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야나기사와를 위한 변명

갤러리에 환상의 반칙 축구 어쩌구 하는 글이 있는데 골키퍼 차징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파울입니다. 어째서 비난의 화살이 야나기사와 선수에게 돌아가는지 모르겠군요.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면 어느 나라라도 저기서 '골키퍼 차징했어요 우리편 골 무효로 해 주세요'하고 자수할 팀 없습니다. 일단 들어갔으니까 말이죠

화살을 돌리려면 명백한 차징상황에 휘슬을 불지 않은 주심에게 가야지요. 이날 결정적인 오심 몇 차례를 범한 주심의 공과가 큽니다. 후반 26분 호주 케네디 선수의 헐리우드 액션에 속아 일본 문전에서 프리킥을 주었고 1:1 동점 직후에 코마노가 당한 발목태클을 불지 않는 등 수 차례 불어야 될 상황과 불지 않아야 될 상황을 착각하는 최악의 판정이 여럿 나왔습니다.


2. 축협의 삽질 때문에 히딩크가 한국에 뼈를 묻을 수 없었다?

간만에 들었던 최고의 넌센스였습니다. 적어도 히딩크 영입 직후부터 2002년 월드컵이 끝날 때까지의 축협의 행보는 그야말로 모범적이었습니다. 2001년 컨페드컵 때 오대영 감독이라는 소리까지 들어가여 언론과 여론의 집중포화가 빗발칠 때 일선에서 이들을 막아준 것도 축협이요, 각종 외압에 흔들리지 않고 해볼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게 해 준 것 또한 당시의 축협이었습니다.

감독 계약할 때도 딱 월드컵 끝날 때까지로 명시돼 있었습니다. 물론 4강을 이루고 난 다음에 아쉬운 마음에 계약연장 제안은 했었지요. 하지만 히딩크 본인이 다른 곳을 원했던 겁니다. 박수칠 때 떠난 거지요. 히딩크 영입시의 상황은 글 이후에 여러 분들이 리플을 달아 주신 그대로입니다. 레알에서 짤린 히딩크는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일 필요성이 절실했고, 2000년 아시안컵 참패 이후 위기감을 느낀 축협은 완전히 새로운 마인드의 지도자를 필요로 했습니다. 양자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거고 서로 맞도박을 한 셈이기도 했죠.

첫 외국인 국대감독을 물색했을 2000년 당시에 히딩크가 2순위 후보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에메 자케, 트라파토니, 비엘사, 고(故) 리누스 미셸 감독 등 매니아라면 이름만 들어도 헉소리날 감독들을 1순위 후보로 물색하고 물밑작업부터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개런티라든지 현재 소속팀과의 계약관계 등이 맞지 않으면서 차선책을 택해야 했고 그 대안이 히딩크였던 것입니다. 현재까지 축협 국제부장을 맡고 있는 가삼현 씨와 이용수 기술위원장, 그리고 몽아저씨도 히딩크 영입에 크게 활약했고 발탁 뒤에는 철저하게 감독 대접과 자리보장을 해 줬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드보카트의 영입도 비슷한 경우입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얼마나 실리적인데요. 우리나라 특유의 정(情)은 한껏 맛보고 갔을지 몰라도 의리나 대승적 명분 같은 낭만적인 미사여구는 그들에겐 넌센스일 뿐입니다. 박수칠 때 떠나며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한 것이 히딩크와 아드보카트를 비롯한 네덜란드 사람들의 국민성입니다.

축협의 공과 중 과(過)를 얘기할 거라면 98년 월드컵 도중에 차감독 경질과 2002년 이후 부임한 코엘류, 본프레레를 연속 경질한 것을 삽질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본감독의 경우에는 아직도 언론에서 근거없는 때리기를 일삼고 있는데 이에 대한 얘기는 토탈사커 http://totalsoccer.empas.com 의 서형욱님 꼭지가 모범적인 해답이 될 것 같습니다)


3. 2002년 4강신화가 심판매수?

슬럼가 가판대에서나 팔 지독한 해외 옐로페이퍼라도 보지 않는 이상에야 저런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될 일입니다. 역대 월드컵 우승기록 중 재미있는 통계가 있는데, 단 두 번을 제외하고 개최국이 속한 대륙에서 우승국이 나왔습니다. 엄연한 홈 어드밴티지인 셈이지요. 게다가 2002년에는 1년 이상의 충분한 준비기간과 뛰어난 코칭스탭, 폭발적인 응원문화 등이 함께하면서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된 해였습니다. 충분히 4강 국가의 자부심을 누려도 됩니다(자만으로 가면 곤란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