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의 테르모필레 전투

유선방송 "디스커버리 채녈" 에서 최근 스파르타의 테르모필레 전투에 관한 상세한 전쟁사를 더큐멘터리로 방영해주었다.

이미 헤로도투스의 페르시아 전쟁사에서 많이 본 이야기이고, 다른 더큐멘터리에서도 많이 다루어졌던 이야기이지만, 이번 더큐멘터리의 특징은 스파르타의 정신도 서양의 정신문화의 한 유산이라고 추켜주는 데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기로는 페르시아 전쟁사에서 결정적인 공을 세운 나라는 아테네이며, 그 아테네 문명이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그 문화를 서양에 대대손손 내려줄 수 있게 된 주요 공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테르모필레에서 방어전을 편 스파르타 군의 희생 덕택에 아테네는 후퇴할 시간을 벌었고 결국 페르시아를 물리칠 수 있었다는 것에서 스파르타도 아테네 민주정을 구한 공이 있다는 것인데.... 실제 스파르타는 이런 민주정하고는 거리가 먼 나라였다. 그런데?

스파르타의 국민들 구성은 특이하였다. 국민들 대부분은 전투원이었고, 농사나 산업에는 일절 종사하지 않았다. 이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수십만의 헬로트., 즉 노예들이었다.
이들 노에들에 비해 형편없이 수가 적은 스파르타인들은 당연히 이들 노예를 억누르기 위한 전쟁술에 전념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이 이른바 스파르타식 훈련이라는 엄격한 전쟁 훈련 체계를 만들었다.
몸이 튼튼한 엘리트들만 국민으로 키워야 하니 허약한 유아는 갖다 버린다... 건강한 유전자만 남기는 것이다.
그리고 외부에서 타국민들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성골, 진골들만 남아서 나라를 운영하니 국민들 숫자는 턱없이 적고 그 군대의 숫자도 적었다.
이렇게 배타적이니 다른 그리이스 도시국가들은 모두 스파르타의 적이다. 비록 스파르타군이 너무 강해서 감히 쳐들어오지 못할 뿐이지만... 이런 긴장관계 또한 스파르타인들을 병영생활에 매여도 불만을 안 가지게 만드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노에들을 다룬 솜씨는 특이하게도 암살 수법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반란의 기운을 가진 노예가 있으면 밤에 암살자들을 보내어서 죽여버린다... 마치 현대의 비밀경찰이나 일본 중세기 닌자들의 수법을 연상케한다.

왕은 두명이 존재하여 서로 견제하였다. 그리고 평민들도 왕에게서 자기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관리를 두고 있었다. 이쯤 되면 스파르타는 흔히 알고 있는 군사 독재 국가가 아니라 일종의 병영 국가, 즉 국민 전체가 장교급들로 이루어진 군대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왕이 독재를 할 수가 없고, 일종의 합참의장격으로서 부하 장교들의 의견을 중히 여기고 그들의 생각을 조정할 뿐, 맘대로 군사를 좌지우지 할 수없는 현대의 군대 체제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댱연히 이들 스파르타인들은 병영생활을 하느라고 결혼도, 가정생활도 모두 희생된다. 전쟁에 나가는 남편, 아버지를 보내면서도 마음껏 눈물을 보일 수도 없다.

스파르타인들의 정신무장은 철저하였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겁쟁이로 찍히는 것에 더 두려움이 컸다.

"전장에서 후퇴하는 자는 겁장이이다. 겁장이는 머리와 수염을 한쪽 반씩 깎이고 변경으로 쫓아낸다. 그는 다른 나라들을 방황하면서 겁장이의 말로가 무엇인지를 소름끼치도록 홍보하는 것이다..."

"스파르타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무기는 활이다. 활은 도망가는 병사가 뒤를 돌아 쏘면서 상대방이 접근 못하도록 하는 겁장이들의 무기이다..."

"스파르타인들의 이런 정신 무장은 그들의 광신적인 종교적 열정도 관계하였다. 그들은 1년 중 종교의식의 때만 되면 일체의 활동을 않고, 전쟁도 하지 않는다."

수십만을 노예로 불리고 상층부의 전투원으로서 잘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신의 은총 덕택이다... 당연히 그들은 신에 대하여 의심할 수 없으며 철저히 종교에 광신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신의 존재에 대하여까지도 회의하고 불경하기까지 하였던 학구적인 아테네인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Xerxe 황제가 20만 대군을 모아서 그리이스로 쳐들어온다. (더큐멘터리에서는 이것은 유럽대륙에 대해서 외부인들이 감행한,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으로서는 최대 규모의 침략전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는 그 후에도 1453년에, 그리고 1683년에 오스만터어키군 수십만이 그리이스와 오스트리아 비엔나까지 침략한 적이 있다. 유럽인들은 자기 조상들이 아시아인들에게 당하는 모습은 되도록이면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일전에 제 1차 원정 때에는 마라톤에서 아테네군에게 패하여 물러갔던 그들이다. 그 당시 스파르타는 종교의식의 때여서 방어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는 스파르타인들에게 큰 부끄러움으로 남았다.

이번의 페르시아군의 원정은 앞과 다르다 , 병력도 막강하고 결의도 강하다. Xerxe의 군대가 그리이스 북부로 진입하자 북부 그리이스의 도시국가들은 앞다투어 항복해버린다.

이런 상황에 스파르타는 어찌 할 것인가?

스파르타군은 한번도 나라 밖으로 원정을 떠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정예군이 자리를 비운 사이 수십만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은 종교의식의 때이다.  
게다가 그들이 힘을 합쳐야 할 그리이스 도시국가들은 이제까지 스파르타의 적이었다. 그런데 어찌 지금 그들을 돕는단 말인가?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의 역할이 여기에서 빛난다. 그는 정치력으로 국민들을 페르시아에의 방어전에 나가도록 설득, 권유하여하 할 처지에 있었다. 저 위에서 쓴 것 같이 스파르타는 왕이 2명으로서 그 권위는 아주 작다.  

그러므로 왕 레오니다스가 그 국민들을 설득하는 것은 매우 지난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꽤 시간이 걸렸다.
"페르시아에게 항복하면 저 수십만 노예들은 쉽게 반란을 일으켜 스파르타에서 도망칠 것이다. 그러면 우리 스파르타인들은 꼼짝없이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고 살아야한다. 스파르타라는 문명이 사라지는 것이다..."

결국 스파르타도 방어전에 참전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레오니다스가 이끌고 가는 군대는 겨우 300 명이었다. 왜 이렇게 병력이 적엇을까?  
역시 위에 든 이유때문에 자발적으로 왕을 따라 국외로 나갈 스파르타 병사들이 적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스파르타 왕은 확실히 별 힘이 없었고 일반 국민들이 스스로 정책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레오니다스 왕의 희생 정신은 더 빛나 보인다.

레오니다스 왕은 델포이의 신탁을 얻으러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신녀는 왕에게 무시무시한 신탁을 내린다.
"왕이 죽지 않으면 스파르타는 멸망할 것이다...."

아마도 이 신탁을 듣고 왕 레오니다스는 죽음을 스스로 택하기로 하였는지도 모른다. 왕인 자기가 죽음으로서 자기 조국이 구원될 수 있다면... 현대 서양 세게에서 흔히 보는 "오블레스 노블레제"의 원형이 여기에서 보이는 것이다.
( 더큐멘터리에서는 이 장면에 현대 미군 장교를 인터부하여 그 미군 장교가 이 레오니다스의 모범적인 행위를 매우 존경한다는 멘트를 보여준다. 그들 서양 군대 장교들의 정신 세계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그 더큐멘터리에서는 테르모필레의 그 당시의 지형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보여주어서 왜 이 곳이 스파르타군에게 천혜의 방어지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바다에 직접 접한 깎아지른 산 기슭 밑으로 난 가는 해안선, 이 좁은 정면을 스파르타 및 그 동맹군 1000 여명이 지키고 그들 우익의 바다는 아테네 해군이 막아준다...

Xerxe는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테르모필레에 이르러 5 일간을 기다린다. 스파르타인들이 겁먹고 도망칠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적들은 놀랍게도 꿈쩍도 않는다.

한 그리이스 척후병이 페르시아군 진영을 보고 와서 절망적인 보고를 해 온다.
"페르시아군이 어찌나 많은지 그들이 쏘는 화살이 해를 가릴 지경입니다."

그러나 스파르타 장군 데오게스는 호탕하게 받아넘긴다.
"좋아. 그러면 우리는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싸울 수 있겠군"

스파르타 식 교육은 엄격한 군사 교육 만이 아니라 절망적 순간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유머와 호방함까지 교육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 서구 군대들의 장군들에게서 흔히 보는 유머인데, 역시 스파르타에게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드디어 페르시아군은 스파르타군을 향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좁은 정면에 빽빽이 들어찬 스파르타군은 장창의 방진을 펴고, 페르시아군을 마치 고기 저미는 기계처럼 죽여 넘긴다. 페르시아군은 큰 희생을 본다.
Xerxe황제의 두 동생마저 죽는다. 황제는 크게 노하여 공격 사령관을 사형시킨다.
(스파르타군이 너무 용감하고 훈련이 잘 되 있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그 당시 페르시아군이 정예군이라기 보다는 여러 민족들로 구성된 속국 군대로서 사기도 별로이고, 군사훈련도 안되어 있었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저 숫자만 많았지...)

2일동안 큰 희생을 보고 저지된 페르시아군은 다른 방법을 찾는다. 테르모필레의 산중을 가로 질러 스파르타군의 배후로 전진할 수 있는 비밀통로를 그리이스인 반역자가 밀고한 것이다. 페르시아는 군대의 힘은 별로였으나 그 금화는 확실히 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앞뒤로 포위되어 버린 스파르타군과 레오니다스 왕은 절망적이었다. 왜 구원군은 오지 않는 것인가?

아마도 본국 스파르타와 다른 그리이스인들은 페르시아군이 그토록 일찍 비밀통로를 알아내리라고 예상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리라...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이 때에 레오니다스 왕은 스파르타 군만 남고 다른 그리이스 동맹 군사들은 탈출하라고 명령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진실일까?
아마도 그들 그리이스인들은 레오니다스 왕의 사수 명령을 어기고 도망쳤을 것이다. 그리고는 헤로도투스에게 자기들은 왕에게서 명령을 받았을 뿐이라고 변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파르타인들에게는 후퇴란 없다....300 명만 남은 레오니다스 왕의 스파르타군은 끝까지 남아 절망적으로 버티었다. 칼과 창이 부러지고 나중에는 이빨과 손톱으로 싸웠다. 마침내 그들의 모습은 흡사 피에 주린 야수의 그것과 같이 되어 페르시아군들도 더 이상 접근하기가 두려울 정도이다...
페르시아군들은 마지막 일격으로서 화살을 스파르타인들에게 퍼부었다. 이것은 스파르타군들이 가장 싫어하는 죽음의 방식이었다...

페르시아군은 레오니다스 왕의 시체를 발견하여 Xerxe 황제에게 가져간다. 황제는 레오니다스의 시체에서 머리를 잘라내어 창에 꿰어 전장에 세워놓는다... 다른 그리이스인들에 대한 본보기로서...

용감한 적장에 대해서 비교적 관대할 것이 기대되었던 페르시아 황제로서는 아주 잔인한 처사였다. 그만큼 스파르타군의 용감성은 페르시아게세 두통거리였다는 말이 된다.. ..  
(사실 이러한 처사는 내가 일전에 올린 "말타 공략전"에서 오스만 터어키군이 엘모 요새 함락 후에 이미 써먹던 것이었다. 동양에서는 용감한 적에 대한 경의심이 별로 없는 것이 전통이다..)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의 희생 덕분에 아테네는 후퇴할 시간을 벌고 결국 페르시아군에게서 민주주의를 지켰다. 자유와 민권사상을 주로 하는 서구 문명의 요람기는 무사히 보존되었던 것이다.

허지만 스파르타는 수많은 노예들을 자유가 없이 마구 부린 끔찍한 사회였다. 그런데 그런 나라 덕택에 민주주의가 지켜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 후 100 년이 지나 스파르타는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 사회의 저변이 붕괴됨으로써 멸망해버리고 스파르타식 교육이라는 이름의 전통만 서양에 남겨주었다.

우리는 흔히 서양문명의 모체라고 하면 아테네의 민주정치만 생각하기 쉬운데, 그와 정반대인 스파르타의 엄격한 군사 문화도 서양 문명의 모체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마치 동전의 양면이 있어 서로 반대라도 하나의 개체를 형성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