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진위

상장례(喪葬禮)를 전공하지 않더라도 고려시기 전공자라면 한번쯤 '고려장'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고려라는 말이 들어 있어서 당연히 고려의 풍습일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장은 '늙은 부모를 산 채로 내다버리던 악습'이다. 이러한 악습이 없어지게 된 내력을 알려주는 고려장설화는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다. 또한 고려장을 했던 곳이라고 알려진 무덤들도 여러군데 있어, 의심의 여지없이 고려시기에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풍속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과연 고려의 장례풍속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인식되어 있는 고려장의 실체는 무엇일까?
고려장이 없어지게 된 내력을 알려주는 이야기는 두 가지로 구전되고 있다. 하나는 중국에서 낸 문제를 숨겨놓은 늙은 아버지의 힘을 빌어 해결하고 고려장을 폐지하게 되었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늙은 아비를 산 채로 져다버린 아버지가 내버린 지게를 아들이 후일 다시 쓰기 위해 가져옴으로써 그의 아버지로 하여금 불효를 깨우치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은 다른 나라에서 전래된 이야기이다. 앞의 이야기는 불교경전인 『잡보장경(雜寶藏經)』의 기로국연(棄老國緣)조의 설화와 유사하고, 뒤의 이야기는 중국 『효자전(孝子傳)』의 원곡(原穀)이야기와 유사하다.
원곡이야기를 보도록 하자.
원곡이란 사람에게는 늙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원곡의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싫어하여 갖다 버리려고 생각하였다. 15살 된 원곡은 울면서 말렸으나 아버지는 듣지 않았다. 드디어 여(輿)를 만들어 갖다버렸다. 원곡이 따라가 여를 거두어오니, 아버지가 "이처럼 흉한 것을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 하였다. 곡이 말하기를 "다음에 아버지가 늙으면 다시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아버지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깨달아, 자신의 아버지를 다시 모시고 왔다. 이후 잘 봉양하여 마침내 효자가 되었다.
위의 원곡이야기는 노인에 대한 공경을 강조하는 점에서 효의 윤리를 확산시킬 목적으로 수용되었다고 보여진다. 또한 기로국이야기는 우리 나라에 수용·확산되면서 불경에 있는 천신(天神)이 중국으로, 기로국이 고려국으로, 기로의 풍습이 고려장(高麗葬)으로 변용되어 고려시기에 실재로 존재한 풍속처럼 믿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로국이야기는 몽고의 민담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방 곳곳에 고려장터로 알려진 무덤들은 무엇일까. 고고학계의 발굴결과로는 고려장과는 무관한 석관묘(石棺墓)나 석실분(石室墳)으로 판명됐다.
이와 같이 고려장은 고려의 장례풍속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고려장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되어 불효가 판치는 각박한 세태를 비판하는 신문 기사나 텔레비전의 프로그램 속에서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고려시기는 불효죄를 엄격하게 처벌하였다. 『고려사』에는 "조부모나 부모가 살아있는데 아들과 손자가 호적과 재산을 달리하고 공양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징역 2년에 처한다"고 하였다. 또한 국왕이 효행이 있는 사람과 80살 이상 된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선물을 주는 기사가 자주 보인다.
이렇게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는 사회에서 늙은 부모를 내다버리는 풍습이 있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반대로 노인에 대한 공경을 강조하기 위해 효자전의 원곡이야기와 기로국이야기를 마치 우리 나라, 특히 고려의 실제 풍습인 양 바꾸어 전승시킨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실제 고려의 장례풍속은 어떠하였을까


◇화장그림(국립박물관 소장)
고려사회에서는 매장(埋葬)과 화장(火葬)이 사체처리방식으로 널리 이용되었고, 가난한 사람 중에는 간혹 풍장(風葬)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장법(葬法)은 국왕, 관리, 일반인 등 사회계층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데, 편의상 관리의 경우부터 먼저 살펴보자.
고려시대의 묘지(墓誌)에 의하면, 이 시기 지배층은 화장을 많이 했음을 알 수 있다. 화장은 불교용어로 다비(茶毘)라고 한다. 사찰 근처에서 화장을 하고 유골을 거둬 사찰에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리며, 어느 시일이 지나면 유골을 묻었다. 유골은 대개 석관(石棺)을 사용하였는데, 1미터 미만의 작은 판석 6매를 조립하여 만들었다.

◇석관(국립박물관 소장)
일반 서민의 경우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관도 없는 구덩이에 시신을 매장하였을 것이다. 또는 사체를 그대로 땅에 두고 그 위에 풀을 덮어 인적이 없는 산야에 방치해 두는 풍장이 간혹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화장을 한 후에 재를 산이나 강물에 뿌리는 방법이 있었다.
국왕의 경우 매장을 하여 성대한 분묘를 만들었다. 왕의 시신이 담긴 관을 재궁(梓宮)이라 하고, 재궁이 묻힌 곳을 능(陵)이라 부른다. 장례기간은 3년상의 변형인 이일역월(以日易月) 즉 27개월의 상례기간을27일로 바꾸어 장례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것은 국왕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정릉(노국대장공주릉)과 현릉(공민왕릉)
고려시기에도 유교식 상례절차로 상복착용 기간을 규정한 오복제도(五服制度)가 있었다. 원래 부모의 상을 당하면 관리는 관직을 그만두고 3년상을 집행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에서는 부모상인 참최3년, 재최3년에 각각 100일의 휴가를 주고 1주기와 2주기에 7일의 휴가를 주어 약식으로 3년상을 마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관료의 백일상은 재야사족들이나 서민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고려 후기가 되면 백일상이 일반화된 듯하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장례의식은 고려말 성리학이 수용되고 '주자가례'가 보급되면서 조선시대에 들어와 서서히 유교식 상례로 변모하게 되고 결국 유교식 상례는 우리의 전통상례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이우석(부천대 강사, 중세1분과)

*그림은 제외했습니다. 고려장은 일본식민시대에 일본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폄하하고 도굴을 목적으로 만들어진(=뜻을 아예 바꿔버린) 용어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학교에서 그런것을 가르치는 지 몰라도, 신문기사를 보면서 "고려장은 고려시대에 늙은 부모를 내다버리는 풍습"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