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물의가면] 시대의 정신적 기형, 지만원류를 진단한다

[데일리 서프라이즈 2005-03-09 12:29]    

얼마 전 일이다. 신촌 로터리에서 길을 건너기 위해, 행인들 속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한 중년 남자가 팔을 건드렸다.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치자 그 남자가 말했다. “예수 믿어 천당 가세요”. 그의 눈을 보니 이른 저녁 술 한 잔 걸친 듯도 싶고 아닌 듯도 했다.

처음 겪는 일이라 순간 약간 당혹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의 눈을 바라보며 가볍게 그러나 공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고맙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반복했고, 신호가 바뀌자 그와 나는 제 갈 길을 걸어 갔다.

짧은 지나침 속에서 그는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행사했고, 나는 그의 모든 자유를 존중했다. 그의 권리 행사는 나를 불쾌하게 만들거나 크게 침해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나의 태도에 고무되어 붙들고 늘어 지거나 따라오며 긴 말을 늘어 놓았다면, 그의 자유 행사는 급기야 타인의 기분을 해치고 평화를 교란하는 침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개인에게 보장된 자유나 권리의 행사가 타인의 그것들을 침해하는 경계선은 늘 미묘하고 얇은 것이다. 그 경계선은 법이나 관행으로 규정되기 전에 더불어 사는 사회의 상식적 배려에 의해 보호되어야 한다.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태도는 이웃에 대한 배려가 본질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결여 된 것이다. 과거에 그들은 이웃을 강도질 하고 강간하고 살해한 전과가 있다.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었으며, 그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이 우리 조선이며 조선 사람이다. 시간이 흘렀고, 그들의 과거 죄악을 용서하고 다시 이웃으로 살아 가지만, 그 과거는 몇 백년 몇 천년 전의 역사가 아니라, 내 아버지 어머니 세대가 몸으로 겪은 인생사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네 부모가 당했던 것은 네 할아버지들이 무능하고 나약하여 어차피 다른 강도와 강간범 그리고 살인범들에게 당할 것을 우리가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잘했다는 주장인가.

모든 한국인이 다 착한 것이 아니듯, 모든 일본인이 이렇게 패륜적이거나 후안무치한 철면피는 물론 아니다. 살펴 보면 그 집안에도 착한 인물이나 존경할만한 인물이 태어난다. 그러나 이웃에 대해 결정적 죄악을 범할 때, 그들은 일본이란 국가의 이름으로 단결하고 행동했다. 개인과 국가를 구분해야 하는 것은 대략 이러한 지점이다. 그 죄악에 가담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젊은 세대 가운데도, 일본의 과거 죄악에 대한 공동체적 책임을 통감하고, 부끄러워 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에는 악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하고 양심적인 사람도 늘 있는 법이다. 그들의 상대적 구성비가 어떤 상태이고 그 가운데 누가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가가 항상 문제인 것이다.

일본이란 이웃에게 참혹하게 당한 과거를 갖고 있는 우리 조선 사람들 가운데, 일본인 속에서도 그 중 후안무치하고 철면피 같은 인간들의 궤변이 동조하는 자들이 상당수 있다는 것은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일이다. 한승조란 인간에 이어 지만원이란 인간이 또 다시 일본 패륜아들이 쾌재를 부를 수 있는, 그리고 함께 사는 동족의 얼굴에 침을 뱉고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을 했다. 도대체 이런 놈들이 역사를 배웠으면 얼마나 배웠을 것이며, 동족을 위해 일했으면 얼마나 일했다고 이런 망발을 거리낌없이 저지르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한 마디로 저잣거리에 끌어 내어, 그들이 사무치게 존경하는 일본 사무라이들처럼, 머리만 남기고 땅에 파묻어 지나는 사람마다 침 뱉고 돌을 던지게 해야 할 놈들이다.

일제 장교가 되어 일제에 저항하는 조선과 중국의 독립군을 때려 잡다, 일제 패망과 함께 조국에 돌아 와 숱한 변신 끝에, 불법한 폭력으로 권력을 잡아, 제 민족을 억누르고 고문하고 죽여 가며, 18년 무소불위한 권력을 휘둘렀던 자를 평가하고 존경하는 것까지는 그들의 자유라고 치자. 한 인간이 인생을 통틀어 한 일 가운데 어찌 평가할 일이 없을 것이며, 긍정적으로 볼 것이 없으랴. 그러나 그 자들에게 묻고 싶다. 우리 역사에 그들이 조선의 메이지라고 존숭하는 다까끼 마사오가 없었으면 이 나라 이 민족이 지금보다 더 못한 지경에 빠져 있을 것이라는 단정은 도대체 어떤 무당이 이야기 해 준 것이냐고.

박정희 18년 독재가 마치 이 민족을 위해 신이 배려한 축복처럼 단정하는 자들이야말로, 일제가 주입시킨 대로 제 민족을 스스로 “엽전”이라 비하하고 조롱하는 놈들이 아니겠는가. 그 독재자가 없었던 오늘의 대한민국, 아니 오늘 보다 더욱 민주화되고 부강하며 떳떳한 대한민국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그들의 상상력 부족때문이 아니겠는가. 지난 일을 턱없이 부정하는 것도 옳지 못하나, 정의롭지 못하고 어리석었던 과거를 최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단지 근거 없는 독선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주장임은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국가의 자존과 명예는 단지 그 부와 물리적 힘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근본은 아니다. 민중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잘 먹지 못하고 잘 입지 못해도, 더불어 살아 가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자랑스럽고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여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런 자부심과 사랑에 근거한 행복감이 국가의 부와 물리적 힘을 만드는 근원이요 근본인 것이다. 부와 물리적 힘에 기초한 민생을 강조하는 것이 정치의 공학적 측면이라면, 이 근원과 근본을 염려하는 것은 정치의 철학이며 종교 같은 것이다.

지만원이나 한승조 같은 부류의 인간들에겐 대한민국 국민소득이 일본만 못한 이상, 결코 우리가 자랑스럽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러나 먼저 민중이 서로를 자랑스러워 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그런 국가는 누가 지도자가 되더라도 대략 저절로 강해지고 부유해 지며 남의 존경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그 믿음의 신념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국민 소득 만 불을 넘어 OECD 회원국이 된지도 여러 해가 지났고, 지금 우리는 1960년대와 전혀 다른 차원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왜 십 여년 가까이 이렇게 질척대고 있는가. 그 시점이 대략 오랜 군부 독재의 종식과 일치한다고 하여, 이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자들은 독재 시대를 그리워 하고 일제에 대한 망상적 발언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안 될 것이다. 비록 민중이 분노하여 패 죽이지 않는다고 함부로 입을 열어 대중의 귀를 더럽히고 정신을 산란하게 만들면 안 된다. 지난 세월 우리는 배고픔을 면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해, 오직 경제 개발과 반공만을 외치며 살았다. 공동체의 근본적 가치를 너무나 먼 뒷전에 던져 두고, 마치 외 줄 트랙을 달리는 경주마처럼 뛰었다. 그 결과 잘 살게 되었지만 고루 잘 살게 된 것이 아니다. 처음엔 모두 하루 세끼 제대로 먹을 수만 있으면 행복해 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걸 탓할 수는 없다. 우리가 탓하고 반성해야 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독재도 눈감아 주고, 비리나 부정도 저지르고, 투기나 특혜도 과정이라고 생각했던 어리석음인 것이다.

근본은 필요하면 챙기고 불편하면 버리고 다녀도 되는 편의의 문제가 아닌 것을 너무나 오래 잊었던 잘못인 것이다.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거의 모든 중요한 이슈들, - 빈부 양극화, 환경 파괴, 타락한 언론, 왜곡된 교육과 전도된 가치관, 국가 신뢰도와 기업의 윤리 경영, 정책 신뢰도 등등 모두가 오랜 세월 누적되어 온 바로 이 근본을 외면했던 과오에 수렴하는 것이다. 공동체적 근본 가치들과 경제적 현실 개선을 위한 소위 “개발”이 어깨동무하고 발전해 나온 것이 아니었기에, 급하게 서두르며 외길로 달려 온 결과인 것이다. 이런 결정적 과오에도 불구하고 경제 자체가 성장 발전하고 사회 민주화를 이울 수 있었던 숨은 공로자들을 굳이 찾는다면, 그 절대적 기여는 우리 사회 각 계층 구성원들이 함께 흘린 땀과 눈물 그리고 피에서 찾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당시 정책을 기획하고 결정한 독재자나 관료 또는 지배적 엘리트의 절대적 공헌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중대한 판단 착오이며 왜곡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지금 이 시점에 횡행하는 중대한 현실적 왜곡이 있다. 과거 수 십년 동안 누적되고 배태된 문제들이 이 시점에 터져 나오고 있다 해서, 그것을 민주화나 특정 정권의 탓으로 돌리는, 본말전도의 시각과 인식이 그것이다. 인간은 항상 근본은 소홀히 하고 지엽말단을 두고 흥분하기 쉽다. 그것은 그릇된 판단으로 이끌며, 자멸의 길을 스스로 찾아 걷게 만든다. 일본인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었다면, 어찌 꼭 그들이 강도질 하고 살인할 때 배웠어야 하랴. 독재자의 공적을 평가할 줄 아는 자가 어찌 독재자가 아닌 그 누군가는 더 잘 했을 수도 있다는 단순한 개연성도 인정할 줄 모르는가.

역사를 아는 척, 가장 소신 있는 척 떠들지만, 그들은 역사적 교훈으로 습득하여 간직할 부분과, 역사적 진실 자체에 대한 옳고 그름의 평가가 별개의 문제임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안목의 소유자들이다. 그런 저렴한 안목과 식견으로 자신의 생각만을 옳다고 주장할 줄만 알지, 다른 생각을 들을 귀나 이웃을 배려할 상식은 치명적으로 부족한 자들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래도 개화된 사회의 관용으로 넘어 갈 수 있다. 그런데 제 이웃의 얼굴에 자랑스럽게 침 뱉는 행동까지는 용납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양심 있는 일본인 식자조차 역사 왜곡을 주장하고 군국주의 망령의 화신을 불러 깨우려는 자들을 경멸한다. 그런 시대에 이 땅의 지식인입네 떠드는 자들이 쏟아 내는 오물들을 보면, 근본을 잊고 물질적 풍요를 향해 맹목적으로 치달아 온 벌로 얻은 정신질환과 기형이 작은 문제가 아님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자기 부모를 무고하게 살해한 자의 손을 들어 주는 패륜은 자유로 용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같은 시대를 사는 무고한 사람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하는 것이 허용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제 정신 가진 척 미친 소리로 민족을 능멸하고, 지워지지 않는 전과를 갖고 있는 일본의 망동을 부채질하는 것은 민족 반역의 규정에서 한 치도 어긋날 수 없는 것이다.

공동체에 대한 배려 없는 자유는 방종이며 무지이고 범죄일 따름이다.
먹물의가면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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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의 가면....



한승조, 지만원 같은 사람 많이 커밍아웃해라~ 어디까지 나오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