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선풍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킨 책 중 하나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였다. 그 책은 딱히 답하기 어려운, 정답을 내기 어려운 딜레마들을 제시하고 무엇이 정의인가?를 우리에게 묻는다. 딜레마는 대체로 '공리주의'적인 정의와 우리가 직관적으로 느끼기에 지켜져야 하는 '정의'가 충돌하는 상황으로부터 비롯된다.
우리들은 대체로 어려서부터 답이 명확한 문제를 제시받고 그에 대한 답을 내는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이 많다. 요즘 학교에선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그랬다. 그런데 답이 명확한 문제에 답을 내는 공부는 지식을 쌓는데는 유용할지 모르지만, 지혜를 쌓는데에는 별다른 도움이 안된다.
지혜를 쌓기 위해서는 답이 명확하지 않은 문제, 사람마다 다른 답을 낼 수 있는 문제를 탐구해야 한다. 그리스 신화나 옛날의 우화들을 살펴보면 딜레마를 제시하면서 듣는이에게 너의 해답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딜레마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는 자들과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지식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점을 스스로 시인하게 유도한다. 그리고 나선 주장한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건 그래도 알고 있다'
지혜가 정말 중요해지는 이유는 인생이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지 중엔 딱히 답이 정해지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치관은 평소때가 아니라 어떤 극한상황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모든 인간들의 가치관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좀 더 지혜로와지기 위해서 무엇을 공부하고 어떤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정의와 지혜에 대한 힌트를 알려주는 한 권의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이아스 딜레마 : 성과주의 사회의 치명적 허점을 해결하는 정의의 리더십. 폴 우드러프 저/이은진 역
이 책의 핵심 주제는 그리스 신화의 트로이 전쟁에서 활약한 두명의 영웅, 아이아스와 오딧세우스에 대한 이야기이다. 트로이 전쟁 이야기를 잠깐 해야겠다.
아가멤논 왕은 그리스 최고의 군인에게 그 명예의 징표로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하사하기로 약속한다. (아직 트로이 목마작전을 개시하기 전이다) 아이아스는 강한 충성심과 뛰어난 전투력, 부하들의 신망이 두터우며, 아가멤논 왕과 오딧세우스의 목숨까지 구한, 최고의 용사이다. 오딧세우스는 아이아스 같은 용사는 아니지만 천재적인 지략을 지녀 트로이의 목마 작전을 설계한 두뇌이다. 한명은 무력으로, 한명은 지략으로 그리스군을 구할 것이기에 그 공헌도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다만 아이아스의 전투력은 여러명의 군인으로 대신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오딧세우스의 지략은 유일무이한 것이고, 트로이군을 격파하는데 결정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나중에 논공행상이 벌어지게 되자 아가멤논왕은 누구에게 갑옷을 줄까 고심하다 두 사람에게 사람들 앞에서 왜 자신이 갑옷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변론하게 하고 사람들의 투표를 통해 결정하게 한다. 그 결과로 오딧세우스가 만장일치로 사람들의 선택을 받고 아이아스는 그 과정에서 심한 배신감과 모멸감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목숨을 건 헌신과 희생에 대해 목숨빚을 진 사람들이 자신을 선택하지 않고 그저 힘만 센자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아이아스는 이성을 잃고 날뛰며 아가멤논에게 갑옷을 내놓으라며 대드는 짓을 저지르고 만다.
속이 좁은 원칙주의자인 아가멤논은 군의 규율을 위해서라면 지휘관에게 항거하고 목숨을 위협한 아이아스를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하고, 아이아스의 부인과 다른 참모, 오딧세우스까지 아가멤논을 만류하지만 아가멤논은 뜻을 바꾸지 않는다. 압박을 받은 끝에 아이아스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상의 줄거리는 매우 간략화 된 것이니 관심있는 분은 원문을 읽어보시길 바라며, 아이아스 딜레마 책에서는 위의 상황에 대해 여러 인물의 1인칭 시각에서 사건을 들여다보며 딜레마의 구조를 파헤친다.
저자의 책에서 가장 비판을 받는 대상은 아가멤논 왕이다. 그는 매사에 형평성과 원칙을 강조하지만 궁극적으로 '정의'를 실천하는데 실패했다는 저자의 평가를 받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가멤논 왕의 입장이 되었다면 어떻게 했어야 더 정의로운 결과를 만들어냈을 것인가? 라는 질문의 답을 생각해보자.
절차를 더 형평성 있게 맞추어야 하나? 예를 들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최고의 용사로 인정받아야 하는 이유를 변론하는 방식으로 갑옷의 임자를 정하는 것은 아이아스에게 불리한 구조로 되어있을 수 있다. 아이아스는 육체적인 능력이 뛰어나고, 오딧세우스는 지략이 뛰어난데 힘과 머리의 대결에서 머리 중심의 결과를 선택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그렇다고 오딧세우스에게 불리한 대결을 제안해서도 곤란하다. 그렇다면 오딧세우스는 그리스군을 떠나갈 것이고 아이아스를 잃는 것보다 더 심각한 군의 손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는 흥미로운 지적을 한다. 이 선택과정에서 '형평성이 더 높아보이는 절차를 만들 수록, 상을 받지 못한자의 모멸감은 더욱 강해진다'는 사실이다.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은 '형평성과 정의는 다르다. 오히려 형평성에 대한 집착이 정의의 구현을 가로막을 수 있다' 라는 것이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히려 저자는 '진정한 정의'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정의를 구현하는데에는 '동정심' 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말하는 동정심은 불쌍하니까 봐주자 하는 식의 값싼 동정이 아니라, 사려깊음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숙고해보는 혜안을 의미한다.
비슷해보이지만 대체될 수 없는 개념들이 있다. 정의와 형평성. 리더십과 관리. 진정한 정의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진정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회사 안에서 뛰어난 사람을 잘 대우해주고, 성과가 부족하거나 조직에 도움이 되지 않는자를 가려내기 위해선 단순한 관리가 아니라 제대로 된 리더십이 필요하다. 기계적으로 맞춰진 형평성이 아니라 정의가 필요하다.
만약 아가멤논왕과 같은 팀장, 사장이 회사를 관리하면 어떻게 될까? 그는 눈에 보이는 형평성과 공정함만을 우선시한다.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대상 (아이아스의 힘과 충성심, 오딧세우스의 지략)을 억지로 비교해서 사기진작을 위해 인센티브를 제시한다. 그 과정에서 공정함을 강조하기 위해 360도 다면평가 같은 방식을 사용해 매니저 자신의 책임은 회피하고, 절차가 공정했음을 강조한다. 팀 안에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일한다. 어떤 사람은 능력이 뛰어난데 집에서 혼자 애를 봐야하기 때문에 근무시간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집에 일찍가거나 늦게 퇴근하는 경우가 잦다. 어떤 사람은 회사에서 야근도 많이 하고 보내는 시간은 많은데, 업무성과는 그냥 그만그만하다. 어떤 사람은 지시된 일은 딱 해내지만 스스로 업무를 제안하거나 남의 일을 도와주는 일은 드물고, 어떤 사람은 회사에 아예 살다시피하면서 프로젝트의 완성에 모든 것을 바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그래픽을 담당하는데 어떤 사람은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어떤 사람은 QA를 담당한다. 서로 다른 업무에 대해 어떻게 평가를 할 수 있을까?
이런 다양한 멤버들의 헌신을 단칼에 죽여버리는 것이 바로 '형평성'이라는 것이 역설적이다. '형평성'은 대개 관리를 쉽게 하고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한 관리자가 주로 내세우는 핑계이다. 사람들이 제각기 한 일과 공헌에 대해 제대로 평가와 건설적인 피드백을 제시하고, 능력이 부족한 자에게 차가운 질책을 하기 위해선 매우 높은 전문성의 지식,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진정한 리더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다. 그런 자질은 없으면서 결과를 만들어내고 싶은 관리자들은 어디서 '인센티브'가 동기부여에 효과적이라는 얘기를 주워듣고 사람들에게 '인센티브'를 제시한다. 그런데 인센티브를 주는데에는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기준에 맞는 '형평성'이란 것을 설계한다. 형평성을 설계하는 행위는 조직내에 진정한 목표보다 수치적인 결과를 강조하게 된다.
기계화되고 경직된 형평성의 기준을 제시하면 조직 내에 지혜는 고갈된다. 사람들은 그 '기준'에만 맞추는 꼼수에 골몰하게 된다. 근무시간을 잘 지키는 것은 조직 내에 중요한 약속이 될 수 있지만, 근무시간이 형평성의 잣대가 되어선 곤란하다. 근무시간 자체가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옛날 임진왜란때에는 병사들을 평가하기 위해서 적의 수급을 베어 그 수를 갖고 평가를 했었는데, 적을 물리치는 것보다 수급을 베어모으는 것에 더 골몰한 병사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결과는 목표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형평성같은 것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그냥 '잘~ 하면 된다'라는 얘기인가? 단순히 그런 허무한 결론은 아니다. 이 글의 진짜 교훈은 진정한 리더쉽과 기계적인 관리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기계적인 관리가 리더쉽을 대체할 수 있다면 회사나 팀에는 사장이나 팀장 같은 사람이 필요 없고 그냥 외주업체에 인사관리를 아웃소싱해도 될 것이다. 속좁은 아가멤논왕에게는 진정한 리더쉽이 없었고, 그리스군에는 애초부터 정의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아이아스 같은 몇몇 충성심을 가진 자들과 그 동료들의 형제애로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함부로 인센티브를 제시하면서 군인들의 전투의지를 독려한 것이 멍청한 짓이었던 것이다.
책의 말미에는 그렇다면 아가멤논왕은 지옥에 가서 '난 어떻게 했어야 했소?' 라는 질문을 하고 저자가 답을 하는 장면을 구성해놓았다. 그는 아이아스와 오딧세스라는 두 인물이 갑옷을 두고 경쟁하기 이전에 먼저 그리스군에 제대로 된 리더쉽를 심어놓았어야 했다. 이 트로이 전쟁이 애초에 무리하게 대의명분 없이 여자문제로 시작된 것부터가 정의롭지 못한 출발이었다. 쓸데없이 자존심때문에 부하들과 적 시민들을 희생시키지 말고 돌아갔어야 했다. 정말 대의명분을 갖고 시작한 전쟁이었다면 지휘관이 부하장수,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이 전쟁이 왜 숭고한 목적을 갖고 시작되었으며 왜 적들을 반드시 섬멸했어야 하는지를 마음에 와 닿도록 설파했어야 옳다. 카르타고의 용장 한니발은 바로 그렇게 싸워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민족들로 구성한 군대로 초강대국 로마를 빈사상태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딜레마는 어떤 한 차원 내에서 충돌하는,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딜레마이다. 그 딜레마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차원을 높여서 생각해야 한다. 질문 내에 포함되지 않은 배경과 외부요소들을 생각해서 답을 낼 때 딜레마는 깨지고 지혜를 얻게 된다. 1차원 문제에 대한 1차원 문제의 답은 지식이지만, 2차원에서의 답은 지혜인 것이다.
수학적으로 볼 때 X^2+1=0 같은 답은 실수체계에서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프를 그려보아도 포물선이 x축과 닿지 않는 것은 명백해보인다. 하지만 복소수 체계로 가져가면 답은 2개(i, -i)나 나온다. 차원을 끌어올려야 딜레마를 풀고 지혜를 발견한다. 인간은 복소수체계를 발견하고 나서 엄청난 수학적, 공학적, 물리학적 진보를 이루었다. 지혜의 승리다.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자극하기 위해 문제를 낸다. 공안 자체가 딜레마이고 보이는 차원 내에서의 답은 없다. 차원을 넘어서야 답이 나오고 지혜로의 문이 열린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알려진 답을 카피한다고 해서 지혜로운 답이 될 수는 없다. 차원을 끌어올려야 한다. 1차원 상에 움직이는 개미들이 지나가다 부딛히면 2차원의 사람이 볼 때는 '옆으로 돌아가면 되는데 답답하다' 라는 생각이 든다. 낮은 차원에서 놀면 답답한 딜레마 밖에 보이지 않는다.
리더십은 조직의 존재이유에 대한 차원을 끌어올린다. 그냥 생계를 위해 월급받으려고 모인 사람들의 조직이 1차원적 조직이라면,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라는 목표를 갖고 열정으로 뭉친 조직은 그보다 높은 차원의 조직이다. 애플은 인센티브 체제가 잘 설계되서 성공한 회사가 아니다. 세상을 바꾸는 목표를 이루려고 사람들이 모였기에 성공한 회사다. 이루었던 목표를 마친 사람들 중에는 허탈해져서 나온 사람들도 많다.
북한이 다시 연평도에 포격도발을 하면 우리 군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확전의 위협을 무릅쓰고 그 이상의 보복타격을 하고 평양을 향해 전투기 편대를 출진시켜야 하는가? 아니면 사태를 주시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지 않도록 미함모를 이동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통해 간접적인 압박을 가하는 외교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가? 역시 딜레마다. 어느쪽을 택하건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해답이 아니다. 여기까지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대응타격한다. 타격하지 않는다'라는 차원의 답이 아닌, 질문 밖에 있는 차원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점을 이해할 것이다. 대선후보들이 이 문제에 대해 여러가지 답을 했었는데 나에게 묻는다면 '애초에 북한이 도발을 하지 못할 상황을 만들고, 만약 그랬는데도 도발한다면 보복 원점 타격을 실시한다'라고 답할 것이다. 애초에 도발을 못하게 만드는게 최선, 원점 타격이 차악, 아무것도 못하고 얻어맞고 바보되는게 최악이다. 최악이나 차악의 선택은 그냥 선택만 하면 되니까 실행하기 쉬운데, 최선안은 실행하기가 정말 어렵다. 그래서 지혜가 필요하고 리더십이 필요한 것이다.
마이클 샌델 식으로 우리편 5명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무고한 1명의 목숨을 해칠것인가 말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동일한 답을 할 수 있다. 우리편 5명이 모두 죽는 것은 최악. 무고한 1명이 죽는 것은 차악. 애초에 그렇게 안되도록 만드는 것이 '최선'.
인기 미국드라마 '24시'를 보면 잭 바우어라는 주인공을 통해 끊임없이 '딜레마'를 제시한다. 잭 바우어는 각 상황마다 무자비한 결단을 통해서 답을 찾고 최악의 상황을 피해낸다. 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런 딜레마에서 잭 바우어처럼 '차악'을 선택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런 딜레마에 애초부터 안 가게 될 '최선'의 지혜로운 방법이다. 그래서 주기도문에도 써있지 않나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imcgames 의 김학규입니다
황경필// 정의란 무엇인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황경필 님께서 말씀하신 정규재의 거시적 정의가 공리주의 아닌가요. 적어도 피해받은 사람이 존재하는데, 다수가 이득을 본 걸로 끝나면 안됩니다. 투표를 통한 민주주의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야 하는게 다수의 이득이잖아요. 현대 사회에서는 정책에 피해받은 소수를 위한 조치에 다시 정의가 갈라진다고 봐야하구요. 거시적이던 미시적이던 한 시점에서 정의가 이뤄졌다고 끝이 아닙니다. 더 거시적으로 미시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가뭄에 의한 기근에 대해 말씀하셨네요. 본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애초에 가뭄이 생기기 전에 가뭄과 기근의 연결고리를 끊는 시스템이 마련되었어야죠. 거시적 정의란게 결국에 조치를 게을리한 지배층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하기 좋은 핑계 아닌가요.
황경필 / 이야기하고자 하는바가 무엇인지 잘 이해가 안됩니다. 그저 제가 이해한 바 대로 따르자면
본문은 어떤것을 행하는것이 정의이고 형평성있는 선택인가를 정해야 할것 같은 문제가 사실은 차악을 선택하는 문제이고, 그 선택을 하기 이전에 문제를 단순화 시켜서 우를 범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한차원 높게 생각하여 거론되지 않은 전반적 조건까지 고려, 그런 문제자체가 안일어나게 하는 것이 정의이고 지혜이다. 라고 말한다면, 말씀하시는 바는, 그저 차악이라고 믿는것이 차선일수도 있으니 미시적거시적관점을 다 고려해서 판단해야한다. 라는 이야기 아닌가요? 마이클 셀던이 부족하고 자시고의 문제를 떠나서 이건 완전히 다른 문제인것 같은데요? 그림의 색깔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그림의 형태론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지적과 뭐가 다릅니까?
본문은 차악을 선택하는 방법을 거론한게 아니라 그걸 고민하기 이전에 한차원 높은 고민을 해보자 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말씀하신 박제가 이야기를 빌자면, 악덕?상인을 처벌하는 것이 정의인가 내버려두는 것이 정의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황경필님의 주장이시라면, 마이클샐던의 이야기는 악덕상인이 생길만한 요인자체를 애초에 봉쇄하자는 이야기인데, 이건 그냥 분야가 다른 이야기인것 같습니다.
전쟁도 그렇습니다.
하나의 국지적 장소에서의 분쟁을 '전투'라고 하고
그러한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것은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전투의 지략적 요소, 지형적요소, 무력적 요소를 모두 한방에 무시할 수 있는 한차원 높은 '상위'개념을 바로 '전술'이라고 합니다.
이 전술은 해당 전투 자체를 아예 일어나지도 않게 만들만큼, 지역적 요소를 가볍게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경우 경남일대에서 형성된 전선을 무시하고 뒤통수를 침으로서 전선자체를 의미없게 만들어, 해당지역의 전투 자체를 무시한
'전술'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머리로 해당전선의 전투승리 방법을 모색했어도 다 무용지물이 되는 고차원적인 해결방법이었죠.
'전술핵'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전투자체의 승패와 관계없이 해당지역을 '지워' 버리는 매우 강력한 무기는 '전술'급 무기라 불리는데 대표적인 것이 핵이죠.
하지만 이런 전술조차 무시하는 개념이 또 있으니 그게 바로 '전략' 입니다.
전략은 말하자면 전쟁자체를 무시할 수 있을만큼 파워를 가진 상위차원개념입니다. 전술이 전투를 없앨 위력을 지녔다면,
전략은 그 전술조차도 필요 없게 만들만큼 애초에 전쟁 자체를 회피할 능력을 지녔습니다.
뛰어난 외교전략은 애초에 터질 전쟁을 막을수도 있습니다. 한미수호조약으로 대변되는 한미관계가 남북한의 전쟁을 막고 있는것이 바로
대표적인 외교전략이죠. 이 전략 덕분에 한반도에서의 전투와 전술의 불씨가 번지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죠(인정하기는 싫지만 군대 다녀온분들은 알수 밖에 없는 사실)
위의 핵을 언급하자면 전술핵이 아닌 전략 핵도 있습니다.
위력이 전술핵조차도 가볍게 뛰어넘어 아예 전쟁 억제력을 지닌 핵 말입니다.
일반적인 핵 미사일은 위력도 문제지만 그 타격의 어려움때문에 전쟁자체를 억제하기에는 약간 미력한 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두가지 핵미사일은 다릅니다. 바로 사정거리 2만키로에 달하는 대륙간탄도탄(ICBM)과 전략핵잠수함에서 발사되는 핵입니다.
지름 4만키로인 지구는 사거리 2만키로만 되면 사실상 지구의 모든곳이 사정거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토의 핵위협이 있는 상황에서
탄도핵미사일 보유는 사실상 전쟁억제력을 지닌 전략무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작정하고 숨으면 찾을 수 없고 보복자체가 목적인 전략핵잠 또한 그 타격능력면에서 역시 전략무기라 할만합니다.
어떤것이 전투를 이기는 법이냐,
옳은 전술이냐를 논하는 것과
상위개념인 전략등을 활용하는 지혜를 기르자는 이야기는 서로 다른 핀트가 아닌가 합니다.
정말 재밌고 유익한 글이 아닐 수 없네요.(주기도문으로 마치실 줄이야!)
'게임계의 조엘이 되겠다.'
'자녀를 위해 저서를 남기겠다.'라는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은데
어떠한 결과물이 만들어질지 기대가 됩니다.
저서 외에도 추후 소프트웨어나 사업적으로 구현되어질 부분도 궁금하네요.
'형평성이 더 높아보이는 절차를 만들 수록, 상을 받지 못한자의 모멸감은 더욱 강해진다' 관련하여...
민주주의 + 자유주의가 그나마 견딜만 한 것은 애초부터 불평등하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을 어디선가 읽었던 것 같습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지는 못했지만 정규재씨의 비판을 보자면 마이클 샌델은 정의에 대해서 한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건 거시적인 영역에서의 정의와 미시적인 영역에서의 정의가 다르다는 부분이죠.
이부분을 정규재씨가 경제학을 통해서 집요하게 비판했죠.(정규재씨는 거시적인 정의와 미시적인 정의라는 부분을 거론하지 못하셨지만 어렴풋이 인식하시고 말씀하셨다고 봐야죠.)
대표적으로 태풍으로 인해서 가게가 한군대만 남았는데, 그 가게 주인이 물건값을 폭등시켰다는 부분에서 그 가게주인이 사실은 옳았다가 정규재씨의 지론이죠.
정규재씨는 자유경제적인 관점에서 그렇게 보셨지만 거시적인 정의로서도 틀리지 않았죠.
그 이유를 정규재씨는 조선시대를 예로 들어서 박제가와 왕이야기를하죠.
경기도에 가뭄이 일어나서 식량가격이 폭등하자 왕은 폭리를 취하려는 상인을 처단하려고하자 박제가가 나서서 막았다고하죠. 그러면서 말하기를
"전하 지금 경기도의 쌀가격이 폭등해서 전국에서 쌀을들고 경기도에 팔기위해서 몰려들고 있는데, 폭리를 취하는 상인을 처벌한다면 쌀을 들고오는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버려 아무도 쌀을 팔려고하지 않을 것 입니다. 그러니 그 청을 거두어주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왕도 박제가의 말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고 수능했죠.
그 결과 전국의 쌀이 경기도로 몰려들어서 폭등하던 가격도 진정이되고 경기도에 부족했던 쌀도 균형을 찾았다고 말하죠.
이게 안돌아가는 대표적인 나라가 북한하고 문화대혁명시기의 중국, 스탈린이 수천만명 굶겨죽였다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이죠.
즉 이들 나라에서는 이동의 자유가 없고 상인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국가에 의해서만 식량이 이동되고 그 결과 국가가 식량을 이동시키는 능력을 상실하자 다른곳에는 충분히 기근이 일어난 이들을 먹여살릴 수 있는 식량이 존재하는데도 그 식량을 이동시키는 사람이 없어서 사람이 굶어죽는 사태가 벌어졌죠.
반대로 지금의 북한은 상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상인들이 중국에서 식량을 구입해서 북한내부에 팔기 때문에 고난의 행군당시와 비교도 할 수 없을정도로 아사자가 줄었습니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태풍이 일어난 지역의 상인이 폭리를 취한것은 불의한 일일지는 몰라도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렇게 물건가격이 폭등했기 때문에 다른곳에서 그지역으로 물건을 팔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일시적인 식량부족이 빠르게 해결되는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볼 수 있죠.
이걸 가장 확실하게 거론하는 사람이 마키아벨리죠.
마키아벨리는 정의가 미시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이 있다고 명확하게 말합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약속을 지키는 것은 미시적인 정의고, 수 많은 국민들을 살리는 것은 거시적인 정의입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 당시의 영주들은 영주끼리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수 만명에 달하는 국민과 영주민이 죽는 사건이 일어나는데도 영주끼리의 작은 정의를 지키는 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합니다.
간단하게 이길 수 없는 전쟁인데 영주끼리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참여해서 많은 영주민을 죽게만든다거나, 자신의 지역에 기근이 일어났는데도 다른영주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하거나 돈이나 식량을 빌려주는 방식등으로 말입니다.
마키아벨리는 그래서 그런 작은 정의를 깨버리고 자신의 영지발전과 국가발전 국민들을 위해서 영주와 군주가 작은 정의를 깨버리고 보다 큰 정의를 지키라고 말하는게 군주론의 핵심이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이런 부분에서 매우 부족한 책인 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