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6일 저녁 8시 전미국인을 대상으로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마지막 외교' 노력을 기울인 뒤에는 반드시 전쟁을 하겠다고 단단히 다짐하더군요. '전쟁 준비가 다 됐다'는 뜻이지요.

저는 그날 부시의 회견을 분노로 지켜보았습니다. 부시 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고문' 혹은 그에 유사한 '취조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보도를 막 접한 터였기 때문입니다. '부시가 대통령 되더니 미국이 막 가는구나'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3월5일자 < LA타임스 >는 조나단 털리 교수(조지워싱턴대, 법학)의 '벼랑까지 밀린 인권(Rights on the Rack)'이라는 기고문을 실었습니다. 부제가 '테러와의 전쟁 중 고문의혹, 미국의 인권 기준이 허물어지다'입니다.

그 글에서 털리 교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최근의 가혹행위 중 피의자 치사 사건을 폭로했습니다. 미군이 주둔 중인 바그람 공군기지(Bagram Air Base)에서 테러 용의자로 조사를 받던 두 아프가니스탄 사람이 사망했는데 온몸에 가혹행위 자국이 선연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미군 특수부대의 조사를 받던 중이었다는군요.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가혹행위를 저지른 사례는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지난해 테러 용의자로 검거된 아부 주베이다는 체포될 당시 가슴과 샅과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는데, 미국 취조관들은 정보를 얻어낼 목적으로 진통제를 주지 않았다고 인정했더군요. 혹한에 난방도 없는 철제 컨테이너에 사람을 발가벗겨 집어넣기도 하고, 총상 입은 다리를 병원용 침대에다가 묶어 방치하기도 했답니다.

그밖에도 피의자를 여러 날씩 잠재우지 않거나, 불편한 자세로 장시간 무릎을 꿇리거나 앉지를 못하게 하기도 했고, 그런 고문을 시작하기 전에 흠씬 구타를 하곤 한다는 비난을 듣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아주 센 조명이나 못 견딜 정도의 소음을 가해서 잠을 자지 못하게 한 나머지, 피의자들이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봤다는 증인들도 나왔습니다.

미군의 가혹행위 사실은 이상하게도 미국과 세계에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미군 당국이 부인하거나 변명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다만 인권감시단(Human Rights Watch)이나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등의 인권단체들만이 바그람 미공군기지의 가혹행위와 그에 대한 미국 정부 입장을 강하게 비난해 왔습니다.

털리 교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공공연히 자행되는 가혹행위는 수사관들의 자의나 실수가 아니라 미국 정부의 정책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 예로 최근 사망한 두 아프가니스탄인의 검시 보고서에서도 미군 검시관이 '(이 살인의) 가해자는 미국 정부인 것 같다'고 써 놓았습니다.

게다가 그 가혹행위 치사 사건은 그 두 피의자가 미중앙정보부(CIA)에 이첩된 상태에서 발생했습니다. 실제로 미국은 작년부터 바그람 미공군 기지에 소위 '취조 센터(interrogation center)'를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형 선박용 컨테이너를 개조해 만든 이 '취조 센터'는 CIA가 설립하고 관장해 온 것입니다.

이 '취조 센터'를 둘러싸고 가혹행위 및 고문 시비가 끊이지 않게 된 것인데, 지난해에는 CIA가 피의자들을 물리적인 압력을 가하는 '구태의연한 방법(old-fashioned way)'으로 정보를 추출하고 있다는 보고서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더구나 미당국은 그런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털리 교수의 말입니다.

"믿을 만한 보고서에 보면, 정부 기관들이 고위층의 승인을 받고서 흔히 고문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체계적인 취조 기법 사용을 조장하고 있는 것 같다. 과거 미국이 다른 나라를 국제법 위반으로 몰아붙이곤 했던 바로 그 취조 기법을 지금 미국이 활용하고 있음을 미국 관리들이 인정해 왔다."

심지어 바그람 기지의 "취조 센터"에 근무하는 한 관리는 "피의자의 인권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내 임무를 다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놀랍게도 미정부도 공공연하게 그런 관행이 사용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고문이 아니라 "고통과 협박의 취조 기법"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기법들은 엄격한 고문의 정의에 부합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기법이 미국 아닌 해외에서 사용되는 것은 문제되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나 털리 교수는 그런 기법이 미국 내에서 자행되면 설사 범죄가 아닐지는 몰라도 적어도 '위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인권단체들은 미국의 그런 '기법'도 명백히 제네바 협정 위반이라고 주장합니다. 동협정 17조에는 "전쟁 포로에게서 정보를 빼내거나 그와 유사한 목적으로 어떤 형태의 신체적, 정신적 고문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1978년 유럽 인권법원은 아일랜드에서 그와 똑같은 기법을 사용했던 영국 정부의 행위를 '고문'이라고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비인도적"이고 다수의 국제 조약을 깨뜨리는 행위라고 판결한 바 있습니다.

미당국은 이런 '기법'으로도 정보를 캐내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본격적인 고문을 추진합니다. 고문국으로 알려진 다른 나라로 피의자를 보내는 것이지요. 즉, 알아내고 싶은 정보 목록과 함께 피의자들을 파키스탄이나 사우디 아라비아나 모로코 같은 나라로 보낸답니다. 그러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고문을 통해서 얻어진 정보를 건네받을 수 있답니다.

이런 관행은 이미 공공연합니다. 예컨대 지난주 존 록펠러 웨스트버지니아 상원의원은 9.11테러 주동자 혐의로 체포된 알 카에다 행동대장 칼리드 샤이크 모하메드를 다른 나라에 보내 고문해야 한다고 충동질한 바 있습니다.

그런 관행을 가리켜 털리 교수는 "한때 미국은 고문을 저주하던 나라였으나 지금은 '고문 서비스' 발주국으로 탈바꿈했다"고 비꼬았습니다.

미국이 피의자를 다른 나라에 넘겨서 고문하도록 해온 관행을 처음 폭로한 것은 <워싱턴 포스트>입니다. 지난해 12월26일 알랜 쿠퍼스만, 다나 프리스트, 바톤 겔만 등 세 명의 기자는 미국의 '고문 서비스 이용관행'을 폭로한 바 있습니다. 인권감시위원회가 부시 미대통령에게 이를 항의하는 서신을 보낸 것을 기사화하면서 심층 분석 기사를 내보낸 것이지요.

당시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이 주로 이용하는 고문국으로 요르단, 모로코, 이집트 등을 꼽았습니다. 미국은 겉으로는 그들의 비인간적 고문 관행을 비난하면서도 뒷구멍으로는 정보수집을 목적으로 그 나라들에게 고문을 의뢰해온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석달이 다 지나도록 이 문제는 미국내에서도 그다지 공론화되지 못했습니다. 이라크전 준비를 둘러싼 준비가 긴박하게 엎치락 뒷치락을 거듭하는 바람에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겠습니다.

하지만 3월6일자 <워싱턴 포스트>는 칼럼니스트 리차드 코엔의 글, '테러와 싸우려고 고문을 하다니'를 통해 다시 한번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 칼럼에는 새로 드러난 사실은 없지만 고문의 폐해와 후유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코엔은 독일군 점령시절 프랑스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가 나찌에게 고문당했던 쟝 아메리(Jean Amery)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손을 뒤로 묶이고 허공에 매달렸던 그는 그때 빠져버린 어깨뼈 때문에 그 뒤로도 22년 동안 고생합니다. 마침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메리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한번 받은 고문은 영원히 계속된다."

코엔은 "고문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정당하다고 믿"으며 "실제로 고문을 하고 나면 (자기가 얻고 싶은 증언을 얻어낼 수 있으므로) 자기가 옳았음을 증명할 수도 있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결국 "무죄와 유죄 사이의 차이는 시간문제일 뿐"이랍니다. 고문에는 장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시 행정부가 테러리스트와 전쟁을 벌이겠다며 온갖 무리수를 두는 동안 미 언론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9.11테러로 성난 미국민의 여론 때문이기도 하겠고, 부시 정부의 결연한 의지때문이기도 했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언론들이 본격적으로 제동을 걸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데'하는 생각 때문이겠지요. 특히 '고문' 문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데에 인식을 같이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고문은 안 된다'면서 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코엔은 자기 칼럼 마지막 문단에 이렇게 썼습니다.

"테러뿐 아니라 테러와 싸우는 우리의 방법이 문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