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李昌鎬)는 솜방망이다. 그를 처럼 만난 기사들은 그에게 패하고도 거의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지긴 졌으나 그저 그렇다고 느낀다. 그러나 몇번 더 만나게 되면 한발 한발 거리를 좁혀오는 李昌鎬로부터 공포 비슷한 전율을 느끼게 된다. 냄새 하나로 천리를 쫓는 끈질기고도 완벽한 추적자처럼 그는 거의 목표를 놓치는 법이 없다.
천재들은 대개 화려하고 빠르다. 신출귀몰할 뿐 아니라 파괴력도 좋다. 그들은 상대에 따라서는 아주 간단히 이긴다. 그러나 李昌鎬는 상대가 누구든 비슷한 방법으로 승부한다. 아무리 약한 상대라도 호랑이가 토끼를 잡듯 정성을 기울이고 실제로 굉장히 어렵게 이긴다. 대신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도 점점 강해진다. 李昌鎬는 왜 수많은 승부스타일 중에서도 이처럼 형극(荊棘)에 가까운 방식을 채택했을까.
그래도 이창호는 계속 이긴다. 조금은 부끄러운듯 조금은 미안한듯한 표정으로 온갖 신기록을 세우면서 바둑계를 초토화시켜왔다. 막강한 스승 조훈현 9단과는 2001년 6월 13일 현재 161승 107패. 조치훈 9단과는 공식전적 6승 1패. 중국의 마샤오춘(馬曉春) 9단에겐 16승 3패. 유창혁 9단에겐 77승 38패.
이창호는 신산(神算)이라고 불린다. 남들이 계산하지 못하는 중앙의 희미한 그림자까지 계산해내는 그의 특이한 능력은 신산이라는 별명이 과분하지 않다. 돌부처라는 별명도 있다. 희노애락을 모르는듯 무덤덤하기 짝이 없는 그의 대국자세에 잘 어울리는 별명이다. 이창호는 강태공이라고도 불린다. 아무리 불리해도 결코 옥쇄나 자멸을 택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다리는 그의 자세는 곧은 낚시로 때를 기다리며 평생을 보낸 강태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창호를 능구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무협지 식으로 흑도(黑道)의 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수읽기에 몰입하면 입을 약간 벌린채 눈은 흐릿하여 바보스럽기까지 한 이창호. 그를 생각하면 오랜 세월 검은 연기가 뭉클거리며 솟아오르는 깊은 땅속처럼 점점 더 그 속을 알길이 없게 된다. 그리하여 李昌鎬는 백도(白道)의 고수가 되지 못하고 흑도의 고수가 되고 말았으나 바둑판을 떠났을 때 언뜻 그의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웃음은 수줍고 천진난만하기 그지없다.
1990년대 중반의 어느날 한국기원에서 李昌鎬는 낯선 중년의 5급바둑과 대국을 하고 있었다. 1년에 100국이 넘는 살인적인 대국에 시달리는 李昌鎬인지라 바둑계 인사들은 아무리 친해도 대국을 요청하지는 않는다. 이 대국은 필시 무슨 사연이 있겠거니 했다. 그런데 이창호는 그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했다. 알고보니 바둑을 두자는데 거절하기 어려워서 진땀을 흘리며 한판 했던 것이다.
그런 李昌鎬를 전대 고수(前代高手)의 환생(還生)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도 있다. 李昌鎬는 불가사의하게도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련한 승부사들보다 수양이 더 깊어보이고 승부호흡도 그들보다 느릿하다. 그 호흡은 실로 장구(長久)하여 때로는 아득한 느낌마저 준다. 어찌하여 10代의 소년에게 이런 터득이 가능할 수 있을까. 옛 고수의 환생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점을 설명해줄 수 있을까.
소년도인(少年道人), 외계인(外界人), 신기록제조기, 삼중(三重)허리, 지지않는 소년, 바둑나라에서 온 소년등 李昌鎬는 이외에도 무수한 별명이 있다. 그러나 나는 李昌鎬를 생각할 때마다 초콜렛을 우물거리며 관철동 뒷골목을 팔자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어오던 뚱뚱한 소년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는 이런 식으로 무심히 한국기원에 나타나 1백년만의 천재라는 조훈현 9단의 타이틀을 하나 하나 빼앗아갔다. 프로에 입문한지 불과 10년만에 한국바둑계와 세계바둑무대를 전광석화처럼 석권해 버렸다.

그런데 그 이창호 9단이 2001년에 들어오면서, 정확히 말한다면 2000년 후반기부터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코 흔들릴 것 같지 않은 이창호가 조금씩 혼들리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조그만 흔들림은 일파만파로 영향을 일으키더니 국내바둑계는 물론 세계바둑계조차 돌연 춘추전국시대로 빠져들고 있다. 이창호의 일거수 일투족에 세계바둑계는 비상한 관심을 보내고 그의 부침에 따라 세계바둑계는 흥망이 물결처럼 일어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하여 이 시점에서 이창호 9단을 다시 돌아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는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현재는 어떻고 앞으로는 어떤 길을 갈 것인가. 그것은 곧 세계바둑사의 흐름을 돌아보고 또 예견하는 일이 될 것이다.

<구렁이 태몽과 이창호의 출생>

창호는 75년 7월 29일 아버지 이재룡(李在龍)씨와 어머니 채수희(蔡壽嬉)씨의 차남으로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태어났다. 전주는 백제의 고도(古都)로서 오래된 문화를 가지고 있고 특히 판소리와 합죽선, 음식맛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서 서쪽 해안 쪽으로 50km쯤 가면 부안(扶安)이란 곳이 나온다. 바로 한국 현대바둑의 대부라 할 조남철(趙南哲) 9단과 그 일문이 살던 곳이니까 그의 조카인 조치훈(趙治勳) 9단의 고향도 바로 이곳이라 할 수 있다. 또 전라남도에선 조남철의 뒤를 이어 1인자가 된 김인(金寅) 9단과 조훈현(曺薰鉉) 9단이 태어났으니 이곳 호남지역에서 한국바둑 4대의 1인자가 모두 나온 셈이다.
창호네 집은 전주시의 번화가인 중앙동에서 이시계점(李時計店)이란 금은방을 했는데 특별한 산업이 없는 전주에서 이세계점은 굉장한 알부자로 소문나 있었다.
창호의 할아버지 이화춘(李花春)씨는 해방전부터 만주에서 귀금속을 취급하는 상인이었는데 변함없는 신용과 놀라운 근검절약으로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창호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매우 컸다. 체중이 4.8kg이나 나가는데다 머리가 매우 커서 어머니가 출산 때 무척 고생을 했던 모양이다. 결국 의사는 기계를 사용하여 창호를 출산했는데 그바람에 창호의 머리 윗부분이 길죽해졌다는 얘기도 있다.
창호를 낳기 전 어머니는 태몽(胎夢)을 꾸었다. 큰 가마솥에 가득 밥을 하고 있는데 밥이 다 됐나 보려고 뚜껑을 열었더니 그 안에 엄청나게 큰 구렁이가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구렁이는 재물을 상징한다고 하니 해몽대로라면 창호는 미리부터 재물을 안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타고난 우량아 이창호>

아버지 이재룡씨는 아들만 3형제를 두었다. 두살 위의 형 광호(光鎬)와 창호, 그리고 한살 아래의 동생 영호(永鎬). 이들 3형제는 모두 우량아였다. 형 광호는 중학교 2학년 때 이미 180cm가 넘었고 동생도 나중에 키가 181cm까지 컸다. 그러나 창호는 겨우 171cm에 멈췄다. 3형제중 누구보다 우량했던 창호가 형제들보다 작아진 이유는 바로 창호가 어려서부터 바둑과 씨름한 탓이라고 볼 수도 있다.
창호는 유복한 환경에서 무엇이든 잘 먹고 잔병치레 한번 없이 자랐다. 단지 체격이 너무 커서인지 열이 자주 올랐고 식욕이 좋다보니 자주 체했다고 한다. 77년 2월, 그러니까 두살때 창호는 동네사람들의 권유에 밀린 아버지와 함께 우량아대회에 나갔다. 지금은 사라진 풍속도지만 당시만해도 분유회사들이 주최하는 우량아대회는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꽤 인기가 있었다. 창호는 전북지역의 우량아로 뽑혔다. 전북대표로 전국대회에 나가서도 2위를 했다.
이것이 창호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받은 상이었다. 훗날 창호는 매년 1백국 정도의 대국을 계속하면서도 지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국 때는 거의 초읽기까지 갔으며 집에 가서도 복기를 반복했다. 이런 강행군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그의 실증을 모르는 독특한 성격이나 정신력 탓이겠지만 어릴 때부터의 체력도 크게 한몫 했음이 틀림없다.
창호의 부모들은 창호에 대해 물으면 첫마디가 "고집이 지독히 셌다"고 회고한다. 순하고 누구보다 잘 참고 모기소리로 말할 정도로 부끄럼 잘 타던 소년시절의 창호와는 전혀 다른 어린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네살 때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도 막무가내의 고집을 부리며 장남감을 사달라고 조르는데 어머니가 한사코 안된다고 하자 창호는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가게 입구의 커다란 진열장을 향해 몸을 던졌다고 한다. 유리창이 깨지고 창호는 왼쪽 동맥이 끊어지는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때의 흉터자국이 지금도 남아있다.


<속으로 뜨거운 고집쟁이 이창호>

소년 시절의 이창호 바둑은 조훈현의 화려함에 비해 들꽃처럼 소박하기만 했다. 조훈현이 바람과 같은 스피드를 지녔다면 그는 소처럼 느렸다. 조훈현이 불이라면 그는 물이었다. 하지만 그 속 저 깊은 곳에선 불길이 이글거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중에 그의 유년시절의 얘기를 들었을 때 이같은 느낌은 더욱 확연해졌다. 창호는 남에게 뒤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으며 한번 고집과 오기를 세우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아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왜 훗날 판 위에 나타난 이창호의 바둑은 그리도 신중한 것이었을까. 이런 물불을 가리지 않는 고집은 어디로 숨어서 그토록 조심스럽고 심지 깊은 외관을 드러내는 것일까.
"시훈(時熏)이하고 창호가 함께 식사를 하면 시훈이는 반찬이 떨어질까봐 자꾸 안으로 모으고 창호는 밖으로 밀어내곤 했어요."
프로기사로서는 창호의 첫번째 스승이었던 전영선(田永善) 7단은 이렇게 회고한다. 공격적이고 호탕한 기풍을 갖게된 유시훈 7단과 신중성의 극치고 불린 이창호의 숨은 일면이었다.
창호는 초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때 할아버지로부터 바둑을 배우게 된다.

<이창호 IQ는 139>

한국에서는 많은 어린이들이 숨가쁜 하루를 보낸다. 유치원이나 유아원 말고도 피아노, 미술, 태권도, 속셈, 영어, 산수, 무용, 수영등을 2, 3개씩 배우는데 이창호 이후 바둑도 그 많은 종목 중의 하나가 되었다. 바둑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올라갔다는 증거인데 이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趙治勳, 曺熏鉉, 李昌鎬 3명의 영향이라고 봐야한다. 80년 조치훈의 名人 쟁취와 89년 조훈현의 應氏盃 우승, 90년대 이창호의 등장은 정치에 식상한 시민들에게 매우 신선한 뉴스였다. 조치훈 때는 신문마다 1면에 큰 제목을 달았고 조훈현 때는 사설과 만화에까지 등장했다. 구식의 카퍼레이드도 한국에선 조훈현 9단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놀이차원의 한국바둑을 끌어올려 바둑TV와 대학의 바둑학과를 만든 세계최초의 나라로 변모시켰다. 그러나 젊은 부모들을 가장 많이 자극한 것은 역시 어린 이창호의 성공이었다.
부모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창호에게 어떤 특성이 있었고 그에 비해 내 아이들은 어떤지 비교해보고 싶어했다. "이창호는 뚱뚱했다" "이창호는 보통 아이들과 별 다른 점이 없었다" 등의 얘기가 보도되면서 그렇다면 우리 아이도 바둑을 시켜보자는 부모들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아닌게아니라 창호는 고집은 셌으나 친구들과 어울려 잘 노는 쾌활한 소년이었다. 훗날 거의 말이 없어진 때도 있었지만 어렸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비상한 행동이나 특성을 보인 것은 없었다. 수리(數理)에 밝은 편이라 머리가 좋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고등수학도 척척 풀어내는 신동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다만 다섯살 때인가, 집안 어른들이 놀란 사건이 한번 있기는 있었다. 당시 여러가지 색깔로 되어 있는 정육면체의 블록을 맞추는 놀이가 유행이었는데 거기에는 어떤 일정한 공식이 있었다. 공식을 알면 어른들의 경우 4, 5분 정도 걸리고 공식을 모르면 시간이 마냥 걸리는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창호는 블록을 처음 보았는데도 불과 2분 정도에 그걸 맞췄다고 한다. 물론 그 당시는 우연이겠지 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이창호바둑은 서부영화에 나오는 인디언 추적자처럼 사소한 단서도 놓치지 않고 미로를 찾아나서는 특성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일은 우연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집안이 유복한 편이었던 창호는 집에서 1km쯤 떨어진 명문 사립학교에 간단한 시험을 거쳐 들어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 검사한 IQ는 139였다. 좋다면 좋은 편이지만 천재라고 분류되는 어린이의 IQ하고는 거리가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바둑을 배우다>

공부는 잘하는 편이어서 반에서는 1등을 곧잘 했다. 그러나 이런 정도는 늦게 바둑을 배워 한국바둑의 명문 경기고등학교 때 프로기사가 되었던 홍종현 8단에 비하더라도 어림없는 얘기다. 洪 8단은 노상 술 마시고 바둑이나 두면서도 대학 중 가장 어렵다는 서울대 법대에 가볍게 합격한 사람이 아닌가. 그런 洪 8단도 바둑으로는 '홍소금'이란 별명을 남겼을 뿐 큰 명성을 남기지는 못했으니 이창호의 IQ나 공부실력등은 그냥 한번 알아보는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미 밝혔듯이 창호는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할아버지로부터 바둑을 배웠다. 1983년, 만 8살 때였다. 할아버지는 이 당시 가업인 귀금속점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친구들과 바둑으로 소일을 하고 있었다. 전주기우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바둑실력은 아마추어 5급 수준.
그날은 방학이라 집에 있는데 할아버지가 친구들과 온종일 바둑을 두고 있었다. 방안을 들락거리다가 우연히 어깨너머로 바둑판을 기웃거리던 창호는 흰돌과 검은돌을 나눠 갖고 진지하게 몰입해있는 어른들의 모습에서 호기심을 느꼈고 결국 할아버지에게 바둑을 가르쳐 달라고 조르게 됐다.
할아버지는 좀더 크면 배우라며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으나 창호는 미리 말했던 것처럼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고집을 지니고 있었다. 창호는 막무가내로 떼를 썼다고 한다.
시간이 많은 할아버지와 고집 센 손자는 이렇게해서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됐다. 이 대목에서 이창호 9단과 대화를 나눠보자.

- 바둑을 처음 대했을 때의 느낌은 지루하지 않았나.
"재미있었다. 나도 모르게 점점 빠져들었다."
- 딱지치기나 구슬치기와 비교할 때 어땠나.
"바둑을 배우자 그런 놀이들이 갑자기 시시해졌다. 비교할 수 없는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점점 밖으로 쏘다니는 일이 적어지고 할아버지를 졸라 계속 바둑을 두게 됐다."
- 말이 너무 없어 주위에서 답답한 일이 많았는데 어렸을 때도 그랬나.
"아니다. 바둑을 배우기 전까지는 말도 큰소리로 잘하고 친구들과도 잘 놀았다고 한다. (본인은 정확한 기억은 없었다) 바둑을 배운 이후 점점 말이 없어졌던 것 같다. 성격도 조금 변한 것 같다."

만 9살에 프로가 된 조훈현같은 바둑의 천재들은 어렸을 때 재기가 뚝뚝 흘러넘쳤다. 바둑도 비호같이 빠르게 뒀고 상대가 생각할 때는 호기심으로 이곳저곳 둘러보며 한시도 묵묵히 있지 않았다고 당시의 목격자들은 전한다. 바둑공부 하라면 만화가 보고 싶어 꾀를 내서 도망치기도 했다. 어린아이란 본래 가만히 있으면 답답해서 못배기는 법이며 조금은 까불고 조금은 산만해야 정서적으로 어린이답다고 할 수 있다.
창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무더운 여름방학 내내 바둑판 앞에서 살다시피 했다. 8살의 어린 아이를 강제로 시켜서는 이렇게 만들 수 없다. 창호는 바둑에 무궁무진한 재미를 느꼈다. 그렇게 느끼더라도 이윽고는 싫증을 내는 법인데 창호는 마치 싫증하고는 담을 쌓은듯 바둑에 매달렸다.
이창호의 불가사의(不可思義)는 바로 이 '끈기'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다. 끈기란 괴로움을 참고 견딘다는 뉴앙스가 섞여 있는데 창호는 전혀 괴로움을 느끼지 않았으니 그가 끈기로 싫증을 이겨냈다고 말한다면 틀린 얘기가 된다.

- 정말 싫증이 나지 않았나.
"그렇다. 나중에도 바둑에 싫증을 느낀 일은 없다."

<싫증을 모르는 소년 이창호>

참말일까. 믿을 수는 없지만 참말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싫증을 낸다. 그것은 만고의 법칙이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빠르게 싫증을 낸다. 그러므로 무더운 여름날 남보다 크고 뚱뚱한 소년이 방안에서 바둑만 두고 있는 모습을 더올리면 왜 싫증이 나지 않았을까 의아스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할 때 만약에 싫증이 났다면 이창호란 괴이한 존재 역시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둘사이에는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유창혁 9단은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창호는 잠잘 때도 바둑만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바둑만 생각하고 바둑과 호흡이 딱 맞게 태어난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점점 친해졌다. 창호는 할아버지가 3명의 손자 중에서 특별히 자기를 사랑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바둑 가르치기에 처음엔 소극적이었으나 어느날 갑자기 적극성을 띄기 시작했다. 창호는 한달 후에 할아버지와 9점으로 대국할 수 있게 됐다. 이것도 IQ 139처럼 그렇게 빠른 속도는 아니다. 그러나 젊어서 먼 객지에서 귀금속상을 하며 줄기찬 근검절약과 신용쌓기로 자수성가한 할아버지는 바둑판 앞에 앉기만 하면 묵직하고 줄기찬 모습을 보이는 어린 창호로부터 미래에 대한 모종의 영감을 받았던 것 같다. 자기 손자가 조훈현이니 서봉수 같은 고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앉으면 움직이지 않는 꼬마>

창호네 집 앞에 길을 건너 골목으로 잠깐 들어서면 자그만 건물 2층에 설기원(雪棋院)이란 이름의 기원이 있었다. 창호는 할아버지와 함께 그 기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급 실력(오늘날의 아마5단정도)의 원장과 역시 1급의 이광필이란 사범에게서 바둑을 배우게 됐다. 이들이 이창호의 스승 명단 중 맨 처음 나오는 사람들이다.
돌이켜보면 이창호처럼 스승이 많은 기사도 없다. 徐奉洙 9단에 대한 글을 보면 "그는 낭인처럼 저잣거리에서 혼자 바둑을 배웠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서 9단도 누군가한테 바둑을 배우긴 배웠을텐데 그들을 스승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 뿐이다. 이창호의 경우 진짜 스승은 조훈현이지만 그는 어렸을 때 자기에게 바둑을 가르쳐 준 사람들을 쭉 기억하고 있다. 어떤 측면에선 그들이 창호의 스승으로 남고 싶어하니까 겸손한 창호는 그들 이름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창호도 절대 기억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원에 가면 예나 지금이나 시간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창호는 그들 누구하고나 바둑을 두었다. 10급도 좋고 15급도 좋았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그들에게 자장면같은 기원에서 손쉽게 들 수 있는 식사를 제공하며 감사를 표시하곤 했다.
이리하여 창호의 바둑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학교에서 오후 1시쯤 돌아오면 서둘러 숙제를 끝낸 뒤 3시쯤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설기원에 갔다. 그곳에서 저녁식사 전까지 매일 바둑공부를 했다.

- 기원(棋院)에 가기 싫은 적이 한번도 없었나.
" 그런 기억은 없다. 바둑 두는 일이 행복했다는 느낌 뿐이다. 언제나 할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다녔다.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기원에 가는 일이 좋아서 학교에 있을 때도 기다려지곤 했다." (이창호)

1년 정도 했던 피아노 공부는 그만두었다. 하나도 섭섭하지 않았다. 실력은 빠르게 늘어가고 창호는 '묘한 꼬마'로 인근에 소문이 나게 됐다. 선생한테만 바둑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누구하고나 바둑을 두는 소년. 한번 자리에 앉으면 일어날 줄 모르는 괴상한 꼬마.
" 뚱뚱한 애가 바둑판 앞에 가만히 앉아만 있길래 가끔 일어나 움직이기도 하라고 했지요. 몇번 얘기했더니 일어나 복도의 창문 앞으로 가더라구요. 하지만 금방 돌아와 다시 움직이지 않더라구요."
이창호의 어린 시절에 같이 바둑이라도 한번 두어본 전주(全州)사람들은 대개 이런 말을 한다. 한번 앉으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창호는 1학년이 끝나갈 무렵 할아버지와 맞수가 되었다. 이무렵 할아버지는 창호를 曺薰鉉이나 徐奉洙같은 일류기사로 키우기로 마음 속으로 작정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부모들의 생각은 달랐다. 남들에 비해 바둑을 잘 두는 것 같고 또 이구동성으로 소질이 있다고 말하지만 전문기사란 직업은 아무래도 생소했던 것이다. 바둑을 전혀 몰랐던 아버지 이재룡씨는 막연히 의사나 공학도가 되기를 바랬다. 재룡씨는 검소하며 입이 무겁고 자기 일을 꾸준히 해내는 타입이다. 평범하면서도 견실하고 시종여일해서 오히려 독특한 느낌을 준다. (그는 나중에 창호가 시합이 있을 때마다 全州에서 상경하여 검토실 근처에서 하루를 보내곤 했다. 외국도 같이 갔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어서 대개 혼자 있었지만 창호 주위에서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바둑은 창호의 비밀스런 즐거움>

이재룡씨는 창호가 학교공부도 잘 하니까 괜찮은 직업을 가지고 살면서 바둑은 취미로 하기를 바랬다. 프로기사의 길이 험난하다는 것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사실 80년대 전반만해도 조훈현이나 서봉수 등 몇사람을 제외하면 생활조차 어려운 현실이었다. 공연히 바둑을 시켰다가 이도저도 아닌 상태가 될까봐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달랐다.

- 다른 아이들과는 여전히 잘 어울렸나.
" 바둑만 뺀다면 다른 아이들과 똑같았다. 형제들하고도 잘 놀았고... 그러나 다른 애들은 바둑을 몰랐기에 바둑은 나만의 비밀스런 즐거움이었다." (이창호)

창호는 어떤 종류의 천재들처럼 모든걸 뚝 끊고 미친듯 바둑으로 몰입한 것은 아니었다. 남들이 숨박꼭질이나 딱지놀이를 열번 할 때 창호는 다섯번만 하고 그 나머지 시간을 바둑의 즐거움을 위해 바쳤던 것이다. 이런 측면은 창호에게서 자주 볼수 있는 '모범생(模範生)'의 측면이다. 그의 행동은 절도가 있으며 약속이 정확하고 자제가 배어있다. (지금도 대국이 10시에 시작하면 10시 1분전쯤 시간맞춰 나타난다.)
누가 가르친 것은 아니며 선천적이다. 창조적인 정신과 감각이 특출난 어린 아이들은 대개 발랄한 모습을 보일 뿐 아니라 정해진 노선에서 자주 벗어난다. 창호는 그러나 정해진 코스를 정시에 다니는 열차처럼 모범적이었다.
이 점도 이창호의 불가사의다. 창호는 바둑을 너무 좋아했기에 싫증을 느낄 겨를이 없었고 바둑에 관한한 완벽한 모범생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러나 과연 그게 가능한 것일까.

<첫 스승, 이정옥>

할아버지는 창호를 데리고 기원 순례를 시작했다. 좀더 고수를 만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창호는 곧 全州의 아마추어 최강자였던 이정옥(李廷玉)에게서 바둑을 배우게 됐다. 이론보다는 대부분 실전이었다. 이정옥은 실제로는 창호의 첫번째 스승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는 빠르고 수를 잘내는 소위 재주가 넘치는 바둑이었다. 이정옥은 이렇게 말한다.
" 어림잡아 1천판은 두었을 겁니다. 지긋지긋하게 두었어요."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으나 자유분방한 생활 탓에 프로에의 꿈을 접어버린 이정옥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추억이라면 바로 이창호다. 그에게 창호의 특징에 대해 물으면 "묘한 친구"라며 금방 눈꼬리가 가늘어지고 목소리가 떨려온다.
" 묘해요. 바둑이 끝나고 이 부분에 수가 있는데 아느냐고 물으면 다 아는거에요. 아는데 왜 안 두었냐고 물으면 대답도 않고 가만히 있는거에요."
전주 출신의 프로기사이자 한국기원의 술꾼으로 유명한 田永善 7단을 만난 것도 이무렵이다. 프로기사로는 그가 첫 스승인 셈이다. 田 7단은 한때 밤만 되면 바지 뒷주머니 두곳에 소주를 한병씩 넣고 다녀 '쌍권총'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바람에 몇번이나 병원에 입원했고 의사로부터 술을 더이상 마시지 못한다는 경고를 받은 상태지만 지금도 기회만 있으면 핑계를 대고 술을 마시는 바둑계의 기인(奇人)중의 한명이다.
바둑수법에서도 국지전(局地戰)이나 수내기, 사활등에 아주 강해 프로세계에서 '전류(田流)'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田流'란 다름아닌 급소와 맥을 짚어 상대를 순식간에 꼼짝못하게 하는 수법을 일컫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는 암수의 대가였다. (전영선은 적당히 집이나 지어 이기는 바둑을 바둑도 아니라며 일갈하곤 했다) 이정옥도 그랬지만 전영선은 아마추어 시절 내기바둑의 달인이었다. 창호에게서 얼핏 '흑도(黑道)'의 냄새가 아는 것은 바로 이 田流의 영향 탓일지 모른다.

<싸움을 피하는 이창호>

田 7단에게 창호는 6점을 놓고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田 7단은 서울에 살고 있었지만 할아버지의 요청을 받아 매달 한차례씩 전주로 내려와 창호를 지도하고 갔다. 훗날 정선(定先)칫수가 될 때까지 1백 50판 이상을 가르쳐 주었다. 이창호에게 다시 물어보자.

- 전영선 7단에게 바둑 배울 때 술 냄새는 나지 않았나.
" 그때는 술이란게 있는지를 몰랐다."
- 田 7단과 이정옥씨에게서 무엇을 배웠다고 생각하는가.
"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분들은 싸움이 강하고 수를 잘 내는 특징이 있다. 당하지 않으려고 무척 고심했던 기억이 있다."
- 전 7단의 얘기를 들으면 그때도 이 9단은 수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 수내기를 겁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수를 내려면 그 과정이 복잡하니까 자신이 없었다. 바둑이 많이 불리해서 꼭 수를 내야 할 경우가 아니라면 그냥 참곤 했다."
- 그런 스타일은 전 7단하고는 정반대인데.
" 복기할 때 지적을 당하곤 했지만 어쩌면 나는 체질적으로 수내기를 좋아하지 않는 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포석이나 대세관이 약하고 부분전투와 미세한 수읽기에 강한 것을 보면 은연 중 그분들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창호의 재능은 田流와 이정옥이 보여주는 온갖 수법(속칭 꼼수에 이르기까지)을 흡수하고 있었다. 훗날 그가 많은 묘수를 보여준 것도 연원은 여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좀더 중요한 점이 있었다. 수를 보면서도 수를 내지않는 이창호. 복잡한 것을 싫어하면서도 바둑이 너무 재미있어 한번도 싫증을 느끼지 못한 이창호가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그렇다면 창호는 그 수많은 대국시간에 무엇을 주로 생각했을까. 창호는 그때부터 줄곧 계산으로 이기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을까.
이율배반이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면서 어찌 바둑에 남보다 몇배나 더 깊이 매료될 수 있을까. 어른들도 수를 보았다 싶으면 반드시 써먹고 싶은 법이다. 어린아이들은 수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다. 그런데 창호는 수를 보면서도 수를 내기를 싫어했다. 고수라면 또 모른다. 아직은 하수의 어린이에게 왜 이런 마음이 생겨날 수 있을까.

<유시훈과의 인연>

전영선 7단은 어렸을 때 장래가 촉망되는 기재(棋才)넘치는 기사였으나 술과 기행 때문에 소성(小成)에 그치고 말았다. 승부사라기 보다는 낭만적인 성향이 짙고 파격(破格)을 좋아했다. 따라서 그는 집만 짓고 싸우지 않는 바둑을 무척 싫어했다. 폼만 좋고 이전투구(泥田鬪狗)를 겁내는 그런 바둑을 화초(花草)바둑이라고 경멸했다.
기세를 소중히 여긴 탓에 "끊지 않으면 바둑도 아니다. 그렇게 비겁하게 두어서 이기면 뭐해."라고 외치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창호는 이런 가르침을 무수히 들어야했다. 하지만 창호는 여전히 싸움을 피했고 끊기를 두려워했다.
이 대목이 이창호가 지닌 또 하나의 비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복잡하고 자신이 없어서 싫었다."고 창호는 말하고 있다. 이건 전 7단의 주장에 따르면 화초바둑의 전형적인 증세가 아닌가. 전통바둑교육은 소년들에게 전투를 장려한다. 전투 속에서 난관을 극복하는 힘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소년들은 전투를 즐긴다. 그러나 창호는 상대의 공격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싸우는 경우를 제외하고 자신이 스스로 공격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이점 때문에 전 7단은 반신반의했다. 창호는 승률도 좋고 빠르게 늘고 있었다. 그러나 전 7단의 눈에 비친 창호는 너무 견실하여 모험심이 부족해 보였다. 아는 길로만 가려했다. 그래서 '이녀석에게 진정으로 재능이 있는 것인가'하고 의심하기도 했던 것이다.
2학년 여름방학 때 창호는 해태배 전국어린이바둑대회에 출전하게 됐다. 바둑돌을 잡은지 1년만에 전영선 7단을 따라 서울의 대회에 처음으로 얼굴을 내민 것이다. 이 대회에서 창호는 16강전까지 진출했으나 당시 6학년 학생이던 유시훈(柳時熏)에게 패배하고 만다. 유시훈과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16강전에 떨어졌으나 16강 중 가장 어렸던 창호는 장려상을 받았다. 또 전영선을 따라 한국기원이란 곳을가서 전라북도 출신의 프로기사들과 5점으로 대국해서 몇번을 이기기도 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창호를 칭찬하고 격려했다. 그렇지만 창호는 시종 대회에서의 패배를 잊을 수 없었다. 고향에 돌아온 창호는 더욱 열심히 바둑공부에 매달렸다. 그리고 그 바둑에서 왜 졌는지 몇번이고 놓아보며 따져봤다. 정말 꿈속에서도 바둑이 어른거렸다.

<우물안 개구리 시절>

대회에서의 첫 패배가 창호에게 끼친 영향은 심대했다. 선생님들에게 지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이 패배는 견디기 힘든 아픔을 남겼다. 시골에서 어른들의 칭찬만 받고 살다가 이제는 자신보다 강한 어린이가 많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전에는 재미로 바둑을 두었지만 이제는 '승리'라고 하는 하나의 목표가 추가되었다.

- 그때 진 6학년 학생이 유시훈인지 알았나.
" 몰랐다."
- 그 바둑을 몇번이나 놓아봤나.
" 정확히 기억은 없지만 왜 졌는지 궁금해질 때마다 이기는 길이 없을까 하고 복기를 해보곤 했던 것 같다."

이무렵부터 창호는 밤 12시가 넘도록 기보를 보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여러번 말렸지만 창호의 황소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훗날 이창호는 늦은 밤부터 시작하여 새벽2시가 넘도록 공부하게 됐는데 이유를 물으면 "밤이 깊어지면 머리가 맑아져요. 12시부터 진짜 공부를 하는거죠. 어릴 때부터의 습관이거든요."했다. 그 습관이 이무렵 시작된 것이다.
실전을 주로 하던 창호는 이제 바둑책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다. 바둑책은 창호에겐 신비스런 동화책과 같았다. 책장을 열면 무한한 세계가 펼쳐졌다.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기기묘묘하고 형형색색의 스토리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창호는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잔칫날 친척들과 아이들이 와글와글 모여들어도 창호는 전과 달리 이내 자기방으로 들어가 바둑책에 몰입했다.
자연 말 수가 적어졌다. 머리속은 온갖 도형으로 가득해서 누군가 말을 걸어와도 딴 생각때문에 알아듣지 못할 때가 허다했다. 잠드는 시간이 조금씩 늦어졌다. 늦게 일어났다.
해가 바뀌어 84년 1월. 육영재단에서 주최하는 어깨동무 어린이바둑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이 대회 최강부 결승에서 창호는 유시훈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것이 창호의 생애 첫 우승이다. 바둑을 배운지 1년반 만의 일이고 첫 패배를 맛본지 5달 뒤의 일이었다.


<9살 떄의 생애 첫 우승>

- 기뻤나.
" 매우 기뻤다." (이창호)

이런 우스꽝스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이창호에게도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희노애락이 있을까 가끔은 의심이 들곤하기 때문이다.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 또 있다. 어린 창호는 승리에 대한 욕구, 또는 농도가 어느 정도였을까. 어렸을 때 그의 눈빛은 거의 흐리멍텅한 쪽에 가까워서 안광(眼光)이 파랗게 살아있는 일류 승부사들의 투혼 같은 것은 손톱만큼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바둑을 지고 운 적이 있나.
" 그 자리에서 운 일은 없다. 그러나 나중에 사람들이 안 볼 때 운 적이 몇번 있다." (이창호)

아이들은 울려면 바로 운다.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는게 보통이다. 창호는 나중에 혼자 울었다.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바둑을 계속 생각하고 있고 다른 것은 듣지도 보지도 않고 있기에 패배의 아픔도 여간해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당장에 울지 않는 것은 부끄러움이 심한 성격에다 참을성은 한없이 강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해 4월, 전영선 7단의 소개로 창호는 조훈현 9단을 만나게 된다. 운명적인 순간이었지만 바둑의 최고수를 처음 본 그 장면을 창호는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田 7단은 오래전부터 "창호는 내가 가르칠 재목이 아니다. 최고수인 조훈현에게 보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그러나 연일 수많은 도전자들과 싸우는 전성기의 조 9단으로서는 제자를 돌본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또 창호는 어린데다 집이 시골이니까 일본 식의 내제자(內弟子)가 아니고는 방법이 없는데 曺 9단은 좁은 집에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형편인지라 이것도 고민거리였다.

<조훈현 9단과의 운명적인 만남>

창호는 3점을 놓고 지도대국을 받았다. 이 첫 대면에서 조 9단은 뭉툭하게 선이 굵은 창호의 바둑과 창호의 뚱뚱한 몸집에서 큰 감흥을 받지는 못했다. '전주의 신동'이라고 田 7단이 입이 마르게 칭찬하는 바람에 내심 욕심을 냈던 것이지만 曺 9단의 감각으론 이 소년의 지나친 신중성과 느린 행마에 일말의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부드러운 바람, 빠른 창'이란 말로 묘사되는 조훈현의 특징은 누구도 따라잡기 힘든 스피드, 즉 속력행마(速力行馬)에 있다. 훗날 曺 9단의 과속(過速)은 이창호라고 하는 교통순경에 걸려 번번히 딱지를 떼게 되고 이로부터 조 9단의 바둑은 자꾸만 격렬해져 '부드러운 바람'이란 본래의 특징도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이무렵의 조 9단은 '제비'라는 별명 그대로 몸은 호리호리하고 평소의 걸음걸이는 쫓아가기 힘들만큼 빠르고 바둑의 행마는 비호같았다.
조 9단은 본질적으로 스피드를 중시하는 사람인데 창호는 첫인상에도 자신과 정반대였다.
한달 쯤 뒤에 조 9단은 전영선 7단, 홍종현 8단 등에 이끌려 전주로 갔고 이때 두번째 대국이 이루어진다. 필자도 동행했던 기억이 있다. 같은 3점이었으나 이번엔 창호가 이겼다.
그 한달 사이에 창호는 조 9단의 바둑을 더욱 열심히 파고 들었다. 그 탓이었을까. 조 9단은 창호로부터 늑골을 파고 드는듯한 인상적인 힘을 느끼고 흠칫 하게된다. 그는 이 소년을 다시 봤다.
몸은 뚱뚱하고 피부색은 약간 검고 눈은 졸린듯 멍하다. 뭘 물으면 눈을 아래로 내리 깔고 모기소리로 달싹인다. 적어도 조 9단이 아는 기재(棋才)에 이런 스타일의 인물은 없었다. 단아한 외모에 낭랑한 목소리를 지닌 우칭위안(吳淸源) 9단, 칼같은 눈빛으로 내면의 뜨거움을 토해내던 사카다(坂田榮南) 9단. 은장도같이 서늘한 이시다(石田芳夫) 9단······.
그런데 이 소년은 어눌한데다 가끔 복기마저 틀리지 않는가. 그렇다면 조금전 옆구리를 파고 들던 강인한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


<반신반의하는 조훈현>

창호에 대한 曺 9단의 인상은 모호했다. 그는 全州의 시험기(試驗棋) 직후 어떤 섬광과 같은 영감에 이끌려 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창호에 대한 많은 것들이 안개속에 쌓인채 모호하게 남아있게 된다.
한강 서쪽의 화곡동에 살던 曺 9단은 서둘러 강북의 연희동으로 이사했다. 창호를 위해 좀 더 넓은 집이 필요했고 또 아내 정미화씨로서는 출산이 임박해서 급히 결정을 내렸다.
이사한지 2주 후 曺 9단의 아내 정미화(鄭美和)씨는 1남 2녀중의 둘째인 딸을 순산했다. 3일 후 그러니까 1984년 8월 16일 창호가 이사왔다. 이창호와의 대화.

- 스승을 대했을 때의 느낌은.
" 내가 워낙 느린 탓인지 선생님은 참 날렵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꼭 한번 선생님을 따라 등산을 갔는데 내가 너무 느려 거의 산을 오르지 못하고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 집을 떠난 생활은 어땠나.
" 나는 어려서 과보호를 받고 자란 탓에 겁이 많고 모든게 서투른 편이었다. 밤엔 너무 무서워 할머니, 할어버지와 함께 잤다."

창호의 방은 이층에 아련됐는데 잠 잘 때는 조 9단의 노부모, 즉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잤다. 정미화씨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절대 말썽을 피우는 일이 없는 아이였다. 만 7년 있는 동안 발소리 한번 크게 내지 않았다. 묻기 전엔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겁이 많아서 나중에 혼자 자게 된 뒤에도 불을 켜고 문을 열어둔 채 잠들곤 했다. 처음엔 잘 몰라서 불을 꺼주곤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불이 다시 켜져있곤 했다."
" 일상의 일에 그처럼 무심한 아이는 드물 것이다. 운동화 끈이 풀어져도 다시 맬 줄을 몰랐다. 끈이 걸려 불편할텐데도 누군가 매주기 전엔 그냥 다녔다."


<호랑이 새끼를 받아들이다>

이런 아이가 스스로 서울에 가겠다고 나선 것은 참 신기하다. 창호의 할아버지는 창호의 서울행에 열심이었지만 바둑을 모르는 부모들은 걱정이 된 나머지 은근히 창호가 서울에 가지 않겠다고 말할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창호는 정해진 코스를 걷듯 묵묵히 내제자의 길을 선택했다.
창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교대로 서울에 올라와 선생님의집에 묵었다. 첫 일년은 근 200일 정도는 올라와 머리도 감겨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외식도 시켜주고 했다. 창호네 온가족이 창호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고 봐야한다. 정미화씨는 3살짜리 아들과 갖 태어난 딸을 키우고 노부모를 모셔야하고 대국 때는 남편의 운전수 역할도 해야했다. 여기에 창호가 함께 살게 된 것인데 앞서 얘기했듯이 창호는 세상에 말이 없고 말썽피우지않는 아이였으니 정씨에겐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리하여 한국바둑계의 호랑이 조훈현과 잠룡(潛龍) 이창호의 한집안 동거가 시작됐다. 이들 사제가 불과 몇년 후에 타이틀을 놓고 치열하게 맞서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미화씨 역시 이 소년이 장차 남편의 타이틀을 모두 가져가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曺 9단이 한국최초로 내제자를 받아들였다는 소식은 신문에도 크게 보도됐다. 동료들이 농담삼아 "호랑이새끼를 키우는 것 아닌가."하고 놀리면 조 9단은 "제자에게 지면 행복하지.(내가 질 때까지는)그래도 10년은 걸릴 것 아닌가."하며 웃었다. 10년은 고사하고 불과 5년만에 사제간의 대전쟁이 벌어질 줄은 曺 9단은 물론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창호는 이화여대 부속국민학교로 전학하여 3학년 2학기를 맞이했다.

<비행기가 싫은 이유>

이 학교는 명문대학의 부설학교답게 교육이 엄했다. 바둑이 목표인 창호라 하더라도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에 나가야했다. 창호는 곧 한국기원 연구생에도 적을 올렸다. 연구생 5급을 받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종로의 한국기원에 나갔다. 이때가 오후4시. 이때부터 연구생들과 대국을 하고 7시쯤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84년이라면 조훈현 9단이 두번째로 '전관왕(全冠王)'의 위업을 달성한 그 다음해였다. 조 9단은 어쩌다 집에 일찍 들어오는 날, 창호를 불러 그날 둔 대국을 복기하도록 시켰다. 놀랍게도 창호는 가끔 복기를 틀렸다. 그 실력에 복기가 틀리는 것을 曺 9단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의 원생 시절 순발력과 기억력이 뛰어난 조훈현은 3판의 대국을 동시에 기록한 일도 있었다. (曺 9단은 또 어린 시절 바둑공부 대신 만화를 보고 놀다가 선생이 오늘 둔 바둑을 복기해보라고 하면 두지도 않은 바둑을 즉석에서 만들어낼 정도로 순발력을 갖고 있었다)
창호가 복기를 잘못한 것은 타고난 수줍음과 '겁'떄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낯선 곳, 낯선 환경에 대한 어색함을 창호는 못견뎌했고 그래서 성장한 뒤에도 낯선 곳에만 가면 진땀을 흘리곤 했다. 창호가 비행기 타기를 싫어한 것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비행기는 낯설고 위험한 존재이기에 창호와는 애당초 궁합이 맞을 리 없는 것이다.
그래서 창호는 해외에 나가면 배탈부터 났다. 처음엔 음식 탓이려니 했다. 과보호를 받고 자란 소년들은 편식도 많으니까 외국에 오면 배탈이 나는 것이라고 나는 지레 짐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보니 창호는 음식이라면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이었다. 집안 어른들이 저건 먹지마라, 이건 몸에 좋으니 많이 먹어라 하면 그냥 말없이 따라주곤 했지만 스스로 음식을 가린 적은 없었다.
해외에서의 배탈은 순 '신경성'이었다. 이렇듯 수줍고 내성적이며 적응이 더딘 소년이 속으로는 산(山)을 움직일 정도의 승부욕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다.
전주에선 가만히 있어도 모든 것을 다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는 꽤 많은 것을 혼자 해야했다. 걱정이 되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매주 교대로 올라왔다. 선생님 집에서 잠도 함께 잤다. 창호는 지금도 두분의 사랑에 대해서는 미소지으며 이야기하곤 한다. 어머니에 대해선 큰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 '과보호'라곤 하지만 어린 시절엔 역시 몸이 자주 부딪혀야 정도 깊어지는 것일까.

<복기가 틀리는 천재>

창호는 11월에 입단대회에 나갔다가 예선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열심히 공부했으나 실력은 아직 크게 모자랐다. 그날 창호는 집 근처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혼자 눈물을 흘렸다. 한국기원 기사실에도 창호의 탈락 소식은 전해졌다. 창호의 재능에 반신반의하고 있던 기사들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신동이라더니 진도가 느리네. 하긴 전에도 천재라는 애들이 많았지."
"아직 아홉살이야."
"조훈현은 아홉살 때 입단했잖아."
"그때와 지금이 같은가. 하긴 그애는 너무 뚱뚱하긴 하더라. 눈도 조는 것 같고."

서봉수 9단만은 다른 소리를 했다. 거리의 기원에서 뒤늦게 바둑을 배워 18살에 겨우 프로가 됐으면서도 조훈현과 3백번 싸워 1백번을 이긴 서봉수. 몸싸움에 능한, 낭인 특유의 독특한 실전감각을 체득하고 있는 이사람은 어느날 연구생실에서 창호가 바둑두는 것을 멍하니 구경하다가 소리나게 무릎을 쳤다. 창호가 떠난 뒤 그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저 친구가 끝내기를 하는데 한집 이득보는 수순이 기가 막히네. 대단한 재주야."
사람들은 초반이나 중반의 감각을 귀하게 치는데 서봉수는 한집 버는 수순에 감탄하고 있었다. 독설가 기질의 서 9단은 평소 "한집은 하늘이요, 두집은 땅."이라고 말하는 사람. 그래서 한집에 그렇게 감동하느냐고 반문하자
"그림 잘 그리면 (포석 잘 하면) 뭐하나요. 그런 수가 진짜 재능이지요. 9단의 수였어요. 지금은 약하지만 다른 수들도 곧 9단이 된다는 의미지요."라고 말했다.
서봉수는 어떤 의미에서 이창호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즉 이창호를 너무 높게 평가한 탓에 서봉수는 이창호에게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쉽게 무너지고 만다.

<이창호를 알아본 서봉수>

그날 눈물을 흘린 뒤로 창호는 계획을 세웠다. 연구생끼리 리그를 벌여 승률 70%를 넘기면 급이 올라가로 30%면 떨어진다. 창호는 석달에 한급씩 올린다는 목표를 정하고 공부시간을 늘렸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잠잘 때에도 미안하지만 새벽 한두시까지 어김없이 공부를 했다. 선생님 집의 서가에는 무수한 책이 있었고 그곳이 창호의 보물창고였다.
85년 가을, 창호는 연구생 중 가장 먼저 1급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11월이 되자 입단대회에 나갔다. 12명이 풀리그로 겨루는 본선.
첫날 긴장한 가운데 전력을 기울였으나 성적은 3전 3패였다. 이튿날은 2연패.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입단을 고대하는 전주의 할아버지 얼굴이 떠올라서 또 울었습니다." (이창호)

선생님 앞에서 복기를 했다.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 수가 없었고 선생님의 질문에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언제부턴가 모기소리처럼 작아진 목소리도 이젠 아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손가락과 바둑돌로만 의사를 전달했다. (훗날 조훈현 9단과 창호는 도전기를 치른 뒤에도 손으로만 복기하는 것이 습관이 된다. 패배한 조 9단이 입을 열어 계속 질문하는데 승리한 이창호가 진땀을 흘리면서도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바람에 선생님에게 너무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오해를 낳기도 했다)
창호는 자기 방에 들어가 선생님이 지적한 패착들을 집요하게 살폈다.

"몰라서 실수한 수들은 별로 느낌이 없었습니다. 경솔함 때문에, 그러니까 손이 불쑥 나가는 바람에 빚어진 실수들 때문에 거듭 후회하고 자책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창호)

입단대회에서 창호는 이 5연패 이후 6연승을 거둔다. 그냥 6연승이 아니라 5연패 후 6연승이란 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