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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동대문은 일본의 개선문?"


[중앙일보 홍수현 기자] 국보 1호인 숭례문(남대문)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던 1905년 무렵 교통 장애를 일으킨다며 헐릴 뻔하다,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1562~1611)가 조선 왕궁으로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로 보존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예술적 가치 때문에 일본이 남대문을 보존했다는 기존의 내용과는 배치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또 흥인지문(동대문)도 가토와 함께 일본군 선봉을 담당했던 고니시 유키나가(?~1600)가 서울로 입성한 기념물로 보존됐다는 주장이다.

지난해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조선 성곽 정책'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오타 히데하루 일본 도후쿠(東北)대 특별연구원은 '한국사론' 49집에 이같은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오타에 따르면 을사보호조약 체결 당시 조선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1850~1924)가 "포차 왕래에 지장이 생기니까 낡아빠진 문은 파괴해 버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일본은 또 남대문이 서울의 정문이라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용산 등지에 시가지를 만드는 등 도시개조를 하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철거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거류민단장이었던 나카이 기타로(1864~1924)가 "가토 기요마사가 빠져나간 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건축물은 남대문 이외 두세개밖에 없는데 파괴하는 것은 아깝지 않은가"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또 나카이는 남대문 보존안으로 서울 성내-남대문-남대문 정거장을 잇는 간선도로를 남대문 좌우로 낼 것을 제안해 그대로 실행됐다.

이같은 사실은 오타가 1915년 발간된 나카이의 회고록 '조선회고록'과 당시 신문.잡지 등을 통해 밝혀낸 것이다.

이에 대해 오타는 "30년대부터는 나카이가 남대문의 예술적 가치 때문에 보존을 주장했던 것처럼 전해지는데 이는 일본이 문화정치로 전환하면서 고의로 만들어낸 것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를 어찌 할고.. -_-;; 우리 학교 국사 선생님과 함께 한참 고민을 했다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