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입한지 쓰는 첫 글이 비추천이라니, 게다가 약간의 스포일러도 있으니 안보신 분은 그냥 제목대로 비추천이란 것만 각오하고 읽지 마세요. ]


누군가 워쇼스키 형제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매트릭스에서 암울하고 멋진 배경을 만들어서 액션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디스토피아를 만든 것입니까? 아니면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을 이야기하는 과정에 액션을 가미한 것 뿐입니까?

워쇼스키 형제는 이 영화 '브이 포 벤데타'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주제 의식이 더 강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액션이 빠진 매트릭스가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읽힐 수 있을까요? 굉장히 무거운 주제를 암시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디스토피아는 SF의 핵심이 된지 오래입니다만, 익숙하다고 해서 충분한 겁니까?

브이 포 벤데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체주의를 반대하기 위한 또다른 전체주의처럼 보일 뿐이에요.

매스 게임 같은 집체 의식은 전체주의의 상징이지만, 이 영화의 말미에 나오는 '반전체주의 민중들'의 움직임은 지극히 일사불란하여 오히려 더욱 전체주의적으로 보입니다. 결국 브이의 혁명을 기억한 민중들은 브이가 쌓았던 도미노처럼 그렇게 쉽게 조종된 것입니다.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들 집단씬처럼, 멋진 화면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집단 무용이 제격이긴 합니다만, 오히려 '집단의 힘이 아름답다'는 메시지만 전달해버렸군요.

브이 자신의 문제도 큽니다. 바로 지극히 우생학적인 관점에서 만들어졌다는 태생적인 문제점 때문에, 그는 전사를 단련하기 위해서 자신이 당했던 것과 같은 방식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문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전사로 거듭난 브이 자신이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고,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걷게 하는 효과는 분명히 있습니다만, 그 방식으로 다음 혁명 전사를 재생산한다면 그 자신이 전체주의의 끄나풀이나 다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재생산된 전사들에게 무슨 임무가 있었냐 하면, 그것은 그저 간단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브이 개인에 대한 연민과 동조로도 충분히 가능했던 일이고, 결국 개인적인 경험으로 강함을 얻었지만 굳이 폭력을 끌어들여야 했을만큼의 성과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게 문제입니다.

액션을 자제하는 대신 적과 흑의 조화로 시각적인 화려함을 주거나 미래적인 배경 안에서 고전 음악을 사용한다든가 하는 방식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이 영화는 도무지 2시간이 넘는 시간을 뭘로 채웠는지 모르겠는 허망함만을 줄 뿐입니다. 어디서 본 듯한 뻔한 설정, 바이러스가 퍼지고, 지하철, 정수장, 학교가 오염되고, 너무 흔하지 않습니까? 소재 자체의 진부함은 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주장 아래 묻어둡시다. 그걸 제외하면 또 뭐 대신 내세울게 있었습니까? 히틀러 같기도 하고 후세인 같기도 한 셰틀러 의장의 모습은 화면을 가득 메운 얼굴과 지저분한 수염 때문에 이미 충분히 비호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파블로프의 개처럼, 더러운 얼굴을 한 독재자를 반복해서 본다는 것이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감으로 기억되어야 한다는 설정이라면 좀 너무 우롱하는 것 아닙니까? DC코믹스의 원작 만화가 있었던 모양인데, 과연 지난 시대에 통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아닙니다.

미국은 문화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다양성을 누려왔고, (다양성이라기보다는 방종함이란 말이 더 ㅇ울립니다만) 때문에 그들이 겪는 정치적인 획일성에 대한 위기의식은 이해가 가는 바입니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이후에도 전체주의는 발전해왔고, 20세기 초반보다 훨씬 세련되어진 전체주의 사회에 살아본 한국인으로서는 아직도 전체주의를 이야기하는데 히틀러와 나치를 가져다 쓰는 뻔뻔한 나태함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그렇게 노골적인 전체주의, 애국주의, 물론 주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만 요즈음의 세련된 애국주의는 자본주의적인 편안함과 쾌락으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언론 통제와 인신구속의 사회는 무섭습니다만 소비와 쾌락의 논리로 자기 규제하는 자발적 신전체주의가 더 무섭지 않겠습니까. 극중 셔틀러 의장을 코미디로 만든 쇼로 인해 피디가 구속되는 상황이 발생하죠. 하지만 요즈음의 문제는 부시를 비판하는 코미디를 만든 것만으로 할일을 다 한 양 구는 태도 아니겠습니까. 비판 받는 코미디가 있다는 것만으로 면죄부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그런게 오히려 문제가 되겠죠.

브이의 고전적인 의상과 셰익스피어를 인용하는 태도처럼, 실제로 영화도 고풍스럽다 못해 고루하기까지 합니다. 그냥 솔직하게 런던탑을 한번 뽀개고 싶었어요 식으로 나가는게 오히려 좋지 않았겠습니까.

원작은 80년대의 대처정부의 대처리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이라크 전쟁을 뻔뻔하게 허용한 국민에 대해 다시금 대처리즘 비판을 불러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도 옛날보다는 나아졌다? 결과는 비슷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