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간이 큰 줄 알았다. 7년 동안 생사를 넘나드는 오지여행을 하면서, 그리고 지금 세계 곳곳의 긴급구호 현장을 다니면서 간이 많이 커진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얼마 전 금요일에 받은 전화 한 통에 완전히 간이 콩알만해졌다. 사연인즉, 정기종합건강진단 결과를 전화로도 통보해 준다고 해서 전화했더니 담당의사가 면담을 해야겠다는 거였다. “일부러 보자는 걸 보니, 큰 탈이 났음이 분명해.”

그 순간부터 나는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펴고 온갖 나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요즘 암에 걸렸다는 사람들 얘기가 유난히 많이 들리던데 그게 무슨 징조인 것 같아 불길했다. 지난주에도 후두암으로 죽은 친구 오빠 문상을 다녀왔다.

기가 막혔다. 이럴 때마다 나오는 오래된 버릇, 혼자서 또다른 나와 말을 주고받는다. ‘만약 얼마 못 산다고 하면 억울해서 어쩌지.’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여태껏 건강하고 재미있게 산 것에 감사해야지.’ ‘억울하지. 못 다 핀 꽃 한 송이지.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나 할 수 없네. 이제는 사는 날까지 하고 싶은 일을 하다 가는 수밖에.”

그리고는 아예 수첩을 꺼내 본격적으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년 남았다면 직장을 그만두고 꼭 하고 싶었던 백두대간과 전세계 6천m급 산들을 올라야지. 종횡무진 다닐 거다. 누워서 죽음을 맞을 수는 절대 없지. 6개월 남았다면 어떻게 할까 긴급구호 현장으로 가야지. 될수록 최전선에. 3개월 남았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장근무 아이디어는 정말 좋다. 산사나이가 고스톱 하다가 죽고 싶을까 산에서 죽고 싶을 거다. 전투기 조종사가 사우나 하다가 죽고 싶을까 전투기 조종하다가 죽고 싶을 거다. 나도 마찬가지다. 죽기는 싫지만 죽어야 한다면 나 역시 현장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죽고 싶다.

딱 한달 남았다면 책을 써야겠다. 전부터 꼭 쓰고 싶었던 ‘어린이 바람의 딸’, 한국이라는 새장에서 나와 세상이라는 넓은 창공으로 날아보라는 말을 꼭 하고 싶다. 세상을 처음 만나는 아이들에게 세상은 경쟁이나 학습의 대상이 아니라 어울려 살아야 할 친구이자 이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더불어 이런 세상에서 살려면 마땅히 져야 할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도.
온갖 시나리오를 썼다 지우면서 기나긴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떨리는 마음으로 병원에 갔다. 담당의사는 위산과다에 간 기능이 약하니 조심하라며, 전화로 말하면 그냥 흘려들을 것 같아서 직접 만나 당부하는 거란다.

‘시한부 인생’ 해프닝은 이렇게 싱겁게 끝났지만 덕분에 예상치 않은 수확이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긴급구호활동, 산, 그리고 책을 쓰고 권하는 일. 이게 현재의 내게는 정말로 중요한 일이다. 그동안 머리로 생각하는 우선순위와 저 깊은 무의식 속의 우선순위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신기하다. 이 일들을 할 때 내가 가진 어떤 힘도 아끼지 않을 자신이 있다. 끝까지 물고 늘어질 자신도 있다. 나 좋아서 하는 일인데 세상에도 도움이 되니 다행이다. 이 일말고도 내가 기꺼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세상에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 살고 싶다.

마음졸이던 그 주말의 긴장이 가시지 않았는지, 어제 저녁 일기를 쓰면서 또 엉뚱한 상상을 했다. 만약 내게 남은 시간이 딱 하루라면 어떻게 할까.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이라면, 산에 가서 아름다운 봄 산을 마음 가득 담아 올 거다. 저녁에는 일기장을 정리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 동안 즐거웠다고 전화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아침 일찍 투표하러 갈 것이다. 거미줄도 모이면 사자를 묶는다고 했다. 거미줄보다 힘없는 내 한 표지만 새로운 역사와 세상을 펴는 데 그 힘을 보태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살았던 그런 세상을 그대로 넘겨줄 수는 없지 않은가


출처 : 한겨레 신문
한비야 월드비전 긴급구호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