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개발에 종사하면서, 대부분의 인력수급을 홈페이지의 구인란 등을 통해 신규채용한 경험이 있다. 상황에 따라 여러 분야의 스탭을 모집하지만 메일로 날아온 이력서를 뒤적이면서 가장 아쉬움이 남는 경우는 게임 개발기획업무 담당자를 채용할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국내에는 아직 실무에 적합한 개발기획에 대해 가르치는 교육기관도, ‘이것이 필드 매뉴얼이다’하고 내세울만한 좋은 샘플이 공개되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인지, 대부분의 포트폴리오는 실무와는 거리가 먼 시놉시스 수준의 것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담당자의 눈을 오래 끌지 못하고 버려진다(안타까운 일이다)

여기에 포트폴리오로써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나쁜 예를 유형별로 소개하도록 하겠다.
기획서란, 다른 스탭(그래픽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등)들이 받아보고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설계도라는 사실을 명심하며 읽어보시라.


(1) 장황한 시나리오 서술형


안녕하세여… 저는 xxx라고 합니다…
제가 생각한 롤플레잉 게임 기획이 있는데여…….
아직 미완성이지만 꼭!꼭!꼭! 끝까지 읽어보시구…
꼭 게임으로 만들어 주세여…………………………
일단 배경은 SF구여.. 제국의 왕자들사이의 권력투쟁을 소재로 하고 있거등여………….
주인공의 이름은 페카텀 핀트롤이구여.. 제 3왕자거든요.. 형이 두명있는데….
<중략중략중략… 이런 내용이 생각보다 방대해서 파일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있는 경우도 있다>
그 후에 주인공은 황제가 되고 마릴린과 결혼하게 되지여.
아직 미완성인 부분도 많은데 한달내에 꼭 완성시킬거에여.
근데 이 시나리오로 꼭 롤플레잉이 아니더라도 스타크래프트 같은 전략 시뮬을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거든요?
읽어보시고 답장주세요~~ 기다릴께요~~



이 경우는 개발기획과는 거리가 매우 먼 경우이다. 게임에 대한 내용은 한마디도 없고(있어도 매우 단순한 수준) 배경 시나리오를 서술하는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 문서를 가지고 누가 무슨 작업을 할 수 있겠는가?
시나리오라는 것은 컨텐츠의 중점사항, 특화된 엔진 등 보유 아이템을 풀로 활용할 수 있는 소재로 정해져야 정상인데 ‘전략 시뮬을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다’라는 말에서 이미 게임 자체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시놉시스형


제목 : 새로운 방식의 3D MMORPG 기획서
지금까지의 MMORPG는 유사한 방식의 비슷한 게임이 쏟아져 나왔다. 자신만의 특색없이 서로 벤치마킹하여 양산되는 유사 게임들이 시장에 넘쳐 흐르고 있으며, 현재도 수많은 게임이 개발중이다. 이런 게임으로는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되어 기존 스탠드 얼론 플레이 게임의 장점을 취합한 새로운 형태의 MMORPG 개발을 구상하였으며…..<중략>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액션성을 강조하라
    - 기존의 MMORPG는 액션성이 부족하다. 철권이나 소울칼리버 같은 호쾌한 액션을 도입하여 이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예를 들면…..<중략>

2. 방대한 량의 퀘스트를 추가하라
    - 온라인 게임은 새로운 그래픽과 시스템에 익숙해지면 곧 질려버린다. 이것을 헤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너무 많아 다 해볼 수도 없는 량의 퀘스트이며, 현재까지의 MMORPG에서는……..<중략>

3. 그래픽을 화려하게<중략>



이 역시 설계도라 부르기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개발 스타트 이전의 투자유치나 교육용 자료로써나 적합할법한 시놉시스 수준의 문서이며, 그나마도 ‘기존의 MMORPG는 왜 액션성이 부족했을까?’ 등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나 ‘어떻게 하면 방대한 량의 퀘스트를 추가할 수 있을까?’의 대안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섭섭한 내용이다.


(3) 게임 매뉴얼형


……(생략)
[5] 화면구성
        - HP 게이지 : 화면 좌측 상단에 위치. 현재 남은 체력을 표시한다. 0이 되면 게임오버.
        - 필살기 게이지 : 한대씩 맞을 때마다 조금씩 늘어나며, 꽉 차면 필살기를 쓸 수 있다.
        - 상태화면 : 한대 맞을때마다 주인공 로버트 가르시아의 얼굴이 찡그려진다. 우측의 숫자는 남은 댓수를 나타낸다.
        - 타이머 : 남은 시간을 나타내며, 0이 되면 한대 죽는다

[6] 조작키
        - 커서 : 상하좌우 이동한다
        - C : 점프
        - X : 킥
        - Z : 펀치
        - 스페이스바 : 필살기
        - ESC : 메뉴 호출
………………(생략)



이전의 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게임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구체적인 내용이 부족하다. 예를 들어 ‘HP 게이지는 바 형태로 표시되며, 200x20의 크기이다. 1x20당 실제 HP 10에 대응하며 닳은 부분은 빨간색으로 표시된다. 줄어들 때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줄어든다’ 등이 기재되어 있다면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사실은 기획자가 종이에나 포토샵 등을 이용해 스크린샷 예상화면을 첨부해주었다면 더욱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기획자가 구체적인 내용을 기획하지 않으면 두리뭉실한 기획서를 받아든 프로그래머나 디자이너가 구현중심 입장에서 다시 한번 기획을 하게 된다는 것을 유의. 기획서는 항상 구현중심 입장이어야 한다.

생각나는대로 쓴 내용이므로 이 외에도 얼마든지 나쁜 예가 많이 있을 수 있다. 가능하다면 실제 개발기획에 적용된 기획서 예제를 공개하고 싶으나 현재 준비된 것이 없으므로 다음시간에 예제 수준으로 작성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