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을 지난 주에 사놓고 한 주 동안 묵혀두다 아까 다 읽었습니다.

0. 먼저 이야기 하나

[어느 나라의 시장에는 '황금달걀'이라는 특산물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황금달걀은 어떤 닭도 낳을 수 없습니다. 황금달걀은 오직 금칠로 만들어질 뿐입니다.
(물론 몇몇 황금달걀을 낳는 닭이 발견됐습니다만 오래잖아 죽거나, 곧 다시 보통 달걀을 낳더군요.)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진 황금달걀이 모두 같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황금달걀은 더 큰 가치를 쳐주는데,
그것은 금칠이 얼마나 아름답게 되어있느냐, 얼마나 소비자의 마음에 드느냐에 달립니다.

물론 공장에서 금물에다 달걀들을 대량으로 담궈버려서 똑같은 황금달걀을 많이 만들어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달걀들은 어느정도 팔리고 나면 더이상 팔리질 않았습니다.
소비자들은 똑같은 황금달걀에 쉽게 질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원했습니다.
더 큰 달걀이든, 더 잘 생긴 달걀이든, 금칠이 조금이라도 독특한 달걀이든...

그렇기 때문에 황금달걀 상인들과, 금칠을 하는 장인들은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 달걀을 더 잘 팔리게, 사람들이 더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까?

누구는 닭들이 더 큰 달걀을 낳도록, 더 잘생긴 달걀을 낳도록 닭들을 잘 먹였고,
누구는 달걀에 무늬를 넣어서 독특한 금칠을 느낄 수 있게 했고,
누구는 달걀에 금칠만 하느냐며, 다이아몬드 가루를 바를 시도를 했습니다.
심지어 누구는 색다른 달걀, 네모난 달걀, 세모 달걀을 만들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몇몇은 저렴한 황금달걀이면 누구든지 사려 들 것이라 생각하고는
닭들이 더 많은 달걀을 낳도록, 전등으로 낮과 밤을 조작해서 닭들을 혹사시켰죠.)

그렇게 그들은 '소비자들은-사람들은 무엇을 좋아하는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고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느 닭 한마리가 인간들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네는 우리 아이들 팔아먹을 생각만 하지, 애들이 병아리로 자라나게 부화시키지도 않고,
그 아이들 자체의 가치에 대해선 '생각도 안해'. 정말 너네들 너무하다.
그리고 우리들 달걀 많이 낳게 만들려고 너네 별짓을 다하는데, 그 짓도 그만해라.
우리는 닭이라는 동물로서, 스스로 번성할 권리가 있다고!"

이에 대해 사람들은 의견이 갈렸습니다.

"닭들의 종(種)적 권리를 보장해주자. 부화를 돕고, 스스로 번성하게 환경을 만들어주자."

"닭들의 존재 의의는 인류의 영양 공급, 그리고 황금달걀을 만들 달걀을 낳는 것이다.
그 닭 한 마리쯤이야 당장 도살해 먹어버리면 그만이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의견들은, 아니 이 이야기 자체는 문제의 본질에서 비켜간 것일까요?]

진중권은 황금달걀과 금칠한 달걀의 비유를 하고 있는데, 비유는 이해를 돕기엔 좋지만
'이론'처럼 현실을 단순화해야 하기 때문에 역공당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이야기를 조금 달리 써봤습니다.

------------------------------------------------------------------------------------------

1. 진중권은 '원자재라는 콘텐츠'를 변용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철학'이라 불리지 않을,
일반인의 의식/무의식적 사고란(생각이란) '철학'이 작용한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잘 팔릴까?'라는 질문은 '사람들이 어떤 걸 좋아할까?'라는 질문으로
'무엇을 선택할까?'라는 질문은 '나는 어떤 것을 좋아하나?'라는 질문으로 연결되는데,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철학의 근본적 질문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인간이라면 무엇을 좋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철학의 주요 고민이잖습니까?

이 세태에서 철학자들이 걱정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생각이 없음'이 아니겠지요.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여러분은 여느 동물과는 다른 인간적인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라고 사람들을 계몽하고, 설득하는 일입니다.

진중권의 울분도 이해가 갑니다. 달걀을 낳는 기계가 되어버린 양계장속의 닭 신세랄까...
모이도 제대로 안주면서, 전등을 켜고 끄며 낮과 밤을 조작해서는 알을 빨리 낳게 만드는,
그런 세태가 '영양가 없는 달걀'을 낳게 만든다는 그의 지적은 비난 받을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금칠', 즉 '상업화'를 싸잡아 비난하고 있는데, 그 속에서 기능하고 있는 철학과, 그 가능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해야할 것은 생각 없음을 비난 하는게 아니라
'좋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설득하는 일일텐데, 이미 희망을 놓아버린걸까요?
양계장에 갇혀버린 암탉 신세를 스스로 인정하는 걸까요?

------------------------------------------------------------------------------------------

2. 많은 분들이 한국산 상품의 실패 원인을 '철저히 상업적이지 못해서'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상업적'이라는 말을 좀 디벼보도록 하겠습니다.

'상업적'이란 말은 '잘 팔려야 한다'는 것이고, '잘 팔린다'는 말은 '소비자의 선호도가 높다'는 건데
이 '소비자의 선호도'를 높이는데, 즉 좌우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요소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일단 소비자에게 쾌락을 줄 수 있는 정도로 갈린다고 봅시다.
그렇다면 철저히 상업적이어야 한다면, 즉 소비자에게 큰 쾌락을 주는데만 철저하게 전념하기 위해선
우리는 소비자가 스스로 자신의 쾌락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의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누구는 때리고 부수는 희열을 자신의 쾌락으로 생각할 것이고,
누구는 자신이 의도와 기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쾌락이라 생각할 것이고,
누구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듬으로써 '우월감'을 느끼는 것을 쾌락이라 할 것입니다. (니체 - 도덕의 계보학)
무엇이 자기에게 쾌락이 되는지에 대한 답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입니다.
(네. 저는 이에 대한 생각과 고민이 바로 철학이라고 봅니다. 그 얘기는 아까 위에서 했지요.)

그렇다면 여러분께 여쭙습니다. 그럼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콕 찍어 '상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죠?

극단적으로,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이 쾌락을 느낄 수 있으면 많이 필릴 수 있으므로 상업적이라 생각해봅시다.
그걸 만족시켜줄 수 있는 건 아주 원초적인 쾌락, 즉 모두에게 공통된 희열을 줄 수 있는 동물적인 쾌락이라 보는데,
그렇다면 한국산 콘텐츠는 그런 쾌락을 주지 못해서 비상업적인가요? 성공한 콘텐츠는 그러해서 성공했나요?
물론 여기에선 극단을 상정했으니 실상 그렇지는 않겠지요.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그 시기의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을 만족시키는 쾌락'이라 지칭하는 것.
소위 시대적 대세(大勢)를 따르는게 '상업적'이란 말이요, '성공적'이라고 생각해봅시다.
그렇다면 한국산 콘텐츠의 실패는 시대적 대세를 따르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시대적 대세를 따랐어야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란 명제가 도출됩니다.

그렇다면 시대적 대세를 쫓아서 만든 국산 상품들이 모두 성공했나요?
시장은 (경제학자들에 의하면)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에, '대세'로 여겨진 것들은 이미 시장에서 밀려나고
있으므로, 대세랍시고 뛰어들어봤자 기껏 막차를 타거나, 쫄딱 망하기 십상입니다.
(최근 FPS 개발 붐이 그 대표적 예라고 생각하는데...)

대세를 창조해낼 수도 있는 '참신한 시도'는 어차피 실패할테니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해야할까요?
그럼 [괴혼]이라는 괴작은 어떻게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을까요?

나아가 '성공'의 의미로 논의를 확장해봅시다.

대세를 따라 만들었던 70~80년대의 [우주 흑기사]같은 일본걸 베낀 짝퉁 국산애니를
'상업성'이란 잣대로 성공이라 해야 할까요? (물론 돈은 많이 벌었겠죠.)

대세라는 허울을 쓰고 소비자를 속인건 '사기'가 아니라 상업적 성공으로 보고 칭송해야 하는 걸까요?
(어떤 영화를 지칭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립니다.)

즉 무엇을 '성공'이라 해야 할까요? '상업성'을 지니고 있으면, 무조건 성공적인가요?
그때 그때 변화하는 대세적 선호에 흔들리는 '상업성'은 과연 절대적 가치를 갖고 있나요?

그렇다면 시대의 대세에 흔들리지 않는, 영속적인, 본질적인 '상업성'의 요소는 무엇일까요?
그야말로 때리고 부수는 원초적인, 동물적인 쾌락의 충족이 소비자의 선호도를 드높입니까?
아니면 이성적 사고로 당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서사(이야기)구조와
새로운, 미지의 것에 대한 인간 본연의 동경이 소비자의 선호도를 좌우합니까?

다시말해 '상업성'이란 특질에는 '인문/철학'적 기반이 자리하고 있다고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 논리적으로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전개인데, 태클 환영합니다. 저는 '만들어지고 있는 인간'입니다.

------------------------------------------------------------------------------------------

3. 개인적으로 국산 상품의 실패 원인을 저는

1) 사람이 공히 무리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부드러운 '서사(이야기) 구조'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어딘가 어색한, 앞뒤가 안맞는, 우격다짐 구조, 그리고 전혀 흥미를 자아내지 못할 뻔한 구조를 제시하며,
'국산이니 봐달라'고 읍소하기 때문.

-> 이건 제작자들의 문학적 소양 부족, 철학적 소양 부족 때문입니다. 진중권에게 일리가 있습니다.
    나아가 영상매체 제작에 있어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글과 영상은 다르잖습니까?
    타자 이영도씨가 애니메이션 제작을 한다면 절대 저는 그 성공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2) '설득력 있는' 새로운 시도를 하지 못하고, '상업적'이기 위해 대세를 따르려 시장에서 검증된
외국(특히 일본)의 구조를 그대로 따다가 제시하기 때문에 그 밥에 그 나물인 상품을 만들기 때문.
'국산'이라고 내세우면 똑같은 것 보다는 '새로운 것'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이를 만족시키지 못함.

나아가 시장이 충분하게 성숙되어있지 않아서 이익을 내는 것이 최우선시되다보니
세세한 부분에 세심하게 신경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제작자들에게 주어져있지 않음.
양보해서, 모방을 통해서 어느 정도 산업의 기반을 닦아 놓더라도 계속 돈을 벌려고 하지, 여유를 주지는 않음.

-> 이윤을 최우선시하는 세태를 공격할 기반이 됩니다.

이렇게 두 가지로 봅니다.

물론 화면상에서 이야기를 진행해가는 작업은 글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이 시행착오의 경험들이 지식화되어 전수되지 못한채 사라진다면,
경험이 아무리 많아봐야 소용 없습니다. 지금까지 실패한 국산 상품을 제작한 사람들이 후속작으로
성공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한 건, '실패한 사람'을 믿지 않는 세태 때문이겠죠.

------------------------------------------------------------------------------------------
<밤 늦게 이런 잡문을 쓴 이유>

1. '상업성'이란 말은 '성공', 혹은 '대세'와 동의어인가? 실패에 대해 처방할 만병통치약인가? 라는 불쾌함.

2. 진중권의 주장에 공감하는 바와 공감할 수 없는 바를 나름 구분하기 위함.

3. 이미 인터넷을 통해 국내 문화 소비자들이 세계 최고의 문화 상품을 접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국내 생산자들이 아직도 소비자 수준을 핫바지 수준으로 손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음에 대한 조소.
   그리고 놀랍게도 대다수가 그런 핫바지 수준으로 자신들의 수준을 낮춰버린 데에 대한 조소도 추가.
------------------------------------------------------------------------------------------

PS. 댓글 반론 환영합니다. 그러나 반'론(論)'이어야 합니다. 한 두줄 푸념에 대해선 열내지 않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