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바그다드, 바스라 함락 소식 땐 진짜 눈물 났었죠. 이라크라고 하면 중동에서는 "시인과 대추야자의 나라"라고 해서 가장 문화가 융성한 나라이고(과거형 아님), 중동 지역의 가장 많은 유물들이 남겨진 곳인데. 특히 바스라라고 하면 아랍 문학의 중추지이고, 중동의 가장 융성했던 시기인 압바스 왕조때의 중심지였지요(당시 수도는 바그다드였습니다만 학문의 중심은 바스라였습니다). 유럽의 중세가 암흑이라면 아랍의 중세는 빛과 부유가 넘치는 따뜻하고 융성한 시기였고, 그 중심이었던 이라크는 지금도 전체적으로 느긋하고 온유한 문화 아래서 살고 있습니다.

이라크가 전쟁을 두번 겪는 동안 무척 호전적으로 비친 것이 사실이지만 이라크는 중동에서 가장 개방적인 문화를 지닌 국가이지요. 알-가잘리, 알 킨디, 이븐 시나, 알 팔라비, 이븐 칼둔을 거쳐 문화적 구심이 확고하고 알 가잘리의 전통을 이어받아 법해석(샤리아. 아랍국가에서는 이슬람법이 헌법을 앞서거나 헌법을 대신하고 있습니다)이 온유합니다. 이슬람을 지탱하는 세 가지 중 하나인 샤리아(다른 두가지는 코란, 쟈카트;기독교의 십일조와 비슷한 것)인데 샤리아는 여러 방향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 중 가장 위대한 법학자 중 한 명인 알 가잘리는 또한 가장 온유한 해석을 내렸는데 예를 들자면 예언자께서는 "술을 마시지 말라"고 말 했습니다(그래서 이집트에서도 술집에 내국인은 출입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술이라는 단어에 대한 다각적인 해석이 가해지는데 이라크에서는 포도주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후세인에 이르러 이 법해석이 조금 엄격해지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라크에서는 여전히 여성의 사회 진출이 다른 아랍 국가에 비해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세인 역시 잔악무도한 독재자로만 비치는 것 같지만 그 역시도 문학적 소양이 깊은 사람으로 그가 펴낸 두 권의 소설은 아랍 세계에서 높이 평가 받고 있습니다. 물론 '독재'한가지 만으로도 죄이지만 후세인이 나빴다고 해서 이라크 자체도 매도되는 것 같고, 이라크를 중동지역에서도 암흑의 나라로 보는 시각은 옳지 않은 셈이지요. 최근 이라크가 쇠락한 것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후세인 때문이겠지만 직접적으로는 미국의 무역봉쇄 때문이었습니다.

이 참에 시아파와 순니파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자면 이슬람의 종파는 크게 "칼리파"에 대한 해석에 따라 나눠집니다. 칼리파란 예언자(무함마드;마호멧은 틀린 표현) 사후 예언자의 뒤를 이은 종교적 지도자를 말하는데 칼리파는 예언자와 교우 관계였던 아부 바크르(동시에 장인이었음, 예언자가 가장 사랑한 부인인 아이샤의 아버지), 그 뒤를 이은 오마르, 우스만, 알리까지를 4대 정통 칼리파로 보고 이때를 이슬람 왕국의 모범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우스만이라는 칼리파에게서 문제가 있는데, 우스만의 치적에는 친척들을 끌어들였다는 오점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슬람 왕국이 분열, 멸망하는데, 우스만이 칼리파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바로 4대 칼리파이며 예언자의 조카였던 알리였습니다. 알리는 우스만을 칼리파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알리와 우스만은 우스만 치세부터 치열한 전쟁을 하였는데 더구나 예언자의 부인인 아이샤가 알리를 몹시 싫어하였으므로 이 전쟁은 더욱 극렬해지는 양상을 보였습니다(그 내용은 마치 스플래쉬 무비같음-_-). 알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바로 시아파입니다. 그 외의 파는 순니로 보면 되고 기타의 소수파 역시 칼리파에 대한 해석(예를 들어 칼리파의 자격이라든가, 어디까지를 정통 칼리파로 볼 것인가 등)에 따라 나뉩니다(기독교보다 종파가 심플하게 나눠짐. ~_~). 시아파라고 해서 더 과격한 것은 아니고 순니파라고 해서 더 온건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시아파라는 이름이 과격단체로 비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아마 현대의 시아파 교도들이 이라크와 이란에 집중되어 있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물론 시아파가 순니파에 비해 행동력이 있고, 과격한 것도 사실이긴합니다만).

뭐, 제가 알고 있는 건 이 정도입니다. 야매 아랍어과 학생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