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처럼 던진 한줄 유서 '눈물젖은 사연'
  
투신자살한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남긴 유서 문구 한마디가 현대그룹 직원들을 울리고 있다. '당신, 너무 자주 윙크버릇 고치세요.' 유서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문구 하나가 정회장을 돌연히 떠나보낸 많은 이들에게 진한 눈물을 자아내게 하고 있는 것이다. 가슴뭉클한 사연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경찰 조사결과에 따라 정회장 죽음의 궤적을 더듬어 보면 이 문구가 갖는 의미가 절실하게 다가온다. 정회장은 지난 3일 밤 가족과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절친한 고교동창 박모씨와 술을 마신 뒤 취한 상태에서 계동 사옥을 찾았다. 휴일 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는 운전기사에게 "20∼30분 후에 내려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12층 집무실로 올라갔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근 그는 비통한 심정으로 유서를 휘갈겨 썼다. 일부 글자가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의 유서였다. 죽음의 목전에서 얼마나 감정이 격해져 있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유서는 3통이었다. 그중 하나가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에게 남긴 것이다.
 
"명예회장님(고 정주영 회장)께는 당신이 누구보다 진실한 자식이었습니다. 당신이 회장님 모실 때 저희는 자식의 한사람으로서 부끄러웠습니다. 명예회장님께서 원했던 대로 모든 대북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 바랍니다. 당신, 너무 자주 하는 윙크 버릇 고치세요."
 
마지막 문장은 분명한 농담이었다. 아는 사람은 모두 히죽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는 위트였다. 잠시후면 이 세상을 하직할 사람이 격렬한 필치로 이런 농담 한마디를 써놓은 것이다.
 
사연은 지난 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사장은 리비아 발전소 입찰상담을 위해 출장을 떠났다가 트리폴리 공항에서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 여객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70명이 사망한 대형사고였다. 김사장은 극적으로 살아남았지만 상처를 입었고, 이 때문에 한쪽 눈 주위 근육이 수시로 떨리는 후유증이 남았다. 정회장이 지칭한 '윙크'는 바로 이 떨림현상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것이다.
 
현대직원들에 따르면 김사장의 후유증은 사고 직후 치료만 제대로 받았다면 남지 않았을 것이었다. 어려운 치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벌레인 김사장은 회사일에 파묻혀 지내느라 치료를 차일피일 미뤘고, 결국은 치료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김사장은 본의 아니게 수시로 '윙크'를 해야 하는 처지가 돼버린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정회장은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을 역설적으로 '윙크'라는 농담으로 표현해 사석에서 웃음을 자아내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사장은 손꼽히는 '현대맨'이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총애했고, 그 애정은 그룹을 물려받은 정몽헌 회장에게까지 고스란히 이어졌다. 정회장이 98년 그룹의 남북경협사업단장을 맡은 뒤로는 최측근에서 보필하며 대북사업 실무를 지휘했다. 금강산 관광사업 등 대북사업을 전담하기 위해 현대그룹이 99년 2월 설립한 현대아산 초대 사장에 취임한 그가 정회장을 수행했던 방북 횟수만 40여차례. 현대의 대북사업 과정을 속속들이 꿰고 있고 최근에는 대북송금 사건으로 정회장과 함께 특검조사를 받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정회장이 김사장에게 유서를 남긴 데는 사운을 걸고 매달린 대북사업을 꽃피우지 못하고 가는 데 대한 회한이 서려 있다는 것이 현대사원들의 말이다. '유분(뼛가루)을 금강산에 뿌려 달라'는 또 다른 유서의 문구에서도 이를 절실히 느낄 수 있다는 것.
 
4일 오전 충격적인 투신자살의 비보를 듣고 달려온 김사장은 정회장의 시신 앞에서 오열했다. '당신, 너무 자주 하는 윙크 버릇 고치세요'라는 유서 문구를 보고는 더욱 눈물을 쏟았다. 대북사업을 이어가야 할 자신을 아끼는 정회장의 절절한 애정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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