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누군가와 대화하던 중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만화는 유치하고 천박하기 때문에 그 상위클래스인 소설에 비해 저급한 장르라는 이야기였다. 뭐 이정도로까지 매도하지는 않았지만 여하튼 그래서 만화를 안본다는 말이었다.
이에 대해 '만화는 21c 고부가가치 산업이기 때문에' '만화는 방황하던 젊은 날의 저에게 사랑과 용기를 가르쳐 주었어요' 등의 예찬론적 옹호보다는 그 표현형식상의 특성을 말하고 싶었다.
당장 생각나는 만화만의 특성이라면 순간적 상황단위로 묘사되는 컷단위 구성, 시간적 제약없이 페이지를 넘기기 전까지 뒷장을 볼 수 없다는 패시브한 진행방식 등이다. 충격적인 이미지를 전달하는데 매우 적합한 매체라 할 수 있고 이런 특성을 잘 이용한 코메디, 호러, 연애물 등 수많은 소재가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맥없는 내용이 지나가는 순간에 페이지를 짠 하고 넘겼더니 2페이지에 걸쳐진 어마어마한 반전이 대기중이었다던가..(주로 순정만화의 첫키스씬?) 다른 매체로 제작된 창작물에서는 보기 어려운 만화만의 장점이라 하겠다.
정적-동적의 중간단계쯤인 상황단위 묘사도 특색있다. 한 컷에서 두세명이 난상토론을 벌이는 장면을 애니로 그대로 옮겨놓게 되면 한사람 한사람 턴제로 돌아가며 대화하는 장면이 되는데, 왠지 맥도 빠지고 질질 끌리는 느낌이 되어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만화에선 표현할 수 없는 애니만의 장점도 수없이 존재한다. 작가 의도에 따라 엄청 건조해지기도 하고 찐덕찐덕하게 감정적이기도 한 텍스트만의 소설에도 그 나름의 특성은 존재한다. 페이지 상의 빈 공간이나 점 몇개만으로도 화자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전달하는 소설만의 맛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단지 만화적인 표현을 억지로 소설상에서 하려하면 삽질이라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창작물인 게임에도 형식에 따른 고유 특성이 존재한다.
흔히 '2D가 3D보다 낫다' '3인칭보다 1인칭이 낫다' 'PC가 게임기보다 낫다'든지 하는 말들을 많이 하기도 하는데 개인취향이라면 관계없겠지만 개발자적인 입장에서는 내용고려 없이 형식선정부터 우선한다면 어딘가 겉돌고 있는 것이다. '형식에 최적화된 내용' '내용에 적절한 환경' 등이 최초 구상단계에선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예전 쥬라기공원 류의 텍스트 기반 MUD에서 'xx님이 xx님을 비오는 날 먼지나도록 쎄게 때렸습니다' '서서서서서남남남동동북북북' 하고 표시되는 나름의 쌍맛은 텍스트 기반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픽 MUD에서 저런걸 어거지로 흉내내봐야 소용 없는 일이다. 그래픽 기반에서는 그 나름의 특성을 살린 컨텐츠가 만들어져야 한다. 전혀 비교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게임성이라는 것은 공격동작에 1/60초단위 프레임이 추가되느냐 생략되느냐에 따라서도 시각적으로나 손맛이라던가 등등을 통해서도 부여될 수 있는 민감한 것이다. 가장 효율좋은 환경과 형식을 선정하라.

최근 가장 주의깊게 보고 있는 것은, '온라인 게임만의 특성'이다. 가끔 '콘솔게임기에서나 볼 수 있는'이라던가 '마치 싱글플레이 게임을 하는 듯 엔딩이 존재하며 독립적인 시나리오 진행이 가능하다' '3개월마다 스토리가 재시작된다' 라던가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게 그 게임의 주안점이라면 많이 잘못된게 아닌가 싶다. 아니, 온라인이면 온라인에서만 할 수 있는 특성에 목숨을 걸어야지 왜 기껏 온라인으로 싱글플레이 게임같은걸 만들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비슷한 예로, 키보드+마우스+네트워크환경 등이 모두 갖춰져 있는 PC를 놔두고 게임기에 더덕더덕 주변기기를 붙여가며 PC풍 온라인 게임을 만드는 것도 지금단계에선 아직 이해할 수 없다.

글의 애초 취지가 이거였던가 음 쓰면서 점점 잡담이..
물이 끓고 있기 때문에 이쯤에서 대강 얼버무려야지

ps. 3d로 만들어 모션캡쳐까지 한 후에 다시 2d로 디더링해서 만들었다는 '용호의 권 3'를 에뮬로 해보다가 생각나서 쓴 글이었음
그 외에, 일본 스플래터 무비 '이치 더 킬러'를 보고난 감상도 있음. 그 원작만화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세기말적인 영상미에 촛점을 맞춰 영화적인 해석으로 잘 풀었다고 생각

* ㅊㅋㅊㅋ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3-03-08 2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