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긴글이지만 한번쯤 읽으면 득이 되는 것이 꽤 있으실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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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은 «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세계 4대 성인 중 가장
위대하다고 존경하는 사람이라도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는 고백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신적인 존재의 실재를 순간순간 체험하며 초인간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이
고백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인이 아닙니다.
통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을 하는데, 이것은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는 문장의 축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일반적인 오해되고 있듯이 하나의 이름이 아닙니다.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칭호입니다. 구성 형식 면에서는 “노무현 대통령”과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이름과 칭호를
같이 붙여 말하면서 그가 곧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리스도시라는
신앙고백을 이해하려면, 예수는 누구인지, 그리스도는 무엇인지, 또 왜 예수가 그리스도로 고백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가 누구였는가에 대한 접근은 필연적으로 역사적 접근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역사성은 의심되지
않았었습니다. 예수를 경험했던 사람들의 경험담에 기독교가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역사성에
대한 질문은 불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기독교 신학이 발달하면서 신학이 학문성을 갖추려고
노력할 때 이 질문은 물어지게 되었습니다. 약 200년 전부터 역사학과 문헌학 등 광범위한 인문과학의
방법론과 성과들을 바탕으로 실제 예사는 역사적으로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과학적으로 물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아직 논의가 진행 중이지만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예수가 누구였는지는 알려주는
객관적 사료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의 역사성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개 예수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연구자의 의도와 상상력에 의해 조작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후에 인도로 갔다거나
프랑스로 망명했다는 추측들도 명백한 역사적 근거를 갖는 사실이 아니라 연구자의 상상력에 더 많이
기대고 있는 생각들입니다. 거의 유일하게 예수에 대한 장황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은 성경, 그 중에서도
네 개의 복음서밖에 없습니다. 물론 몇 개의 글들이 더 있지만, 그 글들의 공정성은 기독교인들에게서
조차 의심을 받고 있기 때문에 거론하지 않겠습니다.(이 글들은 위서로 분류되는데, 전문적인 연구에서는
기여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복음서마저도 객관적인 사가에 의해 쓰여진 역사기술이 아니라 이미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 즉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진 글이고, 쓰여진
시기와 방법도 객관적 사태를 기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복잡한 이론을 피하기
위해 간단하게 말하자면, 경험한 일들을 몇 십년 후에 기억을 더듬어 기록하다보면 생기는 혼동과 어려움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는 역사적으로 실재하지 않았다거나, 복음서의 기록이 단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지어낸 허구’로 치부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비록 역사적 실체를 규명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오히려 그 사람들로 하여금 목숨을 내건 독특한 믿음을 갖게 한 어떤 역사적 실체가 있었으리라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예수라는 한 사람을 신격화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왜곡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복음서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의 인간적인 면을 의도적으로
상당히 부각시키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묘사하는 예수는 고단을 느끼기도 했고,
배고프기도 했고, 실의에 빠지기도 했으며, 외로워하기도 했고, 때로는 슬픔에 빠져 울기도 했고, 심지어
욕설을 퍼부으며 화를 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혹을 받기도 했으며, 상처가 나면 진짜로 아파하고
피를 흘렸던 진짜 육신을 가지고 있던 한 사람으로 묘사를 합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이 살던 시대는
오늘날과는 달리 육체를 경시하고 지고한 영적인 세계를 흠모하던 그리스 문명이 지배를 하고 있었고,
강력한 왕권의 실현을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제국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예수를 육체로 묘사
하고 처형된 범죄자로 그리는 것은 신격화의 의도에 의한 조작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어떤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비난받던 한 사람 예수를 통해서 참된 신을 체험했다고
확신에 차게 된 것입니다. 사회 질서를 어지립히고 신을 모독한다는 죄목으로 잡혀서 재판을 받았는데,
재판받는 동안 한 명의 변론인도 나서지 않았고(요즘말로 왕따), 처형 과정에서는 만인이 보는 앞에서
벌거벗기우고, 침세례를 받기도 하고, 채찍질 당하고 손발에 못을 박고 허리에 창을 찔러 피가 낭자한
충격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죽어간 어떤 사람을 보면서 오히려 그 사람을 ‘신’과 같이 여기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어떻게 그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때, 정확히 말해서
어떻게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라고 믿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때, 기독교 신앙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야”란 말의 번역입니다. 메시야는
원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을 뜻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경험을 통해서 구원자의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야의 출현을 고대하였
습니다. 이스라엘은 약소국으로서 독립된 주권을 확실하게 갖춘 국가를 형성하기보다는 주로 외세에 의해서
침략되고 포로로 끌려가 부역을 하는 등 수난의 역사를 보냈습니다. 그나마도 단일국가를 형성하지도
못했고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같은 민족 간의 동족갈등도 심각했습니다. 그 수탈과 고통, 분열 속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줄 어떤 존재를 기다리는 믿음을 키워갔습니다.
그들은 그 존재를 메시야라고 부르며 기다렸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동일한 메시야
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과 같은 왕 같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독립된 통일왕국을 이루었던 왕으로 존경을 받던 왕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훗날
메시야가 온다면 다윗의 시대처럼 분단없는 통일된 왕국과 외세 침략 걱정없는 부강한 나라를 만들 그런
왕일 것이라고 여기고 기다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다 완벽한 전쟁영웅을 기다렸습니다. 다윗도 전쟁
영웅이었지만 그들은 그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 전사가 와서 자신들을 식민통치하는 외세를 몰아내어
정통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고 기다렸습니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이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런 군사적 영웅의 출현을 기다렸던 사람들은 소수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신의 세계로부터 직접 하늘의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해방하러 오는
신적인 존재의 출현을 기다렸습니다. 구약에서는 다니엘서가 대표적으로 이런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메시야의 성격이나 내용은 이렇게 달랐지만 “기름부음을 받은 이”가 오리라는 것은 당시 공통적으로
확고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기다림과 관련되어 스스로를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왕왕 나타났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예수가 등장했습니다. 예수는 최소한 공관복음서의 내용을 보면 스스로 메시야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암시적으로 자신이 메시야임을 인정했다는 구절들은 있지만 스스로
메시야임을 실제로 주장했으리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예수가 오히려 강조했던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란 이 땅 위에(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게
된다는 의미였는데, 그 안에는 물론 종말론적 표상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예수의 주장과 당시 기다림이
어울어져 예수를 메시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몰려든 사람들은 곧 실망하고 예수를 떠나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를 발견하지
못하고 실망하고 변심하고 돌아섰습니다. 심지어 예수 스스로 자신은 그들이 기다리던 그런 메시야가
아니라고 선언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과 예수에 대한 실망 속에서 예수를 떠났던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은 예수의 제자 중 하나였던 유다였습니다. 유다는 세인들이 가진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예수에게서 기대했는데, 예수가 그렇지 못한 것에 점점 좌절과 실망이
깊어져서 변심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다처럼 예수에 대해 실망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라바와 예수 중 누구를 특별 사면할 것인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르게 했는데,
모두 바라바를 골랐다고 합니다. 이 장면은 그 전까지 예수를 추종하며 예수 주변에 사람들이 운집했던 것
과는 반대가 됩니다. 그렇게 예수에게 끌려 따랐던 사람들이 어떤 계기, 즉 기다리던 그 메시야가 아니라는
실망감으로 예수를 떠났다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로 알려진 베드로도 결코 세인들이
가진 메시야관 없이 초지일관 충정을 지키며 예수를 따랐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예수가 자신의
제자들을 이끌고 북쪽 지방으로 옮겨가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
도입니다”라고 최초의 기독교 신앙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즉 베드로는 인간 예수가 신에 의해 보냄받은
기름부음받은 자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고백을 한 시기는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죽어들고 있었고, 그래서 언제든 곧 잡혀가 처형달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던 때임을 감안한다면
대단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읽다보면 곧 베드로의 그 고백은 정답은 아니었음이 밝혀집
니다. 예수는 베드로를 칭찬한 후에 ‘인자가 고난을 받을 것’을 예고합니다. 여기서 인자,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종말론적 존재인데, 그런 존재가 고난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고난받는 종이라는 사상을 표현하는데, 그것은 그가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이 저지른 죄까지 도맡아
대신 고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다니엘서의 신적인 존재와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종을 결합시켜서
자신의 처지와 운명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펄쩍 뛰면서 그러시면 안된다고 만류를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로부터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호되고 꾸중을
듣게 됩니다.(“사탄”이라고까지 불립니다.) 이 일화에서 베드로가 한 만류는 뭇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세기 동안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야를 기다렸는데, 그 메시야라고 여겼던 예수가
이스라엘을 해방하기는커녕 오히려 죽게 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가
그렇게 죽는다면 오랜 시간 이스라엘 민족의 기다림은 허사가 되고, 반면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 사기꾼
같은 인물 이상은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과 피로 기다렸던 메시야의 모습과는 달리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나무인데, 나무에 달리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신의 저주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그러므로 신이 보낸
메시야가 아니라 신의 저주와 버림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십자가형은 내란죄와 같이
정치적인 범죄자에게 내려지던 최고형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관습으로는 신에게 버림받은 존재로 처형
되었고, 로마법으로는 정치범으로 처형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는 당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죽어갔습니다. 그것은 당시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시각에서도 뭔가를 성공한 사람의 일대기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은 이 희대의 처형이 있은 뒤 다음 차례로 자신들이 처형될까봐 두려움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처형되기 전날까지만 해도 같이 밥먹고 술마시던 스승이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목격한
제자들은 두려움에 자신이 예수랑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처형이 있은 후에는 모두 흩어져 은신처를
찾았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그 사람들은 예수가 처형당한 후 모였을 때 문을 걸어잠그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것은 그들이 가진 두려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즉 스승 예수가 처형된 마당이니까 이제 자신들이
색출되고 끌려가 고문당하고 처형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숨어지냈고, 또 계속 숨어지내야할 이들이 당당하게 나타나서 백주대낮에 방방곳곳 ‘좋은 소식’이란
것을 전하고 다니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태도변화는 주위사람들에게 충격이었고, 또 기존세력에는
골치거리가 되었는데, 그래서 이들을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변화시켰는가? 그것은 이들의 증언을 따르자면 부활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린 바되어 처참히 처형된 예수가 다시 살아났음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 경험의 객관적
증거는 '빈무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 세인들의 믿음과는 달리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나섰던 것은 사회개혁프로그램이나 윤리적 실천의 내용이 아니
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복음’의 내용으로 삼고 나섰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로부터 예수가 좋은 믿음의 내용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 자체가 됩니다.
그렇게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이루어지고 전파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믿고 증거했던 ‘복음’ 즉 ‘기쁜 소식’은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두 내용은 독립된 사건으로 보기보다는 하나로 결합되어 기독교 신앙을 표현합니다. 십자가에 초점을
맞춰서 보자면, 이들의 신앙내용에서 십자가는 본보기였고, 또한 심판이었으며, 반대로 화해이고,
승리였습니다.

십자가의 본보기. 십자가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범죄자를 처형한 형틀이었는데,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는 본보기로서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정국이 험악해 질 때는 각종 책임을 물어 잡아다가 처형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희생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자기가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끌려가 사자밥이 될 것을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본보기로 여겼습니다. 베드로도 그리스도의 고난은 본보기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인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참히 죽어갈 만큼 자신들을 사랑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그 예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그 사람들은 일반 사회의 가치관이나 지배이데올로기, 사회적인 성공과
안정된 삶, 인정받음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의 삶과 죽음, 그의 가르침으로 보여진
사랑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당당히 죽음을 맞이할 뿐만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그렇게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기도 했고, 죽어가는 순간에는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 사람들의 안녕을 빌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사태를 지켜보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로마 사람들이 마음에
큰 찔림을 받았을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도 자신을 돌로 쳐 죽이는 이스라엘
군중을 위해 기도하는 스데반 집사의 모습을 보며 당황하며 자책을 갖게 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기독교인들의 모습에서 당시 세인들은 감동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모습은 이미 예수가
십자상에 메달려 죽어갈 때도 보여졌다고 합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메달려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했다고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의 이런 본보기가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의 찔림과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입던 옷가지들을 독차지 하기 위해 그 참혹한 형장에서 주사위 놀이를 하기도 했다고 하니까요.
그렇게 예수가 보여준 사랑을 보기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예수로부터 얻게 되는 어떤 물질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죽어
가는 예수에 집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직접적인 이득을 가져다 주는 산타할아버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를 뒤집어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능력 그 자체였습니다.

십자가의 심판.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가 본보기일 뿐 아니라 자신들에
대한 심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들은 십자가를 통해 모든 인간이 가진 위선과
허위, 음모가 심판을 받고 있다는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실존적으로 보자면, 3년 넘게 추종하며 따라
다니던 제자 베드로가 순간의 위기를 넘기기위해 예수를 모른다고 거짓말을 한 후 멀리서 자기 스승이
처절하게 죽어가는 것을 볼 때 가졌을 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자신가 가진 비겁함과
기회주의적 욕망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또한 구조적인 범죄가 어떻게 정당화되어
나타나는가를 보여줍니다. 복음서의 내용에서 볼 때, 예수는 조작된 위증과 음모, 공정한 재판의 봉쇄,
증인매수 등으로 십자가에 못박힌 것으로 나옵니다. 불의하지 않은 사람도 정치적 음모에 희생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더 나아가 ‘선’의 이중성을 고발합니다. 소위 일반적인 ‘선’이 어떻게 ‘악’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은 사회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는 범죄자나 불량배가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인 지도자들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윤리적인 교사들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선진 로마 문화에 감화받은 교양인들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식민치하의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독립운동가였으며, 대개는 법을 옹호하는 정의로운
사람들로 뭇 세인들의 존경받는 사회 지도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사회 각층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이
연합해서 내린 결정과 계획에 따른 십자가 처형을 보면서 사람들은 어떻게 인간적인 선이 악으로 드러날 수
있는지를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십자가는 하나의 심판이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감추어진
선과 악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통해 이것을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십자가의 화해. 그러나 초대 기독교인들이 깨달은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자신들이
가진 ‘의’라는 이름의 ‘악’을 어떻게 실행하고 있는지를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그 인간들에 대한
신의 의도를 발견하였습니다. 즉, 십자가는 신과 인간의 화해라는 것입니다. 위선과 죄악 속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몰랐던 사람들이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죄악상을 깨닫게 되었는데, 이런 계기를 준 것은 스스로
희생당한 신의 사랑이라는 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화해란 관계의 회복인데, 신의 선행하는 실천과 희생에
의해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성을 고발하는 십자가 사건에서
사람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은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할 권력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과 신의
화해를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십자가는 신이 화해를
위해 직접 치른 대가이고 그런 엄청난 대가를 치를 만큼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런 사랑을 받을만한 존재가 아닌데도 허락된 거저얻은 사랑과 화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심판에서 드러난 죄악은 인간 자신의 죄악이었는데, 거기에서 죽어간 것은 예수였다는
깨달음은 예수가 인간을 대신해서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신과 인간의 화해에 대해 일일이
기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깨달은 것은 분명하게도 이와 같은 화해가 예수를 통해,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승리. 십자가가 원래 형틀이었다면(오늘날로는 교수대의 밧줄처럼) 십자가는 승리가 아니라
실패의 표상으로 보는 것이 정당할 것입니다. 예수를 종교 지도자로 본다면 예수는 십자가에서 종교적으로
실패를 한 것이고, 정치 운동가로 본다면 거기서 예수는 정치적 혁명의 꿈이 좌절되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신의 나라를 설파하던 사람이 신의 저주의 상징인 나무에 메달렸고, 수많은 사람들을 운집시키던
사람이 사람들의 외면에 의해 특사로 선택되지 않아 처형되게 되었고, 자칭 왕이라고 말하고 다녔다는
사람이 화려한 왕관은 고사하고 가시로 만든 관을 쓰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은 누가봐도 실패일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는 실패의 상징이 아니라 승리로 이해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명백하게
십자가는 승리였다고 선언합니다. 악과 죽음의 세력이 선한 사람을 형틀에 메달아놓고 자축하던 그때 신은
이런 조롱과 멸시 뒤에 부활이라는 승리를 심어놓았음을 본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러므로 최후의 승리,
궁극적인 승리의 예표로 고백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더 이상 절망과 죽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악의 일시적 득세에도 불구하고 종국적으로는 선한 신이 승리할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승리자였고, 그러므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가치관에 의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허무맹랑한 주장일 뿐일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합리적인 사람은 유한한 육체를 가진 어떤 인간이 무한한 신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종교적인 사람은 자신의 생명도 구제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현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사람을 능력의 사람으로 볼 수 없습니다. 윤리적인 사람은 사회질서를 교란하고 사회의 지도층을 비난하다가
범법자로 사형당한 사람을 존경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인은 이 역설들을 믿음의 내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연약한 육체 속에서 신의 현현을 경험한 사람들이고, 무기력 속에서 죽음을
이겨내는 생명을 발견한 사람들이고, 윤리적 허위의식 아래있는 인간의 원죄성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정치적, 종교적 메시야성을 부정한 한 사람의 희생 속에서 참된 구원자인 메시야를 발견한 사람들
입니다. 이런 역설을 용납하고 믿음을 갖는 것은 인간적 가치관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을 기독교에서는 신비라고 하고, 그것이 신비이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실패자 인간 예수가 승리자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인간의 지적 판단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신이었다는 것을 인간의 가치관 내에서는 증명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사람들의 증언 속에서만 그것은 증명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증명은
논리적 증명이 아니라 공감에 의한 증명이고 이해에 의한 증명일 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다시 사람이
믿음을 갖는 것은 성령의 감화로만 가능하다는 쪽으로 돌아갑니다. 기독교 신앙은 증명될 수 없는 신비라는
것입니다.


자투리 1. 구원론의 문제는 기독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또 하나의 복잡한 논의이기 때문에
             별도로 취급하지는 않았습니다. 기독론도 전체를 설명해드릴 수 없어서 질문 내용과 관련된
             부분들만 올렸습니다.
자투리 2. 기독교 교회가 사회 현실에서 비윤리적 행태를 자행하는 것은 비난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신앙에 대해 친사회적이어야 한다고 강제할 수도 없고, 사회형성에 적극적인 기여를
             해야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사회 이데올로기일
             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최소한 개신교 정신은 신앙의 이데올로기화에 항의합니다.
자투리 3. 현실 교회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기독교 신앙 자체가 폄하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살인등 각종 범죄가 있기 때문에 ‘홍익인간’ 사상은 잘못된 교설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정당한 지적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우리나라를
             비난하기 위해서 비난하는 것일 겁니다. 아무리 좋은 사상도 현실에서는 꼭 그 의도대로 표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 교회의 부패를 이유로 기독교 신앙 자체를 공격하는 것은 단지 기독교
             신앙을 공격하고 싶어서 억지로 하는 공격일 뿐입니다.
자투리 4. 현실 교회가 아무리 부패되었다고 해도, 그 교회는 기독교 신앙으로 정향된 교회임은 부정될
             수 없습니다. 나침반과 지도를 가진 썩은 나무배를 타는 것은 위험스런 일이지만 나침반도 없고
             지도도 없는 튼튼한 철갑선을 탄다고 원하는 항구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투리 5. 추천하고 싶은 영화는 몬트리올의 예수입니다. 그 영화도 역사적 예수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데, 역사적 예수 문제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들을 상당히 반영하고 있고, 그리스도 문제에
             대해서도 상징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건강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시면 아마
             기독교와 예수, 그리스도과 관련된 좋은 영감을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기독교교회
             협의회 평화상을 수상한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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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의 예수라는 영화를 보고 네이버 지식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