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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 키노코(경칭 생략. 그는 TYPE-MOON 소속이며 파트너인 타케우치 타카시도 창작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문장을 쓰는 것은 그이기 때문에 일단 그를 중심으로 글을 써나가겠다)는 현재 업계의 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크리에이터이다. 『月姬』에서부터 시작된 동인계, 웹계에서의 인기는 여전하고, 상업적으로도 『Fate/stay night』(이하 Fate)가 10만, 소설 『공의 경계』가 20만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나스 키노코는 동경하고 있던 소설계에서도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업계에 영향까지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라이트노벨 업계에서는 전격문고의 하야마 토오루(『9S』), 카마이케 카즈마(『어떤 마술의 금서목록』) 등 영향을 받은 작가가 나오고 있다. 고단샤(講談社)에서 간행되고 있는 문예지 『파우스트』에서는 나스 키노코를 간판으로 내세우고 있으며(사실, 『파우스트』는 나스 키노코를 끌어들인 것으로 큰 이익을 보고 있다), 추리소설 업계의 신본격(新本格)을 연상케하는 '신전기(新傳奇)'의 기수로서 전면적으로 밀어주고 있다. 비평 쪽에서도 고참 미스테리 작가 카사이 키요시가 나스 키노코를 절찬하면서 『공의 경계』의 해설까지 쓰고 있는 반면(비슷한 시기에 나온 카사이 키요시의 『뱀파이어 전쟁』 신장판에 타케우치 타카시의 삽화, 나스 키노코의 해설이 실려있는 것을 보면 상업적으로 영합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아즈마 히로키는 상당히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본래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소설이라는 형태로는 주목을 받지 못하자 18금미소녀게임으로 방향을 전환했던 나스 키노코. 그랬던 나스 키노코는 현재, 명실공히 업계의 1인자로서 평가받으며 소설계는 물론 일간신문에까지 주목받는 위치에 있다.

하지만 나스 키노코에게, 업계의 톱에 걸맞은 재능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스 키노코는 수많은 단점을 끌어안고 있는 작가이다.


◆단점 투성이의 일인자

먼저, 문장력의 부족이 눈에 띈다. 정돈되지 못한 문장은 개성은 있지만 완성도가 없다. 인상적인 대사, 표현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있지만, 그 외의 문장들은 장면과 장면을 잇기 위해서 존재할 뿐으로 인상에 남지 않는다. 독자적인 표현, 조어가 눈에 띄지만, 멋있어 보이는 단어를 억지로 사용하고 있을 뿐 필력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양은 압도적이어서 문장을 주입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간단한 얘기를 편집증적으로 세세하게 설명, 묘사할 뿐 결국 그 내용은 별볼일 없는 경우가 많다. 좋게 말하면 어렵지만 특색 있는 문장, 나쁘게 말하면 난잡하고 기초가 안 되어 있는 문장이, 나스 키노코의 문장이다.

구성력도 상당히 떨어지는 편으로, 각 장면장면의 연결이 약하다. 긴 이야기에서 호흡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고 있으며, 늘어놓은 복선이나 설정을 수습하는 데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 특히 Fate는 지나치게 긴 시나리오로 인해 각 장면장면은 재미있게 플레이할 수 있지만 플레이한 다음에는 개개의 장면의 인상이 옅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그리고 『月姬』도 Fate도 각 시나리오들의 균형이 맞지 않아 작품의 완성도를 떨어뜨리고 있다.

설정이 치밀하다는 평이 있지만, 나스 키노코 작품의 설정은 치밀한 것이 아니라 방대한 것에 불과하다. 작가의 지식을 총동원한 것으로 보이는 설정은,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설정 외에는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기믹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럴 듯 하게 보이게 하는 장식으로서밖에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점도 업계의 톱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전개나 구도, 인물 등이 대부분 '어디선가 본 듯한' 것들뿐이어서 참신함이 없다. 이런 계통의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신선할지도 모르지만, 하나하나 해체해보면 지금까지 수없이 사용되어 온 공식과 이미지의 반복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의 세 작품들을 비교해보아도, 작품들 사이에 공통된 요소(설정의 공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패턴이 눈에 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에게 있어서 하나의 의무인 '신선한 소재의 개발'을, 나스 키노코는 포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때, Fate와 『가면라이더 류우키』의 유사성이 지적된 적이 있었다. 나스 키노코가 맨처음 Fate를 구상한 것은 학생 때라고 하지만,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유사성이 지적될 수 있는 이상 그대로 내놓는 것은 위험한 행위이다. 만약 만화나 소설이었다면, 표절작 소리를 듣는 것을 우려한 편집자에 의해 제지당했을 것이다.

사실 나스 키노코 작품에는 깊이가 없다. 방대한 설정과 배경 지식으로 인해 난해해 보이긴 하지만, 어려워보이는 용어와 표현, 그리고 장광설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나스 키노코의 작품은, 한 발작 잘못 딛으면 유치함의 영역에 존재한다. 무적이 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인 주인공이 등장하고, 기록 속의 영웅들이 오리지널 캐릭터와 전투하고 연애하며 메인 캐릭터들을 위한 희생양이 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조리 종합했다는 듯한 세계관, 일부에서는 '책 조금 읽었다는 중학생이 잘난척하면서 늘어놓는 개똥철학'이라고까지 혹평 받는 장광설 등, 자칫하면 자아도취적인 유치한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 나스 키노코의 작품군이다.
(언젠가 나스 키노코 작품을 TRPG에 비유한 글을 본 적이 있었는데, 세션 도중의 특징, 기능 추가가 자유자재인 CP무제한의 먼치킨 캐릭터로 플레이하는 오리지널 GURPS, 내지는 먼치킨 게임마스터가 보여주는 장절한 NPC끼리의 배틀이라 비유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팬들의 찬사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일본에서는 이와 같은 비판들 또한 존재한다. 현재 나스 키노코는, 수많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업계의 정점에 올라와 있는 것이다.


◆확대재생산된 인기

현재의 나스 키노코의 인기는, 인터넷상의 팬문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웹의 남성향 팬문화는, Leaf의 『To heart』, Key의 『Kanon』등을 거치며 발전해왔다. 개인의 홈페이지를 주무대로 한 팬문화의 발전으로 그림일기, 웹코믹 등은 정착될 수 있었다.

TYPE-MOON의 『月姬』는 상업적인 형태의 홍보가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인터넷상의 팬문화에 의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던 게임이었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일러스트나 웹코믹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사람은 문장으로 『月姬』의 '포교'에 힘썼다.

인터넷 상에서의 언급이 일정 수준에 도달한 작품은, 원작과의 무관계하게 하나의 장르로서 소비되어가는 경향이 있다. 즉, 원작을 제대로 플레이한 적이 없어도 캐릭터만 숙지하고 있으면 충분히 그 팬들에 의한 2차창작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스스로 2차창작에 참여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月姬』의 캐릭터들은 원작자인 나스 키노코의 손에서 벗어나 팬들에 의해 확대재생산되고 있었다.
물론, 팬들은 『月姬』가 얼마나 대단하고 재미있는 작품인지 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결과 TYPE-MOON은 현재 인터넷상의 팬문화의 정점에 위치하게 되었고, 나스 키노코의 평가도 자연스럽게 급상승하게 되었다.

(Fate가 10만장 정도의 판매량을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공의 경계』가 20만부 이상 팔린 것은, 나스 키노코와 그 작품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가격 등의 이유로 게임에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던 사람들이 책을 구입했기 때문이지 원래 소설을 읽던 일반 독자층에 의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공의 경계』는 어느 시점부터 판매 속도가 갑자기 떨어져 각서점이 상당한 재고를 부담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 수많은 단점을 지닌 나스 키노코의 작품이 인터넷의 팬들에게 선택된 이유는 무엇일까.


◆캐릭터와 연출력

나스 키노코의 작품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자, 인터넷 팬문화의 중심으로 만든 가장 큰 공신은 바로 그 캐릭터이다.
나스 키노코의 캐릭터는, 분명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月姬』의 캐릭터들만 해도 흡혈귀, 여동생, 메이드 등 유행하던 '뻔한' 요소가 중심이 되어 있다. 거기에 각각 고양이, 안경, 선배, 수녀복, 브라더콤플렉스, 카츄샤, 무뚝뚝, 매드사이언티스트 등등의 요소(내지는 속성)를 충실히 지니면서, 플레이어가 호감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면이 다수 준비되어 있다. '자, 이 캐릭터들에게 모에(萌え)하라!'라고 말하는 듯, 나스 키노코는 철저하게 상업적으로 완성된 캐릭터를 준비했다.

하지만, 소비자에게 꼬리를 흔들며 아양을 떠는 일부 미소녀물의 캐릭터들과 같은 '싸구려스러움'이, 나스 키노코의 캐릭터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캐릭터들은 시리어스한 스토리 속에서 생동감 있게 움직이면서 자신을 확실히 어필한다. 특히 『月姬』의 경우는 각자가 갖고 있는 비정상적인 요소(특히 광기)를 효과적으로 피로하고 있다. 이런 요소들을 통해 캐릭터들은 싸구려 미소녀
캐릭터가 아닌, 개성적이면서 멋진 캐릭터로 보이게 된다(하지만, 실질적으로 팬문화에서 소비되는 것은 개성적인 측면이 아닌, 전형적인 측면에서의 정형화된 캐릭터 쪽이다).


다채로운 타입의 캐릭터를 만들지 못하고, 하나의 캐릭터가 작품 속에서 일관성을 잃는 경우가 자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스 키노코는 팬들의 지지를 받는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이 없었다면 나스 키노코의 작품(특히 『月姬』)는, 인터넷상에서 그렇게 화제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나스 키노코의 또다른 장점은, 연출력이다.
나스 키노코는 독자(플레이어)를 열광시키는 장면을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난잡한 문장과 어수선한 구성은 '명장면'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머릿속에서 잊혀진다. 나스 키노코는 이전까지의 전개에서 준비해두었던 카드를 사용해 숙명적인 대치 상황을 만들어 내고, 특유의 언어감각에서 나오는 대사는 캐릭터들의 심정을 그대로 담아내며 사투의 시작을 알린다.

멋진 장면을 만들기 위한 나스 키노코의 상황설정 능력은 독보적이다. 각기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는 캐릭터들은 각자의 능력을 유감 없이 발휘하며 숙명의 대결을 펼친다. 불리한 위치에 있던 주인공은 자신만이 갖고 있는 능력을 한계까지 이끌어내어 자신만만하던 적을 쓰러뜨린다. 이런 캐릭터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싸움 속에서, 독자(플레이어)는 더할 나위 없는 흥분과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특유의 문장은 여기서 온갖 단점을 극복하고 빛을 발한다. 나스 키노코는 그만이 쓸 수 있는 명대사를 캐릭터들이 절묘한 타이밍, 절묘한 분위기에서 입에 담게 한다. 캐릭터들의 사투는 그 장절한 광경은 물론 심상풍경까지 산문보다는 운문에 가까운 문구로 묘사되며, 어떤 때는 소설이나 게임의 텍스트보다는 서사시에 가까운 문장이 흘러나온다.

이 모든 것이 나스 키노코 특유의 살육, 전투의 미학 속에서 이루어지면서, 나스 키노코가 갖고 있는 단점들을 모조리 덮어버릴 정도의 '재미'를 선사하는 것이다.
난잡한 문장은 인상적인 표현과 대사가 되고, 유치함과 종이 한 장 차이였던 소재는 매력적이고 분위기 있는 것이 되며, 파행되어 있던 구성은 잊혀지고 인상적인 장면만 남는다. 가끔 자기모순에 빠지는 모습도 보이는 철학과 작품세계는 신성한 것이 되어버린다.

나스 키노코의 연출력은 작품의 다른 요소들을 모조리 '멋지고' '대단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 정도로 작품을 장식하고 있다. 이는, 굳이 전투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나스 키노코는 '멋져 보이는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라면 다른 것은 충분히 희생시키는 작가이다. 예를 들어 Fate의 선전문구에는 '살아남는 건 한 팀뿐'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실제 뚜껑을 열어보면 게임 초반에 얼마든지 성배전쟁에서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고,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한 팀만이 살아남기 위한 배틀로얄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Unlimited Blade Works 루트에서 아처가 왜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설명이 없다. 이런 식으로, 나스 키노코는 멋진 문구, 장면을 만들기 위해 이야기의 부자연스러운 부분을 감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Fate는 나스 키노코의 연출력이 게임이라는 표현방식에 힘입어 극대화된 작품이었다.


◆『Fate/stay night』, 그 톱클래스의 연출력

Fate는 『月姬』보다 외형적으로는 수단계 향상된 게임이었다.
무엇보다, 그래픽에서의 진보가 눈부셨다. 『月姬』의 CG는 사실 상업레벨은 아니었기 때문에, 상업화한 TYPE-MOON에 있어서 CG의 강화는 절실한 것이었다. 우수한 그래픽커를 보강한 TYPE-MOON은, 결과적으로 수준급의 CG를 얻게 되었다. 원화 담당의 타케우치 타카시의 그림은 별다른 진보는 없는 것 같지만 채색은 업계에서도 톱레벨에 속할 정도로 진일보하였으며, 배경 또
한 훌륭하다.

사운드쪽도 상당히 강화되었다. BGM 자체는 『月姬』쪽이 나았다는 의견도 있어 어느 쪽의 음악이 더 나은지는 비교할 수 없지만, 곡의 수가 적어 항상 똑같은 음악만 흘러나왔던 『月姬』와는 달리 많은 수의 BGM을 준비하여 알맞은 장면에 골라서 사용할 수 있었다. 효과음 또한, 446개라는 엄청난 수를 준비하여 적재적소에 활용하고 있었다.
이런 그래픽과 사운드의 레벨업을 바탕으로, Fate는 어드벤처 게임, 그것도 노벨계의 게임으로서는 한계에 가까운 연출 시스템을 확립할 수 있었다.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ADV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전투신의 묘사이다.
텍스트 중심의 ADV인 이상 이펙트의 사용에는 한계가 있고, 텍스트만으로 훌륭한 액션묘사를 할 수 있는 시나리오 라이터도 드문 편이다. 나스 키노코도 긴장감 넘치는 전투상황을 조성하는 능력은 있지만 전투 자체를 실감나게 묘사하는 문장력은 부족한 편이었다. 하지만 Fate에서 TYPE-MOON은 화려한 화면효과의 사용으로, 마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듯한 박력 있는 화면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전투신에 투입된 CG는 무려 192장. 이 방대한 양의 CG들은 수많은 효과음과 함께 움직이면서 평범한 동영상보다 훨씬 박력 있는 '영상'을 플레이어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여기에 나스 키노코 특유의 문장과 상황설정 능력이 합쳐져, 완벽에 가까운 전투신이 완성되었다.
세이버의 엑스칼리버와 라이더의 베르레 폰의 격돌, Unlimited Blade Works 라스트의 길가메쉬와의 전투 등은 Fate의 연출시스템이 만들어낸 굴지의 명장면이었다. 특히, 길가메쉬를 무한의 검제로 몰아세우는 장면에서 검이 격돌하는 효과음이 끝없이 흘러나오는 연출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훌륭한 연출은 전투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Fate의 어새신 등장신의 임팩트는 상당한 것이었고, Unlimited Blade Works 라스트에서의 아쳐와의 이별장면 등도 인상적이었다.
또 『月姬』에서도 충분히 많은 편이었던 스탠딩CG의 수는 대폭 증가하여, 일상 파트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묘사나 대사 없이도 스탠딩CG의 순간적인 변화로 등장인물의 심정을 슬쩍 드러내는 연출은, 작지만 효과적인 연출이었다.

나스 키노코와 TYPE-MOON의 합작에 의한 업계 톱클래스의 세련된 '연출력'은, Fate를 결코 이름뿐인 대작이 아닌 '명작'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소년만화적인 『Fate/stay night』, 그리고 Heavens Feel

Fate의 재미는, 18금미소녀게임의 것이라기보다는 배틀 중심의 소년만화의 것에 가깝다.
우연히 강력한 힘을 얻은 주인공, 제시되는 대결구도, 차례차례 나타나는 강력한 적, 개성적인 필살기, 고뇌하면서도 결국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는 주인공, 전력을 다해 강적을 쓰러뜨리고 얻는 승리, 그리고 옆에 있던 소녀와의 사이에서 싹트는 사랑... 소년만화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전개들이며, Fate의 재미는 여기에 의존하고 있다.

Fate가 이렇게 넓은 계층에서 지지를 받는 건, 누구나 받아들이기 쉬운 왕도적 소년만화의 분위기도 주된 이유 중 하나일 거라 생각한다(『月姬』에서처럼 위험한 소재가 많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좀더 대중적인 작품이 되었다). Fate의 3개의 루트 중 Fate 루트는 이 소년만화적 테이스트가 가장 잘 드러난 시나리오였다(삽입된 에로신에서 어색함을 느끼는 플레이어가 많은 것은, 배틀 중심의 소년만화 분위기에 젖어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Fate 루트는 상대하게 될 적의 능력은 물론 성배전쟁에 대해서도 완전히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해(히로인인 세이버의 정체도), 정체불명의 적들과 싸워나가면서 클라이맥스로 나아간다. 작품세계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는 Fate 루트는 도입부적인 측면도 있어서, 지나치게 비비꼬인 수수께끼나 반전은 빠져 있다. 가열되어 가는 배틀을 즐기기 위해서는 최적이었던 것이다.

Unlimited Blade Works 루트 또한 소년만화적 테이스트가 강한데, 이쪽은 Fate 루트에 비해 '흔들리는 주인공'에 중심을 두는 최근의 만화에 가깝다. 자신이 갖고 있던 신념을 부정당해 벽에 부딪힌 주인공이 마음을 바로잡고 성장하는 모습이, Unlimited Blade Works 루트에서는 잘 그려져 있다. 또한 전투의 카타르시스를 강조했던 Fate 루트보다는 '장절함'이나 '애절함'을 연출해내는 데 중심을 두었는데, 이를 통해 주요 캐릭터들은 물론 각각 인상적인 장면이 부여된 랜서, 캐스터, 버서커, 어새신 등의 서브캐릭터들도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다(이는, Fate 루트에서 이미 '소개'를 끝마쳤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Fate 루트도 Unlimited Blade Works 루트도, 변화구가 아닌 직구로 승부하는, 알기 쉬운 소년만화적 스토리였다.

하지만, Heavens Feel 루트만은 조금 다르다.
Heavens Feel 루트의 중심이 되는 것은, 주인공인 시로와 히로인인 사쿠라의 심리였다.
Heavens Feel 루트에서 시로는 지금까지 관철시켜왔던 이상을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인상이 옅은 캐릭터였던 사쿠라는 불안정한 정신상태와 자기 자신에서 일어나는 변화로 인해 조금씩 정신에 이상이 생기고, 나중에는 광기에 가까운 격정을 드러낸다.
Heavens Feel 루트는 사이코 드라마적인 측면을 지니며, 등장인물들의 심리변화와 그 표출에 중심을 두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사쿠라의 절박하면서 광기에 찬 외침에 몰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선 두 개의 루트에서 소년만화적인 만족감을 얻어왔던 플레이어에게,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의 재미를 추구한 Heavens Feel 루트의 전개에서 똑같은 만족감은 얻을 수 없다.


이것이, Heavens Feel 루트가 가장 인기가 없는 시나리오가 된 이유이다.
Heavens Feel 루트에는 카타르시스가 적다. 액션도 세이버와 라이더의 대결을 제외하고는 인상적인 장면이 적은 편이다.
시로의 변화는 관점에 따라서는 Fate 루트와 Unlimited Blade Works 루트의 부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 플레이어는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 라이더와 코토미네의 비중이 커졌지만 다른 강적들은 어이없이 탈락해버려, Unlimited Blade Works 루트에서 각 서번트의 팬이 되었던 플레이어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히로인인 사쿠라도 세이버나 린에 비해 완성도가 높은 캐릭터는 아니다.
분명 Heavens Feel 루트는 의미 있는 시나리오이며, 재미도 있다.
Heavens Feel 루트에서의 시로의 변화는 Unlimited Blade Works 루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었으며, 여기서의 시로는 상당히 '정상'에 가까워져 있다. 훗날, 시로가 절망할 가능성이 가장 낮은 루트가 Heavens Feel 루트일 것이다.

사쿠라의 심리 묘사도 비록 일관성이 결여되어있다는 단점은 있지만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특히 후반부에 들어서면 이전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며 억누르고 있던 격정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개인적으로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실제 사쿠라의 심리에 대해 주목한 플레이어는 극소수가 아니었을까 생각되는데, 사쿠라의 심리는 시나리오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리뷰 등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못하고 있다. Fate에서 이런 사이코드라마적인 소녀의 내면묘사를 기대한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듯 다른 루트와는 조금 다른 방향의 '재미'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플레이어에게는, 의외의 모습을 드러내며 아군이 되어주기도 했던 라이더와 코토미네, 자기 시나리오 이상으로 활약해주는 린 정도밖에는 즐길 요소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두 루트의 안티테제이며 마무리답지 않은 마무리였던 Heavens Feel 루트. Fate 루트와 Unlimited Blade Works 루트와는 다른 방향성을 추구했던 Heavens Feel 루트에, 상당수의 플레이어는 실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업적으로 철저해지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판단을 잘못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Heavens Feel 루트는 『Fate/stay night』의 결점이 되고 말았다.



◆작가, 회사, 그리고 팬들의 미래

나스 키노코와 TYPE-MOON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고, 위축되어 있던 시장에 어느 정도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하지만 수많은 양의 '초심자'를 발생시켰기 때문인지, TYPE-MOON의 팬들의 무신경한 발언(표절 등)에 불만을 느끼는 다른 작품의 팬들도 존재하고, 지나친 열광에 눈살을 찌푸리는 분위기도 있다.
현재 국내에서의 나스 키노코와 TYPE-MOON의 인기는, 원작을 구입하여 제대로 플레이한 사람들에 의한 것은 아니며 번역본과 무단번역된 동인지에 힘입어 형성된 것이다. 분명 나스 키노코의 글, TYPE-MOON의 게임은 이런 계열의 스토리에는 익숙하지 않은 한국의 소위 '미연시' 플레이어에게는 충격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나, 일부 국내 팬들의 열광과 신격화에는 위화감을 느낀다.

현재 나스 키노코는 분명 업계의 톱크리에이터임은 분명하나, 개인적으로는 그 장래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놓은 『공의 경계』, 『月箱』, 『Fate/stay night』의 3작품은 세부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결국은 '비슷비슷한 이야기'이며, 작가 개인의 '성장'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기대한 대로의 작품을 내주는 건 소비자에게 있어서는 고마운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결국 쇠퇴해갈 수밖에 없다(그렇기에 『Fate/stay night』가 장기적으로 업계에 끼칠 영향은, 나스 키노코의 스토리가 아니라 화려한 이펙트 쪽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노선에만 안주한다면, 나스 키노코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나스 키노코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이기 위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유산에 집착하지 말고(Fate처럼 학생 때 구상했던 얘기를 재탕하는 일은 피해주길 바란다), 작가 나스 키노코가 보다 성장한 모습을 보일 수 있기를 바란다.


- 출처『寒葉玉鳴風』세위의 글창고 04/09/06 00:36
   ==>   http://regret.x-y.net/tt/index.php?pl=206&nc=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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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의 너무 과한듯한 인기에 위화감을 느낀게 저만은 아니었나보군요.

누구는 '읽어보고도 그렇더냐!?'라고 하던데 읽고나서 괜히 기분만 나빠진건 취향탓일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