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이건 인터넷을 떠도는 정도전의 소문입니다

정도전 [鄭道傳, 1342~1398]
고려 말, 조선 초기까지 태조 이성계와 국정을 펼쳤던 1등 공신. 숭례문의 이름을 지은 장본인이다....(생략)
한양을 설계하면서 무학대사와 논쟁을 많이 벌였던 정도전이
"숭례문이 전소되거든 도읍과 국가 전체의 운이 다한 것이니 멀리 피난을 가야 한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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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예언



숭례문에서 사고가 난 뒤 일어난 일들


첫번째
선조 25년이었던 1592년 4월 한양 도성의 남문이었던 숭례문에서 작은 화재가 발생했다. 다행하게도 숭례문과 성곽을 지키던 군대가 초기진화에 성공해 화재를 면했다. 비록 작은 화재였지만 조정과 한양백성들은 모두 흉조라며 근심걱정을 했다.화재가 발생한 뒤 정확히 보름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의 20만 대군이 쳐들어왔다.


두번째
1910년 어느날 조선개국 이래 한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던 숭례문의 현판이 갑자기 바닥으로 떨어졌고, 흉조가 닥칠까 사람들은 전전긍긍해 했다. 이로부터 며칠뒤 대한제국은 일본에 의해 강제 합병되었고 우리 민족은 37년간의 일제라는 암흑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세번째
1950년 따사로왔던 초여름 1392년 건설한 이래 한번도 붕괴가 없었던 숭례문 옆 성곽이 일부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람들은 별 뜻없이 성곽을 수리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 갔지만 그 로부터 몇일뒤 수십만의 사상자와 수백만의 이산가족을 만든 동족끼리 죽이고 죽이는 비참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


네번째
최근 숭례문은 전소되었고, 이미 재앙은 시작되었다.. 이미.. 시작되고 있다.



//

조선왕조실록에 한양을 설계하면서 정도전이 한 말이 하나 적혀있는데,

[숭례문이 전소되거든 도읍과 국가 전체의 운이 다한 것이니 멀리 피난을 가야 한다]



각설하옵고..

널리 알려진 대로 숭례문의 기능은 남쪽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는 역할이었다.

서울 남쪽의 관악산은 산세가 불꽃을 연상케 하는 화형산(火形山)이었다.

불의 기운이 매우 강해 경복궁에까지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한국풍수지리연구원의 전항수 원장은 "이 때문에 조선 초에 경복궁을 지을 당시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의견이 충돌했다. 무학대사는 남쪽의 화기가 강해 경복궁을 동향으로 짓자고 한 반면, 정도전은 임금이 남면을 해야 된다며 남향을 고집했다"고 밝혔다.



결국 정도전의 의견대로 경복궁은 남향이 됐다.

대신 불의 기운을 막기 위해 남대문을 지었고, 그 현판 역시 불을 막는 역할을 하도록 했다.

숭례(崇禮)라는 글자가 불꽃을 나타내기 때문에 불로써 불을 다스리게 했던 것.

또한 숭례문 앞에 '남지'라는 연못을 만들어 불기운을 막았고, 광화문 앞에는 불을 막는다는 상상의 동물 해태상을 만들었다.



과학적인 화재 예방 장치를 하기 어려웠던 과거 조상들은 이처럼 풍수지리사상을 근거로 철두철미하게 화재를 예방했고,

숭례문은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600여 년을 꿋꿋하게 버티면서 불 지킴이 노릇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숭례문이 후손들의 부실한 화재예방체제 탓에 타버렸다는 것은 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는 숭례문과 한양의 설계자인 정도전의 이야기,

"숭례문이 전소되거든 나라 전체와 국가의 운이 다한것이니 멀리 피난을 가야한다"



조선 초기 수도인 한양을 설계한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궁궐의 방향을 두고 다툼을 벌인적이 있죠.

무학대사는 "관악산의 화기가 너무 강하니 궁궐을 남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지어야 한다" 라고 했고

(화기는 전란이나 혼란의 기운을 말합니다. 추후에 일어나는 임진왜란도 "남쪽에서 몰려오는 엄청난 화기" 라고 표현하죠)

정도전은 "예로부터 제왕의 궁전은 남향으로 지었으니 남향으로 지어야 한다" 라고 주장하면서

네가지의 풍수적 장치를 제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1. 이름에 례(禮)자가 들어가는 문 (숭례문)

2. 한강

3. 청계천

4. 남지연못

5. 해태상 (이것은 나중에 흥선대원군이 세운겁니다) 입니다.



그런데 다들 아시다시피 청계천 복원작업하면서.. 청계천의 물이 끊겼구요,

숭례문은 전소되어 사라졌고, 해태상도 광화문을 재건하면서 치워버렸죠 [해태상 내가 소시적에도 늘 보던건데..음~],

남지연못은 이미 개발로 사라진지 오래됐구요.





[출처] 정도전의 예언... 이렇게 대한민국은 위기가 오는것일까?|작성자 부자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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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짤방을 보고 풍수지리에 대해 조사하며 의문을 가진게

1. 정도전은 현실주의자였다. 풍수지리 그딴거 지리학적으로 해석했지

화기가 어떻다 이야기 할 사람은 아닌데 ㅇㅁㅇ

2. 임진왜란은 선조 25년에 일어났고, 선조 때의 정도전에 대한 기록은 단 2건이 나오며

1개는 훼익후고 하나는 정도전이 간신으로 불리는 것이다. (패자의 비참한 말로...)

3. 정도전의 의견을 받아들여 경복궁 터에 궁궐을 지었고, 무학대사가 결국 밀린 셈이고

무학대사가 풍수지리를 기운 그런쪽으로 해석했기에 오히려 무학대사쪽이 했을거 같은 느낌이 들었....

4. 정도전은 개국공신입니다. 나라에 원한이 있기는 커녕 나라에 대한 애착이 강했는데

나라 세워놓고 뭐가 부서지면 국운이 다했으니 도망쳐~// >_ <
라고 할리가...라고 의심끝에 조사를 해보기로 했습죠

그래서 야밤에 미겔겔엔 글쓰면 고자가 된다고 선언하고 와서

고_자가 되기에

조선 왕조 실록을 뒤적거렸스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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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도전의 사상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8월 12일(기묘)
도읍터에 관한 논의에 판삼사사 <U>정도전</U>이 국가 치란은 사람에 달려 있음을 역설하다

임금이 여러 재상들에게 분부하여 각각 도읍을 옮길 만한 터를 글월로 올리게 하니, 판삼사사(判三司事) <U>정도전</U>(<U>鄭道傳</U>)이 말하였다.

“1. 이곳이 나라 중앙에 위치하여 조운(漕運)이 통하는 것은 좋으나 한되는 것은 한 골짜기에 끼어 있어서, 안으로 궁침(宮寢)과 밖으로 조시(朝市)와 종사(宗社)를 세울 만한 자리가 없으니 왕자의 거처로서 편리한 곳이 아닙니다.

1. 신은 음양술수(陰陽術數)의 학설을 배우지 못하였는데, 이제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음양술수를 벗어나지 못하니, 신은 실로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맹자의 말씀에, ‘어릴 때에 배우는 것은 장년이 되어서 행하기 위함이라.’ 하였으니, 청하옵건대, 평일에 배운 바로써 말하겠습니다. 〈주나라〉 성왕(成王)이 겹욕(郟鄏)에 도읍을 정하니, 곧 관중(關中)으로 30대 8백 년을 전하였습니다. 11대손인 평왕(平王) 때에 이르러 주나라가 일어난지 4백 49년 만에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고, 진(秦)나라 사람이 서주(西周) 옛땅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주나라는 30대 난왕(赧王)에 이르러 망하고 진나라 사람들이 이를 대신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30대 8백 년이라 하는 주나라의 운수는 지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나라 고조(高祖)가 항우(項羽)와 함께 진(秦)나라를 칠 때, 한생(韓生)이 항우에게 관중(關中)에 도읍할 것을 권했으나, 항우가 궁궐이 다 타버리고 사람이 많이 죽은 것을 보고 좋아하지 아니하니, 어느 사람이 술수로 항우를 달래되, ‘벽(壁)을 사이에 두고 방울을 흔들면 그 소리는 듣기 좋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니, 부귀(富貴)해진 뒤에는 고향 산천(山川)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하니, 항우가 그 말을 믿고 동쪽 팽성(彭城)으로 돌아가고 한 고조는 유경(劉敬)의 말에 의하여 그날로 서쪽 관중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항우는 멸망했으나 한 나라의 덕은 하늘과 같았습니다. 이후로 우문씨(宇文氏)의 주(周)나라와 양견(楊堅)의 수(隋)나라가 서로 이어가면서 관중에 도읍하고, 당나라도 역시 도읍하여 덕이 한나라와 같았으니, 이것으로 말하면 〈국가의〉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盛衰)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 중국에서 천자가 된 사람이 많되 도읍하는 곳은, 서쪽은 관중으로 신이 말한 바와 같고, 동쪽은 금릉(金陵)으로 진(晉)나라·송(宋)나라·제(齊)나라·양(梁)나라·진(陳)나라가 차례로 도읍하여 중앙에는 낙양(洛陽)으로 양나라·당나라·진(晉)나라·한나라·주나라가 계속 이곳에 도읍하였으며, 송나라도 인해 도읍을 하였는데 대송(大宋)의 덕이 한 나라·당 나라에 못지 않았으며, 북쪽에는 연경(燕京)으로서 대요(大遼)·대금(大金)·대원(大元)이 다 도읍을 하였습니다. 〈중국과 같은〉 천하의 큰 나라로서도 역대의 도읍한 곳이 수사처(數四處)에 지나지 못하니, 한 나라가 일어날 때, 어찌 술법에 밝은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진실로 제왕의 도읍한 곳은 자연히 정해 좋은 곳이 있고, 술수로 헤아려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1. 우리 나라는 삼한(三韓) 이래의 구도(舊都)로서, 동쪽에는 계림(鷄林)이 있고 남쪽에는 완산(完山)이 있으며, 북쪽에는 평양(平壤)이 있고 중앙에는 송경(松京)이 있는데, 계림과 완산은 한쪽 구석에 있으니, 어찌 왕업을 편벽한 곳에 둘 수 있습니까? 평양은 북쪽이 너무 가까우니, 신은 도읍할 곳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1. 전하께서 〈기강이〉 무너진 전조의 뒤를 이어 처음으로 즉위하여 백성들이 소생되지 못하고 나라의 터전이 아직 굳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모든 것을〉 진정시키고 민력(民力)을 휴양하여, 위로 천시(天時)를 살피시고 아래로 인사(人事)를 보아 적당한 때를 기다려서 도읍터를 보는 것이 만전(萬全)한 계책이며, 조선의 왕업이 무궁하고 신(臣)의 자손도 함께 영원할 것입니다.

1. 지금 지기(地氣)의 성쇠를 말하는 자들은 마음속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다 옛사람들의 말을 전해 듣고서 하는 말이며, 신이 말한 바도 또한 옛날사람들이 이미 징험한 말입니다. 어찌 술수한 자만 믿을 수 있고 선비의 말은 믿을 수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여 인사를 참고해 보시고, 인사가 다한 뒤에 점을 상고하시어 자칫 불길함이 없도록 하소서.”

---> 위 글처럼 정도전은 점이나 초현실 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리학적으로 수도가 될 만한 위치기에 수도를 선정하는 것이지 어디가 길지고 복이 들어와서

수도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기존에 숭배라던지 종교 제사가 정치에 관여하는걸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위의 화기를 차단하기 위한 것도 대신들의 주장에 마지못해 장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2. 남대문 현판문제나, 정도전의 이야기가 선조때 나온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정원에 전교하였다.

“최영경을 그때 양사(兩司)가 논하였는데, 모사(某司)는 어떠한 죄를 주기를 청하였는가? 또 그때 최영경이 스스로 그 죄를 알고 자살하였다고 말하고서 금부의 관원을 죄주기를 청한 것은 모사(某司)가 계청한 것인가? 또 그때 양사의 관원을 모두 조사하여 아뢰라. 또 최영경을 추증한 뒤에 이어 사제(賜祭)했는지 모르겠다. 상고하여 아뢰라.”

사신은 논한다. 최영경은 젊어서부터 고상한 품행이 있었고 효도와 우애는 천성에서 나왔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집을 팔고 재산을 다 털었으며 장사에 석곽(石槨)을 썼다. 장성해서는 남명(南溟) 조식(曺植)을 사사하였다. 법도가 준엄하고 조행이 순결하며 가난함을 편안히 여기고 분수를 지키며 현달과 명예를 구하지 않아 조정에서 관작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일찍이 사헌부 지평을 제수하니 최영경은 상소하여 사양하였는데, 그 속에 ‘조정에 붕당이 풍조를 이루었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요로에 있는 자가 그를 미워하였다. 평소에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남의 잘못을 용서한 적이 없었으며 정철을 배척하고 성혼과 절교하니 이 때문에 정철의 당이 매우 미워하여 항상 중상하려 하였다. <U>기축년<SUP>4845) </SUP></U>에 정여립이 역모로 죽음을 당할 때 그 당을 깊이 다스리니 ‘길삼봉(吉三峰)이란 자가 그 괴수이다.’라는 말이 나왔다. 정철의 당이 이를인하여 얽어 모함하려는 계책을 하여 드디어 길삼봉을 최삼봉(崔三峰)으로 바꾸고 삼봉을 최영경의 별호로 삼았다. 그러자 재앙을 좋아하는 무뢰한 무리들이 서로 얽고 선동하여 자창자화(自唱自和)하니 그 소문이 중외(中外)에 전파되어 듣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으나 당시 현인과 사류(士類)가 기를 죽이고 숨도 쉬지 못하며 감히 따져 논변하지 못하였다. 【이때 음관(蔭官) 임예신(任禮臣)이란 자가 재상 이준민(李俊民)과 해묵은 원한이 있었다. 그 집에 가서 큰소리로 ‘이른바 길삼봉은 곧 최영경이다.’ 하니, 이준민이 노하여 큰소리로 꾸짖기를 ‘늙은 놈이 어찌 감히 이런 말을 꺼낸단 말인가.’하고 그의 아들 수훈(受訓)을 불러 끌어내게 하니, 사론(士論)이 옳게 여겼다. 】그러자 정철의 문도인 호남 사람 양천경(梁千頃)이 상서(上書)하여 고하니, 최영경을 체포하여 형틀에 묶어 서울에 왔다. 이때는 <U>경인년<SUP>4846) </SUP></U>여름철이었는데 최영경의 나이가 이미 60이었다. 그 문인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늙은 나이에 체포되어 더위를 무릅쓰고 재를 넘으르로 도로에서 죽어 천일(天日)의 아래에서 드러내어 밝히지 못할까 염려하였는데, 지금 다행히 살아서 도성의 문으로 들어왔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하였다. 정국(庭鞫)을 당하게 되어서는 안색이 태연하고 조용히 공사(供辭)를 바치되 사지(辭旨)가 흔들리지 않으며 하는 말이 【이때 이항복(李恒福)이 문사 낭청(問事郞廳)으로 있었는데, 물러나와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최영경은 내가 그 이름만 듣고 그 얼굴은 보지 못하였는데, 지금 포박되어 수금 중에 있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내가 반평생을 살면서 다행한 바는 이 사람을 보게 된 것이다.’ 하였다. 이항복이 기축 역옥(己丑逆獄)을 당하여 <U>독철(毒澈)<SUP>4847) </SUP></U>과 같은 악당으로 문사 낭청이 되어 정철에게 말하기를 ‘역적이 호남으로부터 일어났는데, 서울에서 일어난 자도 있고 또 영남에서 일어난 자도 있으니, 그들이 이때를 타서 사류를 다 죽이고자 하는 것이다.’ 하니, 정철이 크게 기뻐하여 상에게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을 아는 자는 이 모의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경은 이 말을 어떤 사람에게 들었는가?’ 하니, 정철이, 이항복이 말하였다고 회계하였다. 이항복이 만일 이 말을 정철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정철의 말을 듣고 대단히 노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입 다물고 묵묵히 있으면서 듣기만 하고 한 마디 말도 변명하지 않았으니, 이항복이 독철(毒澈)을 부추긴 것을 이에 의거하여 알 수 있다. 그가 ‘반평생을 살다가 이 사람을 보게 되었다.’ 한 것은, 곧 그 죽음을 다행하게 여기면서도 다만 익살스런 말을 하여 남의 귀를 속인 것일 뿐이다. 그때 이항복의 자형(姊兄) 민선(閔善)이 대간이 되어 또한 최영경을 논하는 일에 참여하여 옥중에서 죽게 하였는데, 민선은 용렬한 사람으로 모든 일을 이항복에게 물어서 결정하는 자였다. 그러니 이항복이 반드시 그 논의에 참여하는 것을 마땅히 여겼으므로 민선이 그 논의에 참여한 것이다. 정철이 귀양갈 적에 송별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오직 이항복이 호조 참의에로 있으면서 가서 전별하였다. 정철이 귀양지에게 시를 짓기를, 내 생애 놓인 곳 설새령이다만 마음은 저멀리 필운산을 달리네 우리 서로 못 본다 한하지 마오 꿈속에선 자유롭게 오가지 않겠나 하였는데, 필운(弼雲)은 이항복의 별호이다. 이로 보면 기축옥사는 정철과 이항복이 서로 짜고 일으킨 것임이 분명하다. 】‘ 신이 평생에 본디 헌호(軒號)가 없었습니다.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고려 말기의 간신 <U>정도전</U>이 일찍이 이 호를 썼었는데 하필 간신의 호를 취하여 자기 호로 삼겠습니까.’ 하였으며, 사간(事干)을 추궁해 물었으나 끝내 증거가 없었다. 또 그가 역적과 초년에 잠시 혹 서로 만나 보았으나 중년 이후에는 절교하고 서로 통문(通問)하지 않은 일을 진술하였다. 그 집의 문서를 수색해 보니 모두 그 아우와 족친에게 보낸 서찰로서 모두 우애와 화목을 권면한 뜻이었다. 주상이 그를 석방하도록 명하고 <U>역적<SUP>4848) </SUP></U>이 보냈던 간찰 하나를 내리었는데, 바로 역적이 일찍이 산에 놀러가기를 언약한 것으로서 답을 하지 않은 글이었다. 간원이 재차 국문하기를 굳이 청하였으나 주상이 윤허하지 않으니, 19일 동안 연달아 계청하므로 허락하여 드디어 재차 국문을 받았다. 먼저 그 아우 여경(餘慶)과 족인 김영일(金榮一) 등을 추국하여 엄하게 고문을 가하였으나 끝내 다른 말이 없었다. 최여경은 장형을 맞아 죽고 최영경은 드디어 먹지 않아 병이 되어 죽었다. 헌부에서는 또 ‘최영경이 스스로 그 죄를 알고서 자진(自盡)하였다.’ 하면서 금부 낭청을 파직하기를 청하였다. 대개 최영경은 일세에 고명이 있었는데 근거없는 말로 임금을 현혹하였고 끝내 증거가 드러나지 않았는데도 옥중에서 야위어 죽게 하였으며 끝내는 얽어 죽인 정상을 숨길 수 없게 되자 자진하였다고 하면서 애매하게 임금을 속였으니 또한 참혹하다. <U>신묘년<SUP>4849) </SUP></U>에 공론이 격발하여 양천경(梁千頃)이 무고한 죄를 안문(按問)하였더니, 양천경이 공초(供招)하기를 ‘정철이 신을 불러 말하기를 「네가 만일 최영경이 길삼봉(吉三峰)이라고 고하면 좋은 벼슬을 할 수 있다. 」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로부터 성상의 마음이 후회하게 되었다. <U>계사년<SUP>4850) </SUP></U>에 환도한 뒤에 곧 명하여 최영경의 아내와 자식에게 늠료(廩料)를 주게 하고 하교하기를 ‘그 아내까지 굶어 죽게 할 수 없다’ 하고, 또 ‘최영경의 일은 내가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진다.’ 하고 특별히 대사헌을 추증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영남 유생의 소로 인하여 공론이 일제이 일어나서 그때 재차 국문하기를 청한 대간을 죄주기를 청하였다. 주상의 뜻은 먼저 그 수악(首惡)을 다스리고자 하였으나 언관들은 먼저 재차 국문하기를 청한 대간을 논하였으니, 대개 일을 논하는 체통이 그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죄가 우심한 자는 금부의 관원을 죄주기를 청하였던 대관인데도 양사에서 논급하지 않았는데, 성명께서 그 정상을 깊이 통촉하시어 아울러 조사하게 하였으며, 이어서 사제(賜祭)의 여부를 물었으니, 최영경의 깊은 원왕(冤枉)을 거의 씻었다고 할 수 있다.


--->잘 보면 길삼봉인지 최삼봉인지 하면서 막 몰리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삼봉은 정도전의 호였습니다. 그래서 변명하는 사람이 자기가 역적의 호를 쓰다니

막막 자긴 아님메 하면서 변명하고 있는 겅미.

이거 외에는 별거 없고

조선왕조 실록에 숭례문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가뭄때 화기를 막는 숭례문을 열고 닫음으로서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대처를 함은 보여주지만...(들어가려다 닫혀있으면 다른 문까지 돌아가려면 얼마나 짜증났을까)

뭐 선조때 현판이 불에 타고 자시고도 없었구요

해석본을 기준으로 검색해 보았습니다.

원문으로 해석하면 보일까 생각해봤지만

전 사학과도 아니고 한자도 싫어서 포기했습니다.

1. 임진왜란 보름 전에 현판이 떨어져서 신하들이 흉조라 말했더라

임진왜란은 선조 25년 4월에 기록되어 있으며 파발이니 한 일주일 제해도 보름 전에

현판이 떨어졌으면 3월에는 기록이 되어 있어야 했으나 3월에는 통신사 이야긔만 적혀 있었습니다.

애초에 선조 4서면 선조 2년에서 3년인데 그때면 임진왜란은 커녕 율곡선생님이 계실적이네연




이번엔 자초의 기록 (자초는 무학대사입니다.)

을 뒤져봤습니다.

무학대사의 기록은 상당히 미비합니다.

실록에는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신경전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인상적인 기록이 있어서 기재해 봅니다.


태조 2권,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10월 11일(기미) 1번째기사
탄신일이므로 사형과 유형 이하의 죄인을 사면하고, 4가지 사항을 도당에 하교하다


이날 시좌궁(時坐宮)으로 돌아와 중 2백 명을 궁중에서 공양(供養)하고, 왕사(王師) <U>자초</U>(<U>自超</U>) <SUP>306) </SUP>를 청하여 선(禪)을 설법(說法)하게 하였는데, 현비(顯妃) <SUP>307) 가 뒤에서 발을 드리우고 이를 들었다. 자초<(<U>自超</U>)가 능히 종지(宗旨)를 해설하지 못하니, 중들 가운데 탄식하는 사람이 있었다.


태조 이성계의 생일이라 왕사인 자초가 종지를 해설해야 하는데 (생일날 스승님이 할게 축사밖에 더 있겠습니까)

잘 못해서 중들이 오히려 더 미안했는듯 합니다.

굴욕 ㅎㄷㄷㄷ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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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4월 30일 새벽 제가 부족하지만 미겔에 올렸던 글입니다.

인터넷이 허구성 짙은 소문을 얼마나 빠르게 배포하는지 알 수있는 대목입니다만,

그렇다고 인터넷을 마냥 비판하고만 있을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소고기 문제도 인터넷이 없었다면...어찌됬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