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게임을 디자인(기획)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게임 디자인이란 "세상을 추상적인 구조로 구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임 디자인이 다른 매체와 비교해서 두드러지는 것이 "구조를 설계"한다는 것에 있다고 봅니다. 게임은 그것이 디지털이든 아니든 규칙 기반의 시스템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게임의 플레이어는 그 구조와 상호작용하며 어떤 감정(재미 등)을 느끼죠. 그렇다면 게임 디자이너인 우리는 그 '구조'와 '구조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가 게임을 통해 어떤 경험을 구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바둑과 "콜 오브 듀티"를 생각해 보죠. 바둑은 전쟁을 표현합니다. "콜 오브 듀티" 역시 전쟁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각각 비추고 있는 전쟁의 모습은 서로 다릅니다. 그 구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둑은 플레이어가 전략가가 되도록 하고, "콜 오브 듀티"는 플레이어가 전쟁영웅이 되도록 합니다. "콜 오브 듀티"에서 죽도록 아둥바둥 싸우는 병사들은, 바둑이 비추고 있는 전쟁에서는 단순한 바둑알로 추상화됩니다. 바둑알은 그 모양이 단순할 뿐 아니라, 그 기능도 단순합니다. 바둑이 구현하고자 하는 경험인 '지략 싸움'에 있어 병력이란 단순히 전략에 이용할 객체 이상일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 "콜 오브 듀티"는 병사 개인의 활약이라는 경험을 구현하려고 합니다. "콜 오브 듀티"의 병사는 바둑의 바둑알과는 달리 걷고, 앉고, 달리고, 갖가지 총을 쏠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만이 아니라 NPC 병사들도 그렇죠. NPC 병사들은 플레이어 주변에 있으면서 그 행동들로 게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바둑에서는 단순히 이용되는 객체로 표현되던 병사들이 더 능동적으로 게임의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주체적 요소가 된 겁니다. 그런데 NPC 병사들은 실제 전쟁에 비하면 여전히 수동적입니다. 플레이어가 게임을 진행하지 않으면 NPC 역시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진행하지 않습니다. 플레이어가 움직여야만 움직입니다. 플레이어가 영웅이 되는 것이 게임의 구조이기 때문에, 그들의 기능은 플레이어가 주도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NPC 병사들은 적당히 격렬하게 싸우고, 격렬하게 감정표현을 함으로써 혼란스러운 전장 한 복판에 서있는 플레이어의 영웅성을 드높여 줍니다. 찾아보면, 이 게임에는 NPC 외에도 플레이어를 영웅으로 만들어 주는 요소들은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총을 맞아도 구석에서 쉬면 회복되는 것 같은...). 게임의 구조가 구현하려는 경험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게임 디자인은 구조로 이해해야 하고, 구조로 디자인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게임을 디자인함으로써, 어떠한 경험을 구현하는 구조를 만드는 셈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경험의 게임을 만들 수 있습니다. 똑같은 게임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 같은 이유는, 똑같은 구조를 답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리부터 기본 뼈대를 다른 게임에서 가져온다면, 그로 인해 구현되는 경험도 기존의 것과 크게 다를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지망생들이 게시판에 쏟아내는 아이디어들은 이미 특정한 양식을 갖춘 토대(MMORPG, FPS) 위에 덧붙이는 것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독창적으로 보이려고 그 토대 위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 것을 덧붙여서(그러니까, 세력경쟁도 있고 유저 콘텐츠가 넘쳐나며 총격전이 슈퍼 초 리얼한 MMOFPS...같은) 도저히 불가능한 설계도를 그려내기도 합니다. 근본적으로 어떤 자기만의 경험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여 뼈대부터 새로 만드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진정 자기 생각을 하려고 하고, 독창적이라면, 자기 생각의 전제가 이미 흔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 뼈대부터 새롭게 만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간단한 게임부터 만들면 됩니다. 일단 3D로 움직이는 캐릭터가 나온다고 전제하지 않으면 됩니다. 친구들과 저녁 내기할 수 있는 간단한 게임부터 만들어 봅시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하얀 선을 밟지 않고 뛰어가는 게임을 만들어 봅시다. 사소한 일상을 게임으로 만들어 봅시다. 일상을 어떤 의도를 가진 규칙으로 구속해봅시다. 그러면 그 규칙의 의도에 맞는 경험이 구현될 겁니다(물론 그 구조가 잘 작동할 경우에).

  우리의 모든 일상은 규칙으로 구조화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인지되는 규칙도 있습니다. ‘법’말입니다. 국회의원이라는 디자이너가 만든 법은, 우리 국민이라는 플레이어가 이 국가와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경험을 창조합니다. 법이 다르면 그 나라의 국민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경험도 다를 겁니다. 미디어법을 비판하는 게임은 어떨까요? 미디어법이라는 규칙이 실제로 플레이어인 우리를 구속했을 때 어떤 경험을 창출하는지 알아보는 게임 말이에요. 아니면 방송국을 플레이어로 설정해서 방송국의 입장이 되는 게임을 만들어 볼 수도 있겠죠. 또 아니면, 정부의 입장에서 미디어법을 홍보하는 게임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요?

  예, 뭐, 굳이 사회적인 게임일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게임이란 건 액션, MMORPG, FPS, 전략 이런 기본틀 중에서 골라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뼈대부터 구조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창의성을 발휘해보자는 겁니다. 우리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구조의 게임을 만들 수 있습니다. 기존의 틀을 가져다가 좋은 시나리오나 그래픽, 영상을 벽지 바르듯이 바르지 말고요. 게임 디자이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근본부터, 아무 것도 없는 뼈대부터 만들기 시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