품을 많이 제작해가고 있다. 이제 고전적인 미술의 흐름은 깨져가고 있다.

예술가의 메시지는 어느 정도 표현의 도구의 선택에 제약받으며, 그 도구는 항상 시대의 커뮤니케이션 상황과 함께 선택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표현의 도구는 그 예술가의 예술적 혼을 대행하는 정신적 기표이며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제 21세기이다. 우리 주변의 테크놀러지 지형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예술적 형식과 내용도 이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는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실시간으로 감지하여 작품에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해서 예술가는 디지털이라는 외투를 입고 등장하고 있는 정보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러지의 특징들을 새롭게 이해해야 함은 물론, 그이해를 바탕으로 뉴미디어의 예술적 공통점을 추출하여 작품에 투영하는 일련의 새로운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따라서 요즘 논의되고 있는 ‘인터렉티브 아트’란 개념은 상당한 수준에 오른 현 시대의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러지의 영향권에서 바라볼때만이 그 실루엣이나마 어느 정도 파악할수 잇을것이다. 인터렉티브 아트는 시대적 요구이며 21세기 예술의 키워드 이다. 그것은 뉴 미디어의 출현과 그 사회상을 실시간으로 반영하는 것으로 어쩌면 미술에 내재돼 있던 원초적 면모일지 모른다. 이 새로운 예술형식은 작가가 현 시대의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러지를 개념적으로 인식하고, 감상자의 감각을 예술적 인터페이스로 포장한 것이라 볼수있다.

쌍빙향 인식의 네트워크
마르셀 뒤샹에서 시작된 개념예술의 관점은 인터렉티브 아트가 작가와 관객 그리고 작품이 합일되는 지점에서 합동적이고 상호 대화를 실시간으로 원하는 요구의 응결물이라는 점에서 이론적 모색으로유용하다. 전통예술의 고리타분함을 과감히 무너뜨리고 관객을 예술적 의미를 인식하는 주체로 승격시킨 개념예술의 정신은 인터렉티브 아트의 본질적인 지향점일것이다. 그러므로 최근 대두되고 있는 인터렉티브 아트는 테크놀러지를 기반으로 감상자의 의지에 실시간으로 반응하게 함으로써 작품의 유기체적 감정을 감각적으로 보여주고, 관객을 작품이 가지는 의미의 주체이자 작품제작의 주체로 대접한다는 점에서 개념예술의 맥락에 닻을 내리고 있다.
따라서 크게 보면 많은 현대 미술 작품들중 인터렉티브한 결과를 의도한 작품은 모두 인터렉티브 아트의 범주로 포함시킬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인터렉티브 아트의 핵심은 감상자가 처한 감상공간에서 의도된 작가의 메시지를 어떻게 실시간으로 구현해 내느냐에 있다. 그러므로 작가들이 가진 인터렉티브한 의지들은 사실 기존의 미술적 표현도구로서의 한계성을 드러내므로, 진정한 의미의 인터렉티브 아트의 구현은 기술적 형식미를 갖출 때 가능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제 컴퓨터와 통신기술의 눈부신 발달은 통신예술과 뉴미디어와 컴퓨터 기술의 접목인 가상현실의 인터렉티브특성을 중심으로 접목예술의 형태를 취하도록 자극하고 있다.
그러므로 통신예수은 전화, 컴퓨터, 팩스, 이메일, 텔레비전,스캔과 같이 쌍방향 교률르 가능케 하는 기계들을 기반으로 구현된다. 그리고 ISDN회선에 의한 원거리간의 작업역시 인터렉티브 예술작품의 범주로 볼수 있다.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기존 예술콘테츠를 디지털로 변화시켜 제시한 웹 아트나 사이버 아트는 아직 인테렉티브적인 형식미를 완전히 갖추지는 못하고 있지만, 새로운 유형의 인터렉티브 아트롤 발전될 잠재력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
인터넷 망을 통한 예술적 형식들은 예술작품으로 접근이 용이하지 못한 관객의 동선을 갤러리로 유도할뿐 아니라 컴퓨터의 멀티미디어 기술을 기반으로 작가의 메시지 그리고 작품의 의미를 보다 실감있게 제시할수 있다. 또한 감상자에 으한 변용의 영역을 기술적으로 제시할수 있는 표현기반을 가진다.
그리고 쌍방향 네트워크기술을 이용하여 영화 제작자와 관객의 거리감을 좁혀가는 인터렉티브 영화와 같은 방식은 인터렉티브 아크의 개념을 정립하는데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잠시 텔레커뮤티케이션 아트의 예를 살펴보자. 매년 미국에서 열리는 <사이그랩>에선 많은 전자아트를 선보이는데 특히 92년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의 ECI는 이벤트 형식의 ISDN네트워크회선으로 독일 카셀의 <도큐멘타 9>와 프랑스의전시장을 시카고의 사이그랩92전시장과 연결, 시각언어를 주고 받기도 했다.
그들은 독일에서 행해졌던 퍼포먼스를 비디오로 담아 압축된 디지털데이터로 다른곳으로 전송하였고 각 지역의 화가들끼리 네트워크 환겨의 모니터를 통해 합동으로 이미지를 오나성해갔다. 이러한 합동페인팅작업은 불가리아를 포함한 동서유럽의 전지역과 일본도 추가로 연결되었던 작업이었다. 또한 인터넷을 이용한 이메일이나 세계 각지역의 예술가들의 이미지를 전송받은 이미지 파일들을 전시장내에서 한데 묶어 고해상도 디스플레이 화상으로 프린팅, 관람객에 의해 벽면에 디스플레이 되는 네트워크 작품도 있다. 이는 감상자의 기호도에 의해 시각적 정보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고 각 나라의 지역적 문화의 특징도 엿 볼수 잇는 이미지 온라인식의 인터렉티브한 표현양식인것이다. 위사례에서 보듯이 작가는 새로운 정보기술의 잠재된 욕구를 잘 파악하여 뉴미디어와 올드 미디어의 속성들중 무엇을 바꿔어야 하며 , 무엇을 고수해야 하는지를 일반인에게 새로운 형식으로 제시해야 할 혁신적인 역량이 필요하다. 어떤 방법으로 이미지를 전달할것이며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가 예술가들도 혁신적인 기계문명 사회의 대중예술을 이끌어가는 과학자, 기술자, 철학자, 관찰자로서 기질을 가져야 할것이다.

가상현실에서의 인터렉티브 아트
1948년 위너가 내놓은 <사이버네틱스>라는 저서는 20세기 후반의 소용돌이치는 미디어 혁명의 파동들을 한마디로 정리한 것이다. 정보, 메시지, 커뮤니케이션, 피드백등의 기본 명제가 이 이론에 의한것이며, 역사적으로 중대한 의의를 갖는 것은 근대문명의실체이며 동시에 상징인 ‘기계’의 이미지를 유기체와 동격으로 파악한데 있다. 생물학에서도 생명체는 정보의 개념에 의해 새롭게 각성되고 염색체를 유전자가 존재하는 세포내 구조라는 사실을 알게된 것은 20년대의 일이지만 유전자자의 2중 나선구조가 해명되고 생명현상을 정보의 프로세스로 보는 인식이 대두한 것은 “생명체가 유전자가 자신을 유지하고 증식하기 위한 매체에 불과하다”는 이론이 등장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물학과 기계공학 분양에 퍼지고 이제 새로운 예술에도 확산되고 있다.
생물들 삶의 속성들은 인터렉티브 향연 그 자체이다. 기계가 인터렉티브 된다는 것은 유기체화 된다는 것이고, 작품이 인터렉티브화 된다는 것은 바로 유기체적 생명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나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아바론>을 보면 유기체적인 생명성을 가진 인간의 존재,규정에 의문을 던진다. 이제 정보 미디어와 테크놀러지를 소외시키고서 현대예술을 논하는 것은 점점 어려운 시대적 상황이 된것이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첨단 영상장르는 가상현실 인터렉티브 커뮤니케이션의 장르이다. 인간과 기계의 상호관계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인간에게 가상의 리얼리티를 제공하는 공간, 혹은 그 장치를 우리는 ‘가상현실’또는 ‘인공현실감’이라고 부른다. 강상현실 테크놀러지는 극도의 복수매체로서 인간과 인간사이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에새로운 장을 열고 잇다. 또한 텔레버츄얼리티는 비디오 컨퍼런스의 확장된 개념으로 컴퓨터로 만들어진 스튜디오에서 서로 만나 대화를 나눌수있게 만든다.
신기술과 신예술은 서로 상호소통적관계로 묶어야 하며,정보소통기술이나 데스크탑,가상현실 영상시스템같은것들의 발달은 점차적으로 현실공간과 같은 리얼리티의 구현을 실제로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이런것들일 인터렉티브 아트의 나아갈길에 참고되어야 한다.
인간의 감각은 눈앞의 현상이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합리적일 때 그것이 리얼리티라고 착각을 한다. 이합성리얼리티는 의식속에서 가상적으로 재구성하는 뇌의 작용에 의한 현실감이다.
가상현실의 개념에 입각하는 멀티미디어 아트의 한 사례를 보자. 1996년 6월 14일부터 9월 15일까지 뉴욕의 구겐하임 소호분관에서 개최된전시 <MEDIA SCAPE>에서의 제프리쇼는 가상현실 프로젝트를 보여주었다. 쇼의 가상현실이미지는 자전거를 타고 맨하탄을 달린다. 그의 작품<THE LEGIBLE CITY>에서 자전거의 핸들과 페달은 실리콘 그랙픽사의 워크스테이션에 연결되어 그것이 가상의 도시안에서 관람자의 위치를 계산한다. 이는 관람자로 하여금 여행의 경로와 속도를 조절할수 있도록 요소를 가미시켜,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투영된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조율을 한다는것이다. 자전거 앞에 있는 소형모니터는 도시의 지도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 안의 커서는 관람자의 현재 위치를 나타낸다. 이처럼 비물질적인 경험을 통해 역사적 장소로 가는 체험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 가상현실의 현실감을 느끼게 해주는 전시회였다
이제 시뮤레이션의 공간 체험을 직접 자신의 체험으로 한 가상공간 구현 시스템은 관람자의 관람행위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연장시켜 몰입감을 제공한다. 이로써 자신의 실제 체험으로 인지되게 해 예술가가 상상하는 메시지의 주관성과 감상자의 주관성이 만나 객관화 된다는 점에서 인터렉티브 아트의 개념과 맥락을 같이 한다. 시간성과 인간성의 연계가 기계를 동원하여 과학의 장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예술의 또 다른 실험의 여행을 시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상현실미디어는 기계적이고 전잦거인 조합만을 의미하지 않고, 이모든것이 추구하는 목표가 바로 인간중심의 휴먼 인터페이스라는 점이다.

소통방식의 전환
우리말로 ‘상로교감’,혹은 ‘쌍방간의 교감’이라고 일컬어지는 인터렉티브는 기존의 전통적인 소통관계와 상반되는 개념이다. 기존의 소통방식이라면? 미술을 예로 들자면 작가가 그림을 그리고 완성된후에 전시장에 설치하면 관람객이 전시장을 찾아와 보고 돌아갔다.
방송의 경우에도 채널을 선택하는 권리는 시청자들에게 있지만 일방적으로 방영되는 프로그램을 시청할뿐이다. 그리고 문학에서도 독자들은 이미 결론까지 다 쓰여진 글을 읽을뿐이다. 이자연스러운 소통방식에 딴지를 건 것이 인터렉티브다. 같이 하자는 거다. 다 만들어놓고 바라보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윤곽은 작가가 잡더라도 관객이 작품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관객이 없으면 작품이 완결될수 없는 그런 소통을 하는것이다.
인터넷이 국적과 성별,나이등의 자격제한없이 누구나 참여할수 있는 새로운 세상인 것철머 , 아니 그보다 더 적극적으로 주체와 객체의 거리를 좁힌 것이 바로 인터렉티브아트이다.
인터렉티브라는 용어는 낯설지만 그것의 의미가 새롭게 만들어졌다고는 볼수는없다. 다만 , 이전에는 통신이나 접촉의 방법이 다양하지 않아 인터렉티브가 어려웠지만, 시대의 흐름도 그러하거니와 인터넷의 발달이 기존 소통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고, 더불어 첨단 과학의 발달도 쌍방간의 교감을 가능케 한것이다. 그런만큼 소통이 중요한 문화예술 부문에 인터렉티브의 개념이 적극 도입되어야 한다. 인터렉티브 아트는 미래사회가 지향하는 새로운 예술으리 방향이라고 예견된다. 앞으로 시공간을 초월한 소통이 더욱 가능하게 될것이고 사람들도 자신이 적극 개입되는 문화에 더욱 호감을 가질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인터렉티브 아트
‘인터’로 통하는 인터넷과 인터렉티브의 관계는 상당히 친밀하다. 현실보다 좀더 공상적일수도 있고 좀더 자유로운 발언도 가능하며 어디에든 머리를 디밀수 있는 인터넷 세상은 아마도 인터렉티브가 맘껏 뛰놀수 있는 최적의 장일것이다.
아직 미술에서 인터렉티브 아틑는 활성화가 안되있다. 물론 관람객이 작품에 개입되는 작품은 많다. 그러나 프로그램된 대로 맹목적으로 따라 움직이는 참여는 쌍방간의 교감이라고 볼수없기 때문에 인터렉티브 아트라 할 수는 없다.
1995년 비디오 미술가 슈레아 장은 인터렉티브 미술전 <BRANDON>을 열었는데, 인터넷상에서 이루어진 이 전시는 미술뿐만 아니라 인터렉티브 소설도 함께 이루어지고 잇다.
실존인물이었던 ‘브랜든’이라는 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사이버공간에서 새롭게 만들어 가는 이 사이트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없는 화면이 뜨고 그 위로 마우스를 움직이면 마우스가 가는 부분마다 작은 그림들이 떠오른다.25개의 작은 그림이 다뜨고 난후, 다시 그위로 마우스가 움직이면 그움직임을 따라 그림이 바뀐다. 그뿐만 아니라 정해진 사이즈와 이미지 형식으로 입력하면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삽입시킬수 있어 방문자와의 인터렉티브를 실현했다.
인터렉티브 아트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제프리 쇼를 들수 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함께 동굴 만들기>는 글자로 만들어진 터널 안에 인형이 서 잇고, 관객의 움직임을 따라 그 글자 터널속의 인형이 움직이는 작품이다.

디지털 시대의 미술
컴퓨터와 통신이 결합된 인터넷은 개인과 개인, 집단가 집단이 국경과 언어를 초월해 자유로이 자기공간을 만들어 가는 인류의 커뮤니케이션 매체, 정보화의 첨단기지이다.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자기번식을 하고 국가도 마음대로 통제할수 없는 무한의 창조공간인 인터넷은 정보공유정신을 바탕으로 작품의 생산과 소통의 경게를 허물어 작가와 관람자가 동시에 상호소통할수 있게 만든다.
디지털 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예술을 폭넓게 대중화시켰던 것 이상으로 예술을 대중화시킨다. 강상현실,로보틱스 아티스트들은 전통적인 미술은 이제 구태의연할뿐이며 대중매체 및 테크놀러지예술이 현대인의 사상과 철학을 가장 잘 표현할수 있는 예술이라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예술가들보다 더 강력하게 예술의 대중화를 실천하고 있다. 예컨대 컴퓨터로 만들어진 인터넷에 띄워진 시각 이미지들은 무한 복제의 속성르 발휘해 가장 대중적인 예술로 소통된다.이에 따라 생산자와 소비자간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 원거리에서 여러 사람이 합동제작하는 새로운 형태의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디지털이 보여주는 힘은 창작에서 소통에 이루는 미술과정 및 내용ㅇ르 정보화하는데 있다. 사이버 공간에 가득 채워진 미술관련정보들은 미술가뿐만 아니라 교육,산업,행정등의 종사자들에게 공개되어 문화의 질 향상을 돕게 된다. 미술가들은 디지털 정보 시스템을 통해 집이나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정보를 올리거나 자신이 창작에 필요한 정볼르 찾아 창작 활동 및 실생활에 활용할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과 평론을 홈페이지에 담아 네티즌들에게 홍보하고 의견교환 및 작품판맬르 할수 있다. 인터넷은 미술가들에게 매우 유익한 홍보 매체이자 비즈니스의 장인것이다.

디지털 매체 환경의 빛과 그늘
지금 시간에도 컴퓨터와 네트워크의 압도적 속도감과 실시간적동시성은 예측을 넘어 이간의 시지각적 수준을 끊임없이 확장시키고 있다.
디지털 매체의 도입과 활용은 예술의 형식과 개념을 어떤 방식으로 변환시키고 기존 예술 영역간의 관계를 급진적으로 재정의할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부인다. 이미 네트워크와 컴퓨터를 매개로 기존 장르간의 융합과 예술 영역사이의 결합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 등장한 ‘웹아트프로젝트’를 살펴보면 순수와 상업미술,고급과 하위문화,제도와 주변부 미술이 뒤섞여 있어 양식적 분류나 개념 저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
무엇보다 디지털 매체의 무제한적 확장성과 역동적 상호작용성은 시공간의 물리적 제약을 극복한 새로운 소통양식의 탄생을 예감하게 한다.전통 매체의 단방향성과 단선적 소통양식을 극적으로 넘어선다는 점에서 디지털 매체의 대안적 잠재력과 민주적 소통의 가능성은 고무적이다.
디지털 매체의 상호작용성은 문화 생산자와 숭요자의 전통적 관계를 역전시켜, 익명의 수용자에 의해 구성되고 끊임없이 진화하는 예술 형식을 이미 탄생시켰다.
그러나 대안적 가능성과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매첼르 이용한 미술 흐름의 미래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소통의 수평적 확대가 예술적 이해와 소통의 질을 개선해 줄 것이라는 믿음도 근거가 없는 환사에 불구하다.
우리가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은 매체에 대한 기술결정론적 시각과 매체 의존적인 접근방식이다. 소통의 양적인 확장을 겨냥하고 매체의 기술적 효과를 추수하게 되면 정작 매체가 위치하는 일상의 미세한 맥락을 포착하지 못할 위험을 지닌다.
매체 자체의 논리나 기술적 관성에 전적으로 의탁된 작품이 테크놀러지의 억센 그물망을 빠져 나온 일상의 섬세한 의미들을 어떻게 응결시킬수 있을까?
보다 중요한 것은 소통의 범위나 매체 자체의 효과가 아니라 정보와 네트워크에 둘러싸인 생활세계와 수용자의 일상적 의식과 무의식이 아닐까?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쉽게 범하게 되는 오류는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테크놀러지의 부정적 국면을 간과하거나 축소적 양상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매체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확산적 국면과 축소적 국면, 증폭적 양상과 차감적 양상이라는 이중적 속성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다. 인터넷만 하더라도 무제한의 확장성과 개방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안으로는 극도로 폐쇄된 소통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과거 전화가 등장함으로써 원거리 통신이 가능해졌지만 사람 사이에 얼굴을 마주하는 대면소통의 여지가 줄어든 것처럼 , 무한한 접속이 가능하면서도 은밀하게 폐쇄된 이 네트워크는 직접적인 미적 체험의 의 풍부함과 작품이 위치되는 일상적 맥락을 허상공간에서 점멸하는 신기루의 차원으로 휘발시켜 버릴수 도 있다.
더구나 첨단 매체에 대한 기능위주의 접근은 예술을 효과로 환원시키고 예술에 있어 ‘가치’의 문젤르 포기하는 결과로 이어질수도 잇다. 시스템의 ‘업그레이드’와 소프트웨어의’버전업’이 작품의 가치뿐만이 아니라 형식적 참신성마저 담보래주지 못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나 실제로 하이 테크놀러지를 이용하는 작가들은 첨단에 대한 유혹과 효과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인터렉티브 아트작가들이 무엇보다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매체의 개입이나 중계자체를 은폐시킬수록 수용자의 심리적 침투력이 극대화된다는 점이다. 영상매체의 정세도만을 거론하더라도 영상의 의 해상도가 낮을수록 관객의 정서적인 몰입이나 심맂거 참여도가 올라간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매체의 재현력은 표현 가능성과 무관하고 기술적 완벽함과 감각적 공감은 별개라는 사실이다.
이런 각도에서 인터렉티브 아트를 생각해보면 ‘아트’를 사이에 두고 작가와 관객 혹은 소비대중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 관계를 뜻할수 있다.
그렇다면 사실 전통적인 예술활동 역시 인터렉티브 아트가 아닌가 하고 묻을수 있다.

미술에서의 인터렉티브
인터렉티브 아트의 주체로서 작가가 객체로서의 관객 혹은 소비대중에게 접근하는 방식은 그 자체가 결코 상호교류적인 것은 아니었다. 우너천적으로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작가의 태도는 독선적일수밖에 없다. 동굴시대부터 화석처럼 단단하게 무장한 작가의 권위의식과 엘리트 의식은 굶어죽을망정 대중의 취향을 대행할수 없다는 서약서 비슷한것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대중에게 참여를 허용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권위와 카리스마를 건드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지극히 제한된 우연적, 우발적인 것에 국한되는 경향이었다.
그런가하면 관객의 참여를 전제로 형성되는 예술도 있다. 미니멀 아트는 인터렉티브 아트 개념의 원조라 할수 있다. 미니멀이란 관객이 참여함으로써 완성되는 분위기라는 기본개념에서 움직인다. 그러므로 미니멀의 주장대로라면 무한대에 가까운 작품의 양상이 가능하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러나 그렇던가? 미니멀 작품이 미술관에 소장되면 작품의 분위기로서의 관객은 양파껍질처럼 벗겨져 나가고 만다. 그렇게 몇번 벗겨내고나면 남는 것은 ‘발가벗은 임금님’같은 초라한 기본 도형뿐이지 않았던가.
소통이라는 의미에ㅓ 생각한다면 전송이나 우송의 수단이 인터렉티브가 아닌가 생각될수도 있을것이다. 1982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메일아트가 선보인바 있다.
이른바 소통의 예술이라 할수 있다. 31개국 180명의 작가가 메일의 형태로 작품을 보내와서 그것을 전시하는 형태이다. 상호교류와는 거리가 있다.
80년대에는 팩스 아트라는 것도 있었다. 작가는 전시장에 작품대신 팩스를 보낸다. 팩스는 실시간에 준하는 시간대에 작가의 아이디어와 그 흔적을 전시장에 전시할수 있었다. 물론 전시는 처음 확정된 개념에서 보여준다는 형태가 아니라 작가들이 중간중간 보내주는 메시지에 의해 갱신되는 과정이 포함되는 일종의 프로세스 아트의 형태였다.
그러나 팩스는 그 개발에서부터 사양에 이른 오늘에 흑백의 메시지 전달체일 따름이다. 결코 작품 자체일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팩스 아트 역시 팩스라는 매체를 이용한다는 매체지향성이 강조될 따름이지 상호교류적일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테크놀러지 아트는 어떤가? 그것은 비교적 관객의 참여가 자유롭게 허용되거나 참여를 전제로 제작 전시되는 경향이긴 하다. 그러나 고나객은 그 핵심기재나 프로그래밍에 참여할 수는 없는 소품이나 분위기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폐쇄회로 텔레비전에 비치는 사람과 같은 정도의 참여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멀티미디어와 네트워크 아트의 총체성
네트워크가 지닌 또 하나의 형식적 특성은 멀티미디어에서 잘 드러난다. 시청각 복합체를 멀티미디어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멀티미디어는 음성정보와 시각정보를 동시에 전달하는 미디어로 정의된다. 그러나 멀티미디어는 미디어의 복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디어이다. 여러가지 시청각 정보를 동시에 전달하는 것이라면 텔레비전이 가장 멀티미디어적인 매체로 꼽힐 것이다. 그러나 멀티미디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형식을 갖고 독특한 내용을 전달하는 온전하게 새로운 미디어이다.
멀티미디어느 종래의 미디어를 분야별로 결합한 절충형이나 복합형태가 아닌것이다
분리된 감각의 재통합, 혹은 통일감각의 회복이 멀티미디어가 제공하는 감각체험의 효과이다.
이러한 멀티미디어는 구어,문어 영상, 음성,등 각기 다른 미디어 형태를 동시에 사용하거나 조합을 바꾸면서 사용할수 있다.
또한 웹은 기존에 개별 미디어로서 각기 독립된 형태를 지니고 있었던 사진, 회화, 신문, 텔레비전, 라디오라는 여러 미디어를 모자이크식으로 짜 붙이거나 결합할수도 있다. 이는 곧 웹은 ‘미디어의 모자이크’, ‘결합된 미디어’의 역할을 감당한다.
지금은 여러가지 웹 브라우저가 사용되고 있지만 하이퍼텍스트의 브라우저의 원조는 mosaic였다. 모자이크는 하이퍼텍스트 시대의 자 맞추기 문화를 상징하는 은유이다. 중세 사원의 모자이크가 서로 다른 여러가지 색깔의 유리조각을 짜 맞추어 하나하나의 유리조각과는 별개의 성질을 갖는 독자적인 형상을 만들었듯이 현대판 모자이크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수많은 컴퓨터속의 자료와 정보를 끌어모아 자기만의 작품이나 데이터베이스를 마치 그림 족각 맞추기 하듯이 하나둘씩 만들어 나간다.
바로 이점이 현대판 모자이크가 중세의 조합적인 짜 맞추기문화와유사한 부분이다.
중세학자이자 기호학자인 이탈이아의 에코는 중세문화의 모자이크와 현대문화간의 유사성을 놓치지 않는다.
그는 현대 문명에서 되살아 나는 중세의 환상을 본다.
중세문명이 시각문명인 것처럼 네트워크 문화도 시각을 기축으로 이루어진다.
네트워크의 하이퍼텍스트는 체계적인 문화가 아닌 추가적으로 , 이리저리 꿰어맞추는 문화,를 조장한다
그런데 모자이크식 자 맞추기를 통한 새로운 현실의 구성과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파편적 분산적 정보의 모자이크식 총체성은 ‘디지털 복제’라는 메커니즘 때문에 가능하게 된것이다.
1930년대 벤야민은 당대의 특징을 ‘대량복제사회’로 지적한바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가 싹트기 시작하여 ‘아메리카적 생활양식’이 미국인의 생활을 주도하게 된 시점에서 벤야민은 ‘기계복제’라는 규정을 통하여 ‘대량생산-대량전달-대량소비’의 생산양식이 갖는 특징을 선견지명으로 간파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 예술의 미래는?
테크놀러지의 비가역적 전개 과정은 스스로의 통제로부도 벗어나 있어 그 마지막 국면을 아무도 모른다. 우리에게 남은 선택이란 어느 미디어-허무주의자의 고백처럼 시뮬레이션 기구를 ‘극단까지, 다시는 돌아올수 없는 지점까지’ 밀어 붙이는 수 밖에 엇는지도 모른다.
테크놀러지가 점점 상요자에게 밀착하여 비가시적으로 변하고 매체의 존재가 투명하게 사라지는 현상은 하이 테크놀러지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매체와 삶, 영상과 현실이 뒤섞이고 , 매체의 의인화와 매체에로의 심리적 동화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예술이 동시대의 조작적 환경에 대한 비판적 거리나 대안적 입지를 과연 얼마만큼 확보할수 있ㅇ르까? 아니라면, 먼장래에 에술작품은 소통의 확대라는 허울아래 테마파크의 한구석을 차지하거나 네트워크상에 유통되는 유희적 게임의 형태로 존재하게 될 것인가?
디지털 시대에 작가는 창조자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포기하고 모두 ‘미디어 복화술사’가 되고 말 것인가.
기술지배적 삶에 대한 심맂거 보상마저도 포기한 이러한 국면을 삶과 예술의 행복한 통합이라 부를것인가?
공학적 프로젝트의 부대행사나 대규모 자본에 밀착한 거대 이벤트를 예술과 과학의 이상적 재결합이라 말할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예술을 스스로의 진로 안팎에 대한 저항적 잠재력과 전복의 가능성을 어떤 방식으로 보존시킬수 있을까?
미디어의 최면적 유혹속에서도 미술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오래전부터 예비해오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