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은 현실처럼(Payne's Maze)








  이틀째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곧 장마철이 접어들었음을 알리기라도 하는 신호일까? 비는 추적추적 떨어지며 나직한 시골길 자리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들꽃과 정성스레 가꾸어 놓은 화분의 난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에게 갖은 조소와 비웃음을 보내며 자만에 찬 채로 질척해진 대지의 품위로 장렬한 파장을 만들며 죽어갔다. 만약 그런 비가 '살아있음'이라면 다시 한번 움직여주길 바랬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모순이니라, 하늘을 거스를 순 없었다.
본디 비는 땅에 떨어지기 전 떨어질 그곳이 땅이 되는 물이 되든 한 송이 꽃망울 위가 되든 가리지 않는다. 아니 떨어질 곳을 알지 못함이라, 그곳을 알 수 없기에 떨어지는 빗줄기는 떨어질 때 망연한 허공에 자취를 남기려 애쓴다. 하지만 하늘엔 그 어떠한 빗줄기도 자취를 남길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렇게 부질없는 욕심을 부리던 한 방울의 빗줄기는 땅에 부딪히며 마치 생명인양 부렸던 시간들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스스로의 무지를 깨달은 양 절정의 종지부를 찍는 빗방울 소리와 함께 언제 그랬냐는 듯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비는 땅에 떨어지며 은은히 파문을 남긴다. 그 파문은 빗방울이 떨어진 시간만큼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며 허무하게 시들어져버리더니, 곧 사라져버린다. 그 탓일까, 빗방울은 더욱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싶어한다. 그래야 더 오래 남는 파문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런 시간마저 애써 빗줄기는 생각하려 한다. 하지만 그럴 시간은 없다. 빗줄기는 시간이 원망스러운 듯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며 일순간 죽었다가 다시 물로 돌아오고, 그 물은 다시 증발하여 구애받지 않는 구름이 되었다가 일순간 아늑하게 나뉘며 순리에 따라 또 다시 비가 되어 떨어지길 반복한다.
  사람 또한 이런 하찮은 빗방울과 다름이 무엇이랴? 떨어진 이상 설령 그것이 부질없는 길이 되든 명예로운 길이 되든 파멸을 향한 것임을 알면서도 죽음을 향한 순간까지 방황하며 홀로 나가야 하는 건, 어디로 떨어질지 스스로도 갈피를 못잡으면서 마치 같은 길 같은 순간을 가는 척 위선하는 동료들이 있는것도, 그리고 결국 저마다 다른 곳에 혼자 떨어져버리는 것도, 결국 사람이나 한낱 빗방울이나 한치라도 다름이 있는가? 이뿐만이 아니다. 비 또한, 아니 모든 존재들이 그렇지만 사람에게도 생성과 소멸이란 선택의 기회도 다름이 없어서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렇듯 무모한 삶, 아니, 삶과 죽음을 내던지는 무모한 무언가에 일체야말로 '도전'이니 '용기'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무모한 삶은 그 한치라도 용기가 될 수 없다. 무모한 줄 알면서 행해야 하는 모순에 진실을 알고 불가치한 자신의 덧없는 영혼을 새기며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한줄기 가련한 불꽃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무모하게 태어났지만 무모한만큼 소중한, 진실에 조금이나마 가까운 존재와 삶의 용기가 아닐까?
  이런 존재의 용기가 있는지 없는지, 이틀동안 내리는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탓일까. 빗방울은 유난히도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 작고 낡은 시골 가옥집의 슬레이트 지붕을 매섭게 때려댔다. 집이 허름한 탓이다. 방이라곤 사람하나 겨우 누울 정도의 좁은 방이 전부인 이 낡고 허름한 집은 이미 몇십년 전에 주인이 버리고 가기라도 한 폐가(弊家)마냥 날이 뜨면 흙으로 발라놓은 벽이 푸석푸석 떨어졌고 이렇듯 비만 오면 요란한 소리를 내질러댔다.
그러나 방안은 바깥에 비하자면 꽤나 정연하고 조용했다. 빗줄기에 제 살을 녹이는 흙벽의 희생 탓일까? 아니면 빗소리에 파묻혀 잠식되어 버리는 무언가의 낡은 침묵일까? 밖에서는 한낮 수면의 불청객밖에 되지 않던 빗소리도 흙벽과 돌담에 가로막혀 제 힘의 외침을 잃고선 그녀의 방안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작게 속삭이는 은은한 자장가가 되어 그녀에게 들려왔다.
  순간 그런 희생의 자장가 소리를 깨는 괴리적인 밝은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이내 어김없이 들려오는 천둥소리는 은은하게만 들려오던 그런 자장가를 한순간 이질스런 방해꾼으로 만들어놓았다.
  그 탓일까? 이륵고 시끄러운 천둥소리에 잠이 깬 듯 전등 불이 켜지며 어깨까지 짧게 내려오는 흙갈색 단발머리를 한, 나시차림에 반바지를 입은 그녀가 백열전구 빛 때문인지 눈을 잔뜩 찌푸리며 나타났다. 물론 그 좁디좁은 2평 남짓한 방도 불이 켜지자 쓰레기통 같은 난잡함을 드러냈다. 어질러지고 넘어지고 쏟아져 있는 잡동사니들 속에 있던 그녀는 악몽이라도 꾼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한쪽에 널려있는 원예잡지 따위를 발로 밀쳐내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날씨가 좋지 않아 내일 일이 걱정이 된 탓에 잠을 설친 것인지 그녀는 반쯤 일어나 내일 일에 대해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는 오늘밤쯤이면 비가 그칠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비가 계속 내리기 시작하며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때 그녀의 귀를 거슬리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덜컹덜컹덜컹…."

  문소리였다. 그놈의 싸구려 미닫이 똥문이 아까부터 귀신이라도 들린건지 문짝 채 바람에 흔들리며 달그락달그락 요란한 소리를 냈기 때문이었다. 시골 창호지문에 아래 칸유리가 두어 개 박혀있다는거 빼곤 다를 바 없는 이도저도 아닌 낡아빠진 '짝퉁' 문짝인데, 사실 몇일전으로 그녀가 수리를 해보겠다, 요놈의 문짝 쳐부서내치는 한이 있더라도 고쳐보갰다 하며 악을 쓰고 벼렀던 문짝이었다. 그녀는 비가 와서 장날을 갈지 못갈지 모르는 판에 문짝까지 말썽을 부리자 사시나무 떨 듯 떨어대는 미닫이문을 흘겨보다 못해 노려보았다.
  불 켜진 그녀의 방은 적어도 사람 사는 방 아니, 혼자 사는 여자의 방이라고 하기보단 그냥 쓰다버린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쳐박아둔 누군가의 창고에 어거지로 세들어 사는꼴마냥 보였다. 방은 몇 일째 닦지 않은 듯 빠진 머리카락하며 잔 먼지들 그리고 심지어 이곳저곳 떨어져 있는 손톱이며 발톱 깎아놓은 것들이 구석자리에 잔뜩 쳐박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가뜩이나 좁아터질 듯한 평수엔 아무렇게나 매무새없이 깔아놓은 이부자리 주위로 마치 철없는 애들이 흑마술이니 결계놀이니하는 꼬락서니 따라하듯 원예잡지들이 잔뜩 그녀 주위로 널부러져 있었다.
  바닥은 그러하고, 어질러진 방안에는 옷장대신 쓰고있는 철제 캐비닛이며, 이불장대신 구석에 척척 쌓아둔 이불들과 라면박스, 그리고 기타 등등의 물건들이 벽면 차곡차곡히 놓여져 있었다. 마치 전쟁중에 피난 나온 사람의 살림살이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물건들 와중에 벽 한켠에 서랍장과 같이 틀어박혀 있는 건 채널이 다이얼식이라 전파상에서 거저주고 끌고온 80년대 보급형 저가 컬러TV였다. 궁색한 시골구석이라 제대로 전파가 잡히지 않아 일정 시간대에 일정채널만 방송될 때가 다반사인데, 한마디로 나오는 날보다 안나오는 날이 더 많았다. 그래도 가끔 잘 나올때면 비닐하우스에서 죈종일 농약과 비료를 허리춤에 꿰차고 꽃 밑둥이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벌레도 잡고 약도 주거니 하던 그녀도 TV만 나올때면 한 걸음에 냅다 달려와 손이 많이가는 원예일도 내팽개치고 찰싹붙어 날 새는줄 모르고 TV만 보았다. 사실 수리를 안 해보려고 했던 것도 아니지만 읍내 밖 전파상까지 가는길에는 폭이 몇 십척이나 되는 큰 강이 있었기에 배를 타고 가지 않으면 여간해선 건널 수 없었다. 배가와야 건널 수 있었는데, 그도 그럴것이 작년 12월 이후로 연 5개월 째 통통배는커녕 배 주인 김씨도 보이지 않던 터였다.
  그녀는 아무래도 내일 비가 와서 일이라도 못 나갈 판이라면, TV는 꽤 무겁더라도 꼭 가지고 나가서 고쳐보리라 마음먹었다. 사실 날 잡힌 날에 꽃 팔러갈 일이 아니고서야 내외로 갈 엄두도 안내던 그녀인지라 전부터 언젠가 고친다 고친다 말만 하고서는 안 고쳐대기 일쑤였다. 그래서 누가 봐도 TV고치는걸 포기한것만 같았는데, 원래 그녀 맘에는 포기할 생각이란 애시당초 없었나보다. 하기야 얼마전에는 스스로 고쳐본다며 난리를 피우기도 했었으니 아주 없는건 아니라고 볼수 있겠다. 그렇다고 첩첩산중이 병풍처럼 둘러진 시골구석에서 TV를 고칠 마땅한 부품도, 공구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냥 공구대신에 '맨손공구'로 매일 안나올때마다 쳐대고선, 그녀 나름대로 '지금도 열심히 고치는 중'이라며 가끔씩 스스로 위안을 삼아대던 터였다. 그러던 일이 있었기에 간만에 큰맘먹고 무겁더래도 고친다고 마음먹은날이 내일이었건만…. 그녀는 왠지 비까지 와서 대뜸 꽃파는 일도, TV 고치는 일도 망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방구석을 차지하는 TV위엔 "유통기한"이 지나 골을대로 골아버려 색이 누렇게 뜬 1991년 켈린더가 서 있었다. 이미 같다 버리고도 남아 지금쯤 썩고 있어야 할 켈린더에 그녀는 일일이 몇일씩 날짜를 땡겨서 계산하며 쓰고 있었다. 자주 까먹어 탈이긴 하지만 그녀는 머리 굴일 일이 없는 시골에선 이런거라도 머리를 굴려야 녹슬지 않는다며 머릿속에 달력을 계산하며 내후년것까지 외워대고 있었다.
  그런 켈린더와 TV를 받치고 있는건 다름아닌 십장생이 새겨져 있는, 즉 명색뿐인 '십장생표' 서랍이었다. 쓸만한 서랍장을 누가 길에 버렸다며 그나마 내돈 안주고 좋은 물건 얻었다고 말하더니 낑낑대며 갖고 오고서도 몇일동안 내내 싱글벙글 좋아하던 그 때는 어디갔고, 지금은 짝문이 박살나서 볼품없다, 누가 옻칠대신 똥칠을 한거 같다, 자라새끼코가 꼭 되지새끼코 같다며 꼴아보지 말라면서 자라눈에 삿대질에 발길질까지 해대질 않나, 횡재했다며 주워올 땐 언제고 지금은 괜한 핑계에 트집까지 잡아대며 퇴물취급을 하고있었다. 그래도 버린다 버린다하는 그녀지만서도, 곧잘 서랍장에 또래에 비하자면 철은 조금 지났지만 메니큐어나 립스틱등등의 자잘한 화장품들, 그리고 뚜껑이 없어 굴러다니는 볼펜등을 헌 종이에 꽁꽁 싸다가 어디다 마땅히 보관할 곳이 없을땐 이런 물건들 넣어놓기 썩 요긴하게 쓰이는 서랍장이라 아직은 그녀 마음에서 눈총 받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래도 남의 눈에는 여지없이 자질구레하게 보일 그런 서랍장임은 분명했다. 그런 서럽장 오른쪽 방구석에는 마치 조립못한 프라모델인듯 전선으로 된 부품들이 잔뜩 나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프라모델이 아닌, 딱 일주일전까지만 해도 나오지 않던 TV대신 그녀의 외부세상의 귀가 되어줬던 라디오였다.
  그녀도 막상 귀농했을때는 몰랐으나 지금은 어째 TV가 라디오만 못한 것 같다란 생각이 들때가 많았다. 그녀도 듣기전엔 '막상 누가 TV를 제끼고 라디오를 들을까?' 라고 생각할때가 많았는데 이제 지금은 없어서는 안 됄 귀중한 물건이 되어있었다. 아침때는 일기예보를 알려주는 고마운 도우미였고, 일할때는 얼핏 지루한 노동을 음악으로 달래주었으며, 잘때에는 이불속에 뉘여놓고 바짝 귀에대고 들으면 그 좋던 홈씨어터 사운드도 그만이더라, 차라리 귀창 파고 제대로 들으면 그것보다 나았다. 그리고 어찌나 재밌던지 재밌는 사연만 나왔다 하면 졸다가도 깜빡 깨어서는 더욱더 정신을 치켜새우며 듣곤 하였다.
  원래 그녀가 좋아하는 프로는 '이스영의 서부시대'와 '저닌권의 빠마나라네 락잔치' 그리고 '햏자들의 수햏시간' 3개 인데, 이스영은 그녀가 예전부터 좋아했던 가수였고 저닌권은 음악이 좋아서 자주 애청했었다. 그리고 '햏자들의 수햏시간'은 전국방방의 폐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상을 사연과 함께 담아 이야기하는 프로인데, 그녀도 마치 남 얘기같지가 않아서 꽤나 재밌게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 3개 외에 그새 입맛이 늘어 한 프로그램이라도 놓치면 그녀는 그 '십장생' 서랍장을 발로차며 난리를 쳐댔다.
  그러던 중 지난번 꽃이 핀 꽃들을 따가다 판다고 오래간만에 장에 나간적이 있었다. 정신없이 일하다보니 라디오에 신경을 못썼는데, 그녀는 그게 라디오의 마지막이자 이스영의 서부시대, 저닌권과 햏자들과도 안녕이 되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그녀는 오래간만에 나온지라 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때마침 5월 연중 행사 때문에 최고의 성수기인지라 이 조그만 시골통에도 마음에도 없는 은사 찾는다, 고생만 시키는 어머니 아버지 효자인척 불러본다, 제대로 챙겨주지도 않았으면서 밥만 먹이면서 키우는 애새끼들한테 사랑받는 부모되겠다 하는 이들로 간만에 제대로 몫 한번 챙기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시간가는줄 모르고 일하고 있자니 어느때인가부터 지껄이고 있어야 할 라디오가 지껄이질 않고 있길래 뒤를 돌아다 보니, 의자에 얌전히 앉아있어야 할 라디오가 보이지 않는게 아닌가? 그래서 한참을 찾아보니  물통안에서 부삽하고 같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녀가 꺼내보니 그 곱던 이스영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지직'대며 괴물마냥 꺼억꺼억 대고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바로 라디오를 꺼내들고 몇일 밤낮으로 시간만 되면 라디오만 주물럭 거리고 있다. 도시 같으면 그렇게 라디오에 집착하는 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겐 이 라디오가 외부와 연결되는 유일한 수단이자 궁색한 시골 안에서 웃을수 있는 친구였다.
  그녀는 아무래도 내일 꽃들하고 같이 장에 좀 나갈때는 무거워서 고생하더라도 TV와 라디오 둘중 아무거나 하나라도 고쳐놔야겠다고, 아니 그래야만 스스로 심성이 풀릴것만 같았다. 그런데 막상 비가 내린 산길에 무게나가는 TV를 들쳐메고 산을 넘을 일을 생각하니 그녀는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길 말고 다른길을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마땅한 길도 없었다. 사실 읍내에 있는 전파상까지 가는 길에는 전부다 고생길이 훤한 길이었다. 그녀는 일단 작년부터 강이 막혔으니 헤엄쳐 갈 셈이 아니라면 그 길은 일단 제쳐두기로 하였다. 그렇다면 강이 아닌 다른 길은 읍내까지 몇 십리 되는 산길이 하나 있고 또 다른 길 하나는 면을 지나쳐 가는 비포장된 도로 두 길이 있는건데, 막상 고생할 걸로 치자면 그 두 길은 서로 거기서 거기였다. 그녀는 둘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다. 도로를 고르자니 차선이라곤 없는 1차선 도로라 산등성이랑 거리는 같기로서니 드문드문 질주하는 차들만 갑작스레 나타나서 밤길에는 적잖이 위험하였다. 그래서 보통 평소같은 날의 그녀는 보통 읍 단위 이상되는 동네쯤 가려고 치면 산 아랫목부터 나 있는 산길을 따라 산을 넘어서 읍까지 가곤 했는데, 평소같은 날의 산이라면 그녀는 예전처럼 당연하게 그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일 넘을 산은 평소같은 산이 아니라 비가와서 잔뜩 미끄럽고 안개까진 낀 산 아닌가.
  그녀의 집 뒤 어귀로 난 길을 따라가면 점점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가면 갑자기 길이 희미하게 끊기는데, 그렇다고 그 산길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절벽이 나와 자칫 잘못하면 낭패를 보기 때문에 옆길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식의 길이 한두곳이 아니라는 점, 즉 적어도 수십개 이상의 이런 길들과 봉우리를 거쳐가야 된다는 얘기이다. 길이 이렇기 때문에 이 산의 산세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그 어떤 산보다도 산세가 험했고, 가끔 찾아오는 산좀 탄다는 심마니꾼이니 하는 사람들도 길을 잃고 해메거가, 가끔가다 죽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던 산이었다. 이 정도의 산이라 그녀조차도 예전에 훈련했던 어떤 지형보다 험해서 여간해선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도 왠만한 산이라면 껌한번 씹듯 가히 날아다녔으나, 이 동네 근처의 산은 여간 산세가 험한 산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가기 꺼려했다. 그래서 지구력 훈련만큼은 예전에 이미 끝냈다며 이골을 내던 그녀도 매 주말쯤 꽃을 팔러갈 때쯤이면 우스개 소리로 목숨을 내놓고 갔다와야 했다. 그런데 이렇듯 오늘같이 비를 엄청나게 퍼붓고 있으니 내일, 아니 새벽이 넘은 오늘 오전 7시에 넘을 산은 산이 아니라 절벽을 기어올라갈 듯 하니 그녀는 사뭇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내일 고칠 라디오와 TV를 포기하자니 그럴수도 없는 것이였기에 그녀는 한참을 고심한 끝에 결국, 산을 타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곤 내일 고쳐놓을 TV와 라디오를 한번 물그럼히 바라보았다. 그리고선 내일 고쳐놓은 TV와 라디오를 하루 죈종일 볼 생각을 하니 그녀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바보마냥.
  
  그녀가 살고 있는 근방에는 제대로 된 도로따윈 아무데도 없었다. 사실 이 동네에서 좋은 길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사치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길과 길이 아닌 곳이 구분이 안 가는 판에 간혹 서울에서 뻔듯하게 출세해서 차몰고 '저 개똥이 어른들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며 돌아오는 이들이나 외지에서 돌아오는 이들은 이 동네 마을길에만 들어설라치면 누구하나 어떤 차 가릴 거 없이 여지없이 펑크가 나고 말았다. 그만큼 이곳은 마치 일부러 그러기라도 한 듯 외부와 철저히 단절되어 있었다. 백날 잘 터지던 핸드폰도 마치 다른 세계와 같은 이 마을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외부인'의 전화기를 불통으로 만들었고, 컴퓨터는 기대하기도 힘들었으며 마을내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이많은 노인들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하필 이런 곳으로 들어온 것을 한편으론 후회라도 하는 듯, 그런데도 토양 좋은 곳에 와서 원예일을 시작해 기분이 좋은 듯 내색하나 하지 않았다. 고리고는 요 근래 비 포장된 길보다는 요 근래 체력이 많이 빠진것 같다며 체력을 키운답시고 곧장 '말도 안 되는' 산길을 따라 나섰다.

  그녀가 오늘 한 일은 이러했다. 덜 틔웠다가 몇일전쯤 피기 시작한 꽃들을 골랐고 일단 종류별로 잘 분류를 해놓았다. 그리곤 모종삽으로 뿌리가 다치지 않게 퍼내고선 고무화분에 옮겨 심었고 잘 정리를 해놓았다. 이젠 내일 꽃 팔러 나갈 장날에 읍내 시장 터 길목이나 후미진 자락을 늘상 아무렇게나 자리를 치고 꽃만 팔 일만 남았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녀는 계속 내리는 비엔 아랑곳하지 않고 빨지않아 그녀의 채취가 나는 양말을 꾸깃꾸깃 말았다. 그리고는 자꾸 흔들리는 미닫이문 아래 홈에 어거지로 쑤셔놓고는 대강 미닫이문 '수리'를 끝마치며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왜 일까? 그녀는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혹시라도 비닐하우스에 물이라도 들어차서 몽땅 홍수라도 난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라디오가 없는판에 일기예보가 무엇이랴, 아까 저녁 무렵 전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비닐하우스를 잘 점검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깨어보니 아까보다 꽤나 빗발이 거새진거 같았다. 그녀는 은근히 한번 다시 가볼까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미닫이문에 쳐박아놨던 양말을 걷어재끼고 문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봐야 함이 옳음이라. 문을 열자 따듯한 방안과는 다른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었다. 문을 여니 바람과 들이치는 빗물들이 그녀의 아리(我利)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직은 앳된 모습의 얼굴을 가볍게 때리며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시원하게 빗발이 무성히 떨어지는 소리가 거세게 들려왔다.

"쏴아아ㅡ"
  
  그녀는 낡은 우산을 챙기며 시멘트로 덕지덕지 미장한 디딤돌 위에 놓여있는 슬리퍼를 대충 신었다. 슬리퍼는 이미 튀는 빗물에 축축하게 젖어버린지 오래인 듯 상당히 차가웠다.

"비가 많이오네..."
  
  그녀는 들릴 듯 말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미닫이 문 옆에 걸려있는 낡은 우산을 폈다. 우산을 펴자 희미하게 녹슨 내 비슷한게 와 닿아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그녀는 지난번 빠진 우산 손잡이를  대신해 달아놓은 헝겊자락을 오른손으로 쥐고선 디딤돌 아래로 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문을 자물쇠로 잠그고는 손전등을 꺼내들고 마당을 나섰다. 마당은 어두컴컴하여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았다. 몇걸음정도 걸었을까? 그녀의 슬리퍼 신은 발은 몇번 걷지도 않자 금새 흙이 묻어 더러워졌다. 비가 많이 온 탓인지 마당위의 흙은 벌써 오래전에 진흙이 된 듯 하였다. 그녀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는 들고있던 손전등을 켜고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비는 끊임없이 내리며 빗소리외에 다른 소리를 철저히 탄압했다. 그리곤 곧 독재의 소요속에 몰아넣어버렸다. 마당밖으로 나서자 이내 그녀 앞에는 칠흙같은 어둠만이 짙게 깔려있었다.
  그녀는 손전등을 켰다. 그리고 계속 걸어나갔다. 빗줄기는 어둠에 묻혀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곳저곳에서 빗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녀는 손전등을 길가에 비추어 보였다. 그녀가 손전등을 비추자 보이지 않던 마당밖의 길이 훤히 보였다. 그리고 불빛속에서 춤 추듯 떨어지고 있는 희미한 빗줄기들도 마치 영사기가 보여주는 영화관의 스크린마냥 깜빡대며 보였다. 그녀는 왼손에는 손전등을, 오른손에는 우산을 들고 발걸음을 옮기며 마당을 지나 내리막길에 불빛을 비추고 걸어 내려갔다. 그녀가 걸어내려가는 동안, 사방은 온통 떨어지는 빗소리 외엔 정말 소스라치게 조용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조금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륵고 이 한적한 시골길의 정적은 침묵이란 독이 되어 그녀를 공포로 몰고갔다. 이 침울한 정적소리는, 불현듯 비참한 지난날을 조금씩 떠올리게 만들었다.  
  지난날의 기억들이 잠시나마 그녀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잊었다고 생각한 예전의 과거가 생각나기 시작하자 점점 두려워졌다. 그리고 아득한 저편에부터 되돌아오는 기억들을 뿌리치려는 듯, 애써 얼마전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흥얼흥얼 노래도 불러보며 지우려했다. 그러나 점점 그녀를 죄여오는 정적은, 그녀로 하여금 괴로운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점점 예전의 과거로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아픔이란 기억으로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부터 스치듯 들려오는 철 소리. 악몽에서 들리는 쇳소리. 그 쇳소리는 그녀의 기억 저편의 골짜기에서 희미하게 시작하여 절규와 함께 강렬한 파열음으로 그녀에게 들려왔다. 그 소리는 처량하게 쩔끄덕거리며 그녀의 머릿속에서 비통하게 울었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정적은 차마 감당하기 어려운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치닫았다.

'쩔끄덕쩔끄덕….'
'찰칵.'
'철커덕, 찰칵….'

그녀는 일련의 공허한 공포가 들고 정신이 희미해졌다. 그리고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쇳소리는 점점 커지면서 그녀의 정신을 파고들어가, 그녀의 과거를 일깨웠다.

"정신차려야 해, 나는..나는.. 그만뒀어..이젠 아니라고.."

그녀는 비가 떨어지는 바닥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넘어지며 우산을 떨어트렸다. 떨어진 우산은 활짝 펴진채로 이리저리 바람에 휩쓸려 굴러다녔다. 그녀는 괴로운 듯 두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러나 쇳소리는 한치도 사그러들지 않았다. 떨어지는 빗소리는 강렬한 파열음이 되어 그녀에게 들려왔다. 그리고 잊은줄만 알았던 그녀의 과거를 집요하게 일깨웠다. 그녀는 지금의 자신을 잃을듯한 자괴감이 들며 필사적으로 과거의 기억과 맞섰다. 그러나 자신이 잊었다고 생각한 6개월 전 마지막의 미스릴, 망각했던 자신 스스로에게 지금의 기억은 무참히 짓밟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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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스릴. 6개월, 아니 정확히 192일 전의 저 별칭은, 아주 어릴 때 불리웠던 소희연이란 아련한 이름대신 그녀의 일평생을 대신하여 불렸던, 그녀의 이름아닌 이름이었다. 이 '미스릴'이라고 불린 그녀의 이름에는 정보수집 비밀무장대(BPDS), 즉 '김치대대'의 2001년 16기 부소장이라는 거대한 타이틀이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본 이름을 내버려두고 불리는 그녀의 별칭도, 그런 BPDS가 본 비밀무장대란 이름을 버리고 별칭인 김치부대라 오랫동안 불린 이유도, 사실 공식적인 정부기관이 아닌 특수비밀기관의 특성상 공식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별칭으로 대신 불러야하는 기관의 특성탓이였다. 그러나 사실 김치부대의 상징적 의미는 '피범벅이 된 시체를 보고있자니 뇌가 튀어나오고 피가 튄 꼴이 꼭 소주한잔에 배추김치가 생각나더라'라는 끔찍하고 센스어린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이런 유치하다 싶을만큼 엽기적인 유래와 함께, 예전부터 BPDS는 이른바, 까치산부대(HID)의 독립적인 단체로서 박정희가 1979년 암살되기 이전인 지난 1977년 이후부터 설립되어 그녀가 떠나기 전까지도 한국에서 활동하는 모든 특수부대와 무장 비밀조직들에게 무수한 억측과 낭설이 난무하는 진원지로 불리고 있는 곳이었다.
  사실 이런 BPDS의 역사는 현 국가정보원은 물론 과거 중앙정보부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에서 BPDS를 아는 이는 행정부의 최고수장이 되는 최고의 통치권자, 즉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과 국무총리, 그리고 국방장관과 국방부 사령관들의 최종실권을 쥐고 있는이들만 내부 사정을 알고 있었을 뿐, 그들 아래의 산하 군/경의 이름난 조직들에게까지조차 이름만 오르내린 최고의 정부조직이자 당시 중앙정보부내의 핵심 기밀사항들중 하나였다. 이런 중앙정보부의 핵심기밀들은 즉 박정희와 직결되어있어서, 당시 실미도 사건 이후로 이른바 '4인방'이라 불리며 공화당을 좌지우지하던 김성곤, 길재호등의 인물들이 남산에서 개패듯이 정보부요원들에게 얻어맞은 이후로부터는 그 누구도 정보부의 기밀사항에 대해 추긍 혹은 대적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곧 박정희의 실권을 부정하는 의미였다. 아무튼, 71년 이후의 중앙정보부는 철의 폭력독재의 상징이 되며, 모든 그의'눈 밖에 벗어난 인물들'의 처리장이 되어왔다. 하지만, 중앙정보부의 본질적, 즉 핵심적 사안은 이런 정치깡패같은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핵심사안은 바로 지금 거론하고 있는 이 'BPDS'에 의해 처리되었다. 청와대경호원과 KIPE, 그리고 SKA를 제외한 HID의 최고의 요원들과 군/경 특수부대와 UDT내부의 최고의 특수부대원만을 차출하여 1급기밀로 분류된 대부분의 국가적 비밀임무를 거의 도맡아 처리하다시피 한 BPDS는, 70~80년대에는 주로 북한과 일본 또는 중국을 겨냥한 생화학물질 정보입수와 군 시설현장 촬영 및 파괴와 요인암살 임무 등등을 처리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충남 서산의 간첩선 침투사건과 평양 시가전 사건인데, 평양 시가전 사건은 사전 침투해 있던 SKA의 도움을 받아 HID와 BPDS의 최정예 특수부대원들이 김일성궁으로 진격하며 벌였던 시가전 사건이었다. 당시 시가전으로 인해 북한군 56명이 그 자리에서 사살, 21명은 부상을 당했으며, 35명의 HID대원들은 사살 혹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러나 일부 BPDS대원들은 2003년이 지난 아직도 생존하여 현재까지 SKA와 함께 30년이 넘도록 대북첩보작전을 지원하고 있다. 그후 BPDS는 '미얀마 아웅산 테러' 이후 강화된 조직력을 가지게 되어 90년대의 활동에선 핵심적 요인들을 제거함과 동시에 상대국가의 통신시설 해킹과 전산망 무력화 등등의 과거 종래의 실전적 작전이 주류를 이루었던 임무가 아닌, SKA와 함께 원거리 첩보전을 도맡아 처리하게 되는데, 물론 90년대에도 BPDS에게 후방침투나 요인암살같은 작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98년에 있었던 독도 내 해저 600m 지하에 상주해 있던 '군 해저과학 연구단지'를 목표로 하여, 43명의 북한군과 이틀간의 교전 끝에 결국 F16까지 동원하여 막을 내렸던 북한군의 일시적인 독도 무장점령 사건을 비롯한 일도, 당시 그녀가 포함된 BPDS의 ST팀에서 확인사살까지 하며 처리하였다. 그녀는 2001년 BPDS의 부소장으로 진급이전에 BPDS의 ST팀을 이끌며 일찍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97년부터 ST팀에 들어간 그녀는 다른 대원들과는 다른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성장해 나갔다. 상식에 맞지않는 공격루트를 새로 짜서 독단적으로 행동하는가 하면, 작전시 죽을때까지 구석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을때도 있었다. 그 덕분에 자주 그녀는 규율을 어긴죄로 위에서 떨어지는 징계를 먹어야 했고, 그 탓인지 그녀의 능력을 주시하는 윗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런 이유에선지 그녀는 그 이후로 급상승세를 타며 진급에 진급을 거듭하였다. 일부에서는 낙하산 인사다 무엇이다 하면서 그녀가 안보이는 자리라면 언제라도 깎아내리는 소리를 하곤 하였지만, 그러나 그녀는 그런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매일같이 계속되는 고된 훈련에도 찍소리 하지 않고 쉴틈없이 훈련하였다. 마치 정말 그것만 하기 위한 어떤 사람처럼…. 그렇게 남자들도 견디기 힘든 오전 오후 훈련을 억척스럽게 해내는 그녀를 보며,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보다는 그녀의 실력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오전내내 노가다를 뛰어 밤이되면 싫든좋든 자기 마련인 남들과는 달리, 그녀는 밤만 되면 틈틈이 배우는 전략학과 테러리즘의 이론적인 요점을 통해 임시적인 작전통계를 만들고 시간을 재기도 하며 테러진압에 대한 지식을 키워나갔다. 그녀가 그렇게 부지런히 뛰며 작전과 훈련, 그리고 공부를 시작한지 대략 3년이 넘어가자 이젠 그녀의 실력과 진급에 대해 일체의 의구심을 갖는 이들은 단 한명도 없게 되었다. 결국 2001년 봄 이른바, 안기부의 직계 BPDS 부소장 자격심사에서 그녀는 20명중 만장일치라는 유래없는 찬성표로 BPDS의 부소장이 되었다. 기실 그녀는 이런 결과는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예상치 못한 부장차출에 부장이 되고서도 더욱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반 테러리즘에 대한 상식과 실력이 늘어갔다. 그때부터 그녀는 국내에서 알아주는 권총 사격실력과 수많은 실전능력을 경험한, 즉 전문가라고 칭해지는 사람중 한명이 되어 있었으며, 일찍이 이쪽 업계에서 요구되어오던 자격지심 이하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경지에 수준에 까지 올라갔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평을 받기 즈음에 제출한 그녀의 2002년 결산보고서는 그 철두철미한 사전정보의 객관적인 사실성 여부와 그리고 불규칙적으로 언제든지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을 능동적으로 대처했던 그 통솔력에 대해, 테러리즘을 연구하는 경륜이 오래된 전문가들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런 그녀의 1997년 신입발령 이전에 대한 과거를 아는 이는 몇몇 특수 인사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사실 그녀의 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여렸다. 억지같은 그녀의 훈련이나 상식을 뒤엎는 행동들은, 사실 그녀의 모순같은 현실을 견디기 위한 그녀 스스로의 대항 아니 저항이였다.

본디 그녀는 태어날때부터 부모가 없었던 고아였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막연한 기억으로, 군사출신인 양아버지를 얻게된다. 그 후, 그녀는 정부로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이 격화되어, 한국대사관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아버지를 같이 따라가 이스라엘에서 자라게 된다. 그 무렵, 그녀는 어린 나이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끔찍한 사건을 겪게되는데, 자신이 다니던 초등학교에 팔레스타인 군인, 즉 하마스의 근본주의자들이 난입하여 교장과 학생, 그리고 선생들을 인질로 잡게 되는 일이 있었다. 당시 자와르 알-하드의 석방을 요구하던 그들은 시간이 지날때마다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선생과 어린아이 할 것 없이 전부 한 명씩 대검나이프로 목을 쳐내어 이스라엘군과 대치하던 복도 창문에 하나씩 걸어두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당시 그녀가 다니던 학교에는 대부분이 유태계 학생들이었고, 동양계였던 그녀는 운좋게도 마지막까지 살해되지 않고 살아남는다. 하지만 지금도 그녀에게 또렷이 남아있는 그 기억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친구들이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대검에 무참히 사지가 찢겨져 교탁과 책상과 창문위에 널부러져 있던 테러리즘의 만행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렇게 학생과 대부분의 교직원들이 학살당할 때 자와르 알-하드의 석방 소식이 그들에게 들렸고, 그들이 약속대로 철수하려는 도중 그것이 거짓정보임을 안 조직원 하나가 황급하게 뛰어와 철수하던 그들에게 그것이 거짓정보임을 알리려는 순간, 지축을 흔드는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이스라엘 특수부대원들이 구름떼같이 쳐몰려와 그들을 일순간에 시체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는 구석에 쳐박혀 그들이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지 똑똑히 새겨보았고, 그리고 마음 한편에 잠재되었던 복수라는 희열을 아련하게 느꼈다. 그 후 지금까지의 그녀는 틈만나면 이스라엘제 데져트이글을 꺼내어 그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며 다시는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살아왔다.
그러나 해가 거듭될수록 그녀의 머릿속은 외부의 기대와는 다르게 점점 쇠약해지고 있었다. 무수한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결국 우리나 그들이나 같다는 '동질적'인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면서랄까? 그리고 그녀는 점점 테러리즘에 맞닿게 되면서, 어느순간 살인을 즐기고 있었으며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판단 하나하나에 의해 걷잡을 수 없이 죽어간 수많은 전우들의 장례를 지내며 급속도로 정신이 쇠약해져 버렸다. 아마도 살인에 대한 죄악의 자책감이었으리라…. 그 입소당시의 씩씩하고 패기 넘쳐, 귀여워 보이던 그녀의 모습은 이제 온대간대 없어지고, BDPS의 부소장이 된 후 조직내에서 공공연히 장례사란 별명까지 나돌며 어떻게 더 사람을 잘 죽일지 살인연구만 하게 된 후로는 입출력만 하는 살인 기계인형이 되어버린 것을 그녀 스스로 자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갈등하고 회의하며 더욱더 그녀는 그녀 자신의 정신을 스스로 파괴하였다. 어느날 밤엔 갑자기 사무실에서 데져트 이글을 두 클립 이상 무차별 난사해댄 일도 있었으며(그 덕분에 벽 일부에 구멍이 생겨 새로 벽을 지어야 했다.), 전 동료한테 기대어 술로만 의지하는 날도 늘어만 갔다.
  예전 착실했던 그녀의 모습을 알았던 동료들은 지금에 그녀에 대해 안타까워 하면서 그녀를 잘 다독여 주기도 하였다. 어쩔때는 그녀에게 큰 소리로 나약해졌다며 꾸짖기도 하였으며, 어쩔때는 비굴하다시피만큼 사정할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그런 동료들의 노력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급기야 사표를 썼다. 그리고 안기부 부장실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안기부는 그녀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돌아온 회신에는 '과도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성 정신질환이니, 언제라도 휴식이 필요하면 요청하라'는 전갈뿐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그 전갈을 들고 무기고로 가더니 M4A1 견착대검을 뽑아놓고, 언제적인가 중세에 대한 고서적에서 보았던 잉크제조법대로 오베자나무 기름과 설탕으로 잉크를 만들었다. 그 다음 대검에 잉크를 발라 글을 쓰더니 안기부 부장실과 간부실에 다시 붙였다. 글은 너무나도 짧았다.

"0438에게 마음, 웃음, 일상 재필요."

  여기서 0438은 그녀의 BPDS군번이었다. 결국 그날밤 안기부로부터 답장이 없자 모든 것을 포기한 그녀는 그날밤, 막연히 동경해오던 평범한 삶을 찾아 이곳을 떠나버리리라 결심하게 되었다. 결국 그 결심이 서게 된 다음날, 그녀는 그녀를 믿고 따랐던 모든 BPDS대원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것이 6개월전 일이었다. 사실 안기부도 반신반의로 일시적인 휴가려니하고 그녀를 내버려뒀었다. 그러나 한달이 지나도록 그녀에게 그 어떠한 소식이 없자 안기부는 그녀를 내부 수배리스트 1순위에 올렸고, 그곳을 떠난 그녀는 안기부 요원들의 끈질긴 미행을 당해야만 했다. 사실 안기부가 내부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녀를 결코 놔주지 않으리란건, 그녀 스스로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한달이란 시간은 도망치기엔 충분한 시간이였다. 결국 그녀는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약 2개월동안은 거의 반 폐인인척 위장하며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증거를 뿌렸다. 그렇게 그녀는 그녀 스스로 과거의 행동들을 하나씩 지우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특권계층의 경호일을 도맡아 하며 벌여들였던 그 어마어마한 그녀의 개인자금은 그녀 스스로 전부다 강원도 근처의 카지노판에다 져꼴아박으며 안기부 에이젼트들에게 추적해야하는 이유를 의문케 만들었고, 이곳저곳 노숙자처럼 떠돌아다니며 폐인인척 위장하며 다녔을때는 에이젼트들은 전국의 노숙자들을 뒤지다가 혀를 끌끌차고 돌아가버렸다. 사실 에이젼트의 추격은 안기부 탈퇴의 통과 의례라고 볼 수 있었다. 그 이전에도 이런일은 파다했고, 비단 뛰어나든 안 뛰어나든 누구하나가 조직에서 탈퇴하면 그와 동시에 사정을 가리지 않고 추격하여 일거수 일투족이 보고되었다. 그렇기에 그녀만큼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이라면 이정도의 센스를 가지는것쯤은 기본중의 기본이었다.

그렇게 4개월간을 도망치던 그녀는 결국 알리바이를 비꼬아버리는데 성공하여 추격을 따돌렸고, 마침내 바라던 일상생활의 귀환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녀는 여태껏 추격을 따돌리느라 닮아서 해져버린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인 채로 한적한 시골길로 들어섰다. 강원도 카지노에서의 그 술에쩔은 노름쟁이 말대로 흔히들 인생의 패자들이 모인다고 하는 이 동네를 접어드는 이 길은 '실패자들의 길'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땅이 부드러웠다.

'맨발로 걷는 탓일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곤 피식 웃었다.
그리고 행복이 몸 속 가득 충만해짐을 느끼며 이제껏 저질렀던 수많은 죄악과 아픈 기억들이 눈물과 함께 떨어지며 동네 어귀로 접어드는 이 작고 부드러운 흙길을 적셨다.

이제 미스릴이란 이름은 떠나고, 소희연이란 이름으로 돌아온 자신은 너무나도 초라해보였다.
얼마쯤 걷자,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버드나무를 잎줄기를 스쳐 느껴지는 녹색 짙은 잎내음….

그녀는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위를 걷고 있었다. 그녀가 걷고있던 길은 버드나무가 수평선까지 심어져있어 너무나도 아름다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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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아련한 기억에서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우산은 저만치 멀리에서 거센 바람에 나뒹굴고 있었고,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그녀는 금새 비로 온몸이 흥건히 젖어있었다. 그 때문에 나시티와 츄리닝이 손전등에 하앟게 비쳐 그녀의 속옷을 남김없이 비추었다. 이 살얼음판 같은 행복이 얼마까지 가리란 생각이 불현듯 정적과 함께 찾아들면 이렇듯 아픈 기억이 떠올라, 이 많은 빗줄기처럼 그동안의 셀 수 없이 꼬여 그녀의 기억위로 떨어져 그동안 겪었던 과거의 분노와 고뇌와 희비와 안도를 안은 채 이렇듯 지나쳐버렸다.

'이젠 총을 쥐지 않아도 돼.'

처음 그녀가 이곳을 왔을 때 했던 말이 희미하게 떠오를 때 즈음, 그녀는 떨어지는 비에 젖은 머리를 비에젖어 축축한 주머니에 있던 고무밴드로 묶고선 한참 멀리에서 나뒹굴고 있는 우산을 향해 손전등을 들고 이 어두컴컴한 시골길을 재촉했다.






p.s 영웅문에서 단예가 가장 강하다에 올인(사실 그거야 두고봐야 아는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