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어디선가 읽었던 내용중에 미국의 철도회사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초반에 이르기까지 철도사업은 미국에서 가장 각광받는 사업이었다. 미국은 워낙 넓은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었고, 자동차는 아직 장거리교통수단으로 사용하기엔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행기라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했지만, 수십년동안 안정적인 사업을 해오던 철도회사들은 비행기는 한낮 지나가는 유행이라고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그 결과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철도사업은 2류산업으로 몰락해 버렸으며 대부분의 장거리 이동은 비행기로 대체되어 버리고 말았다. 철도회사로서는 자신이 하는 사업이 ‘기차를 움직이는 사업’이 아닌 ‘사람을 움직이는 사업’이라는 점을 간과한 결과였다.

이 이야기는 여러가지 면에서 시사해주는 점이 많은 이야기인데 결국 기업에게나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는 일의 본질이 무엇이냐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진리와 시대의 흐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결국 도태되고 만다는 교훈을 동시에 전달해 주고 있다. 게임회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게임회사에서 만들어 내는 것은 ‘RPG’도 ‘패키지게임’도 ‘온라인게임’도 ‘콘솔게임’도 아닌 사람들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콘텐츠 그 자체가 아닌가 싶다. 결국 중요한 것은 게임의 형태가 아니라 궁극적인 목적, 즉 유저들에게 전해지는 재미에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점에서 기차가 비행기로 대체되었던 것처럼 현재 게임산업의 흐름은 분명히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변해가고 있다.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시대에 굳이 기차를 타고 다닐 필요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콘솔용 패키지게임을 만드는 우리들은 어쩌면 시대착오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그뿐아니라, 한국사람의 민족적 특성으로도 유저에게나 개발자에게는 패키지게임(=스텐드얼론,오프라인게임)보다 온라인게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한국유저들이 유별나게 온라인게임을 좋아하는 사실이야 따로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개발자에게도 온라인게임이 적합한 것 같다는 것이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다.
개인적인 생각에 한국사람은 성격이 매우 급하고 추진력이 있다. 반면에,일본사람은 철저한 사전계획없이는 일에 착수하지도 않으며 매우 꼼꼼하다. 이런 성격이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는데 우리나라의 건설사업은 굉장히 빨리 짓지만 부실공사가 많지만, 일본은 서서히 만들어 나가지만 매우 튼튼한 건물을 만들어 낸다.
어찌보면,온라인게임은 ‘작품’이라기 보다는 ‘서비스’에 가까운 형태이다. 즉,오픈당시의 완성도보다는 얼마만큼 빨리 유저들의 니드에 부응해 내느냐에 성패가 달렸다고 생각된다. 따라서,얼마만큼 패치를 잘하느냐가 중요하다.
반면에,패키지게임은 처음 발매되었을때의 완성도가 중요하다. 이후의 패치는 결국 게임에 상처로 남을 수 밖에 없다. 결국 패키지게임의 성패는 얼마만큼 패치를 없애고 완성도를 높이느냐에 있다. (이 패치에 관한 입장차이가 개발에 있어 온라인과 패키지를 극명히 나눠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한국사람들은 온라인게임에 강하고 일본사람들은 패키지게임에 강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 한국게임들은 빠른 스피드를 이용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온라인유저들의 요구를 순발력있게 대응해 나가며 진화를 거듭해 나갈 수 있지만, 사전준비가 철저히 필요한 일본게임들은 하나의 완성본을 내기에는 적합하지만 끊임없이 변해나가야 하는 온라인게임에는 적응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약간 다르게 비유하자면,한국게임은 돌연변이가 많지만 세대주기가 짧은 DNA를 가지고 있다면 일본게임은 거의 돌연변이는 없지만 세대주기가 긴 DNA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따라서,한국게임은 문제점(돌연변이)도 많지만 그만큼 빨리 진화해 나갈 수 있는 것이며, 일본은 문제점은 거의 없지만 그만큼 발전이 더디다.(일본게임들은 10년전이나 지금이나 게임성적인 면에서는 거의 발전이 없어 보이는 것은 나만의 편견일까?)

한국에서 온라인게임이 유별나게 발전을 거듭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초고속 통신망이라는 하드웨어적인 발전과 더불어 유저와 개발자들의 이런 특성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삼위일체의 시너지효과였던 것 같다

어쨌든,각설하고 이런 점에서 어떻게 생각해도 현시점에서 대한민국의 개발사라면 온라인게임을 개발하는 것이 당연하다. 뿐만 아니라, 10여년동안 패키지게임을 만든 경험으로는 과연 일본게임수준의 ‘완성도’있는 게임을 만드는 것 자체가 가능할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오랫동안,버그와 싸워오면서 느끼는 점은 버그가 없는 게임을 만드는 것은 수능 만점 맞는 것 만큼 힘들다는 생각뿐이다. 채점(발매)을 하기 전에는 도저히 뭐가 틀렸는지 알 수 없다. 뭐,근본적으로는 만점을 받을 만한 실력이 안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여기서 읽는이들은 의문을 생기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저 녀석들은 왜 아직도 패키지게임을 만들고 있을까?(더군다나 한번 실패했던 마그나카르타라는 이름을 달고)

사실,처음에는 오기로 시작했다. 지난번 시험(마그나카르타)은 너무나도 어려웠고 제한된 시간에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 노력은 대가를 받지 못하고 최악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물론,실력에 걸맞지 않게 너무 어려운 시험에 도전한 결과일 것 이다. 처음해보는 3D게임은 개발시스템자체를 처음부터 재구성해야 했으며, 이런점을 고려하지 못한 스케쥴은 날이 갈수록 스탭들의 목을 죄어왔다.(그 이후의 결과는 다들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므로 생략하겠다)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 개발스텝들은 너무 분했다. 버그 많은 게임을 만든주제에 라고 말한다면 할말이 없곘지만, 너무나도 고생끝에 만든게임이 쓰레기취급받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곤, 다짐했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실력을 쌓아서 이 수치를 씯어버리고 ‘마그나카르타’의 명예를 되찾아주고야 말겠다고,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뭔가 우리앞에 놓여있는 벽을 깨부수고 한발짝 전진하고 싶었다.

콘솔을 택한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콘솔을 통한 일본진출이라는 창업당시부터의 목표때문이기도 하였으며 또한,버그가 절대 용납되지 않는 ‘일본’,’콘솔’이라는 두개의 강력한 시험대를 두고 우리를 달구어 나가고 싶었다. 또한,국내시장만을 대상으로 했던 지금까지와는 세계표준이라 할 수 있는 콘솔게임을 통해 본격적인 해외진출의 기틀이 되기를 바랬던 전략적 이유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이유로 시작하게 된 프로젝트이지만 시간이 흐르고 마음이 진정되고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서서히 새로운 사명감이 어딘가에서부터 싹터오기 시작했다.

우리회사는 90년대 RPG의 전성시대를 구가해온 대표적인 한국의 게임개발사였다. 하지만 사실 90년대에 발매된 우리회사의 게임들이 그렇게 완성도가 높았던 것은 아니었다. 히트작이었던 창세기전시리즈도 항상 버그에 시달렸으며 게임성적인 면에서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속에서도 불구하고 매년 시리즈가 발매될 때마다 판매차트와 인기차트의 1위를 놓친적이 없었다. 우리가 상대했던 게임들중에는 워 크래프트나 삼국지,C&C등의 초대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완성도가 떨어지는 게임이 1위를 고수 했던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언젠가는 저 녀석들이 제대로 된 게임을 만들겠지’ 라는 맹목적인 유저들의 한국게임에 대한 투자가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만약,그들이 진정 우리에게 그런 생각으로 투자했다면
약간 부족한 게임이지만 투자한다는 생각으로 우리게임을 사 주었다면,

우리는 시대(時代)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암울했던 한국게임의 90년대 게임산업. 온라인게임은 아직 각광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게임산업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오던 시대. 미국이나 일본에서 만들어진 게임만을 즐기며 문화적 열등감에 시달리던 게임유저들의 시대.
이 시대를 살아온 유저들에게 우리는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단지 가능성만을 보고서…언젠가는 일본이나 미국게임에 뒤떨어지지 않는 게임이 한국에서도 만들어 지리라는 가능성만을 보고 우리게임에 투자해왔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시대에 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90년대 우리와 함께 성장해온 유저들에게,
10여년을 함께해온 유저들에게
소프트맥스는 소프트맥스만의 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분명 온라인 게임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원했던 그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전에는 소프트맥스는 한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우리는 이 길을 걷고 있다.
솔직히, 아직도 버그가 두렵다. 또한,일본과 콘솔이라는 높은 벽에 돌진하는 달걀과 같은 심정이다. 하지만, 깨어져 부서지더라도 이 벽을 넘지 못하면 개발자로서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현재 우리가 진행중인 이 프로젝트가 한 시대의 마침표가 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 또한 존재한다. 결국에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이라도 이 마침표만은 제대로 찍고 싶다.

이것이 90년대를 함께 살아온 게임세대를 향한 소프트맥스의 대답이다.

< 사족 >
앞의 철도산업과 상반되는 케이스로 영화산업이 있다.
TV가 등장하였을 때 모두들 영화(극장)는 이제 망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TV콘텐츠와 극장용 콘텐츠는 주는 재미가 다르다. 그 이후에 TV는 TV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더욱 발전한 것은 여러분도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간혹, 패키지RPG를 영화와 같은 게임으로 비유한다. 그리고,분명히 온라인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 무엇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디,게임산업이 ‘철도산업’이 아닌 ‘영화사업’의 예를 따라가기를 기원한다.


출처: 노리맥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