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이런 상황을 경험하지 않았나 싶다. 리포트 제출 마감시한이나 시험날짜등이 임박해서 이번주말에는 꼭 공부를 해야지! 라고 생각하고 책상머리에 앉았는데, 일단 준비를 철저히 하기 위해서 먹을 것도 준비해놓고 이메일도 미리 확인해놓고, 친구들에게 나 공부할꺼야 라고 미리 얘기를 해놓고 하다보니까 어느새 먹고 채팅하고 써핑하고 하느라고 시간을 다 써버린 경우.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많이 볼 수 있는 단어 중의 하나가 '귀차니즘'이다. 귀차니즘은 말 그대로 뭔가를 해야 하는데 귀찮아서 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귀차니즘을 표현하고 경험하지만 정작 '왜 귀차니즘이 생겨나는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단지 '나는 의지가 박약하기 때문이라서 그런걸꺼야'라고 단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필자의 주변에 아는 사람중에 그림그리는 친구가 한명 있다. 이 친구는 색감각도 뛰어나고, 그림체도 매우 좋다. 하지만 막상 높은 퀄리티로 완성된 그림들은 별로 없었다. 오에가키 같은 것은 기가막히게 잘 그리는데 완성된 일러스트본은 별로 없다. 그 친구의 말버릇중 하나가 '귀찮아서' 이다. 자기가 맘만 먹으면 완성된 예쁜 그림을 그릴 수도 있지만 귀찮아서 낙서수준으로 그린다는 것이다. 글쎄 그게 과연 정말 귀찮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뭔가 중요한 능력이나 에너지가 부족해서는 아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귀차니즘이라는 현상은 단순한 의지나 동기부여뿐만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에 더 가깝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것과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은 오해를 갖고 있어서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좀 더 일반적으로 따져본다면, 많은 사람들은 어떤 일이 되지 않는데에 대한 이유를 '동기부여의 부족'이나 '정신적 자세가 잘못되어서'로 국한해서 찾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에 대해 Balancing Act 의 저자들은 이러한 이유들중 개인적 동기에 대한 사항은 6 가지 요소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6가지 요소는 무엇인가?

                   동기                     능력
개인       (1)개인적동기        (2)개인적능력
집단       (3)집단적동기        (4)집단적능력
시스템    (5)시스템적동기     (6)시스템적능력

(1) 개인적동기는 말 그대로 내가 이것을 하고싶다라는 의지를 말한다.
(2) 개인적 능력은 그 일을 하는데 필요한 자원이나 도구, 에너지등을 말한다. 특히 정신적 에너지 부분이 중요한데, 이 부분은 심력이란 측면에서 후에 더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3) 집단적동기는 나 이외에 내가 속한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의 의지를 말한다. 개인적동기와 집단적동기가 일치하지 않을 때에 상당히 의욕이 감퇴되는 경우는 많이 있다. 뭔가를 말하고 싶은데 웬지 나 혼자 튀면 안될것 같은 분위기에서 나선다는 것은 결코쉽지 않은 일이다
(4) 집단적능력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내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다른 팀원들의 능력이 받쳐주지 않아서는 내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는 것이다
(5) 시스템은 전체소속된 환경에서 인간이외의 요소를 말하는 것이다. 시스템적 동기의 예를 들자면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마련된 보너스 시스템 같은 것이다 (런칭한 게임의 동접자가 얼마를 넘어가면 사원들에게 얼마의 보너스가 나간다던가...)
(6) 시스템적 능력도 마찬가지 인간적요소 이외의 능력들을 들 수 있다. 회사의 마케팅영향력이라던가 자금력이라던가 또는 외부제약요소 (영등위심의등) 등등이 있을 수 있다.

사려깊지 못한 관리자는 어떤 일을 하자고 했지만 그대로 실행되지 않은 결과를 보았을때 대부분을 (1)개인적동기로 파악하여 그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한다. 더 야단을 친다던가, 정신교육세미나를 수강시킨다던가, 담당자를 경질한다던가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이 개인적동기는 6가지 요소중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에 (1)이 충만하였어도 다른 부분에서 제약요소가 발생되었다면 결과는 나오지 않을 수 밖에 없다.


여러분이 회사생활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부분에서의 성과를 높이려면 6가지 요소중 (1)과 (2)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1) 개인적 동기에 대해서는 자기계발에 대한 여러가지 책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크고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뚜렷한 계획을 세우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내가 이 글에서 얘기하고 싶었던 본론은 바로 (2)에 대한 것, 그 중에서도 심력에 대한 것이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귀차니즘이라는 것은 단순한 동기부여의 부족 (개인적 동기) 뿐만이 아니라 능력의 부족 (개인적 능력)에 해당하는 것이다. 개인의 능력을 크게 두가지로 나누자면 정신적능력과 육체적능력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고 다시 그 능력들도 지속적으로 축적되어서 크게 변하지 않는 것과, 시간과 상태에 따라 변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축적된능력             상황적능력
정신적능력        (1)지식,경험           (2)현재의 심력
신체적능력        (3)근력,지구력        (4)현재의 활력

위의 4 가지 항목중 (1), (3), (4) 에 대해서는 간단한 예를 드는 것 만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신체적 능력에 대해 생각해보자. 근육이 발달하지 않은 사람이나 어린아이는 자기의 능력을 초과하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소화할 수 없다. 아무리 이걸 들어올리고 싶다고 소망하고, 영양이 많은 식단을 소화해도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초월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이미 심한 운동을 해서 녹초가 된 사람은 이미 했었던 똑같은 일을 또 해낼 능력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지적능력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내가 정신을 강하게 집중하고 애를 써도 배우지 않은 미적분 문제를 풀어낸다던가 하는 일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이 심력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이 글의 메인 메시지이기도 하다.

'심력'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정의하자면 지적활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영양을 섭취하고 휴식을 취해야 하고, 운동을 하고 난 후에는 활력이 고갈되는 것처럼, 정신적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심력이 필요하고, 활동을 하고 난 이후에는 심력이 고갈된다. 사람이 귀차니즘을 느껴서 어떤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귀찮기 때문만이 아니라 실은 심력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심력은 활력과는 성격이 달라서 단순히 휴식을 한다고 충전되고, 사용한다고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쉬어도 충전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아주 잠깐의 휴식이나 다른 자극요소에 의해서도 다시 충전되기도 하는 것이 심력이다.

프로그래머같은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심력은 그야말로 에너지 그 자체이다. 혹자는 심력을 '프로그래밍 마나(mana)'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재미있으면서도 일리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심력을 충전하는 방법은 조금씩 다르다. 프로그래머로써 성공하고 더 많은 성과를 내는 비결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심력(2)을 충전시키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깨닫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심력을 효과적으로 충전하고 활용할 수 있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는 집중의 흐름(flow) 을 타는 것이다. 한번 흐름을 타게 되면 정신적 활동을 하더라도 심력이 쉽게 많이 줄어들거나 하지는 않는다. 상당량의 심력은 작업 중간에 소비된다기보다는 작업을 시작하는 단계에 소진된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은 바로 이런 양상을 두고 한 말이다. 스타크래프트에서 고스트가 클로킹을 사용하면 일단 켜자마자 초장에 에너지가 25가 깎이고 점차 1씩 깎여나가는 설정은 상당히 설득력이 높다고 본다. 어쨌든 효율적인 작업환경을 만들려면 주위의 방해를 받지 않고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실제적인 여러명이 함께 작업하는 환경에서는 혼자만의 집중만을 고집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아래 글에서도 설명했지만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 없이는 올바른 작업의 방향설정이 어렵기 때문이다.

또다른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는 적절한 압력이다. 사람에겐 의식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능력이 있는데, 우선순위에 영향을 주는 것은 역시 압력이다. 물론 이 압력은 능력이상으로 커져버리면 오히려 좌절상태를 유발할 수도 있다.

선택의 폭을 줄이는 것도 유효한 심력증진 방법중의 하나이다. 예를 들면 필자는 집에 있을 때보다도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모는 것이 아니고) 장거리를 갈 때에 더 책을 잘 읽는다. 집안에 있으면 여러가지 다른 선택 (인터넷을 한다던가, 나가 논다던가) 이 생겨서 집중이 안되지만 차 안에만 한참 앉아있어야 하면 눈이 아프지 않는 이상 어차피 책 보는 것 외에 다른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피드백(feedback) 의 존재는 매우 중요한 심력 충전을 위한 요소이다. 부정적인 피드백이건 긍정적인 피드백이건 피드백이 있는 상태에서 일을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일을 하는 것은 커다란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 피드백은 다른 사람의 피드백일 수도 있고, 내가 만든 작업물 자체의 피드백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그래픽 작업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모델이나 캐릭터가 게임 화면에서 돌아다닐 수 있도록 엔진에서 준비가 된 상태에서 작업을 하고 그 결과를 직접 확인해볼 수 있는 상태에서 작업을 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상태 (그래픽 툴에만 의존하는 상태) 에서의 능률차이는 매우 높다.

유저들의 피드백도 매우 중요한 심력충전의 요소가 된다. 개발자로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을 꼽으라면 내가 야심차게 준비한 무언가에 대해 유저들이 반응을 보이는 순간이다. 좋은 평가는 좋은 평가대로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고, 나쁜 평가는 나쁜 평가대로 우리의 눈을 더 높이고 개선해야 할 도전과제를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순간이다. 그라나도 에스파다를 만드는 모든 스텝들은 지나치리만치 게시판에 올라온 유저들의 평판에 신경을 쓰고 방법을 찾는다. 초반에 공개되었던 캐릭터들도 '표정이 굳어있다'. '텍스춰가 바디페인팅처럼 어색하다'. '신체비례가 너무 머리가 크다' 등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전면 교체되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그 다음단계를 위한 도전과제가 되고 심력충전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다른 팀원들의 피드백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현재 개발체제는 사내게시판을 통해서 새로 제작된 모델이나 원화, 기타 요소등에 대해 사람들이 계속 반응을 보내준다. 이것이 제작자로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중요한 모멘트가 되는 것이다. 아무런 반향없는 어두컴컴한 굴속으로 돌을 던지는 듯한 암울함은 반대로 심력을 급격히 소모시키는 악요소가 된다.

고백컨데 필자도 주위에서 귀차니즘이라면 둘째가면 서러워할 정도로 게으른 사람중 한명이다. 그런 필자도 이렇게 장문의 글을 주기적으로 써서 올릴 수 있는 이유는 독자들의 피드백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위의 모든 관점을 종합할 때 필자에게 가장 좋은 효과를 발휘했던 해결방법중의 하나는 '페어 워킹(Pair Working)' 이다. 페어워킹은 페어프로그래밍의 개념을 필자 임의대로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한 것인데, 실제로 프로그래밍 이외의 영역에서도 공동작업이 효험을 발휘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페어 프로그래밍의 여러가지 면에 대해서 잘 설명한 책은 Pair Programming Illustrated 라는 책이 있으므로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다.

필자에게 페어워킹이 효과적이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찾을 수 있었다.

1. 필자의 경우 다른 사람이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답답한 것을 못참는 성격이다. 결국 '좀 나와봐 내가 할께' 하면서 어느새 나도 모르게 심력이 솟아나서 일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내 행동의 기폭제가 되는 셈이다.

2. 내가 잘 모르는 부분의 일을 할 때에는 다른 사람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금새 그 일의 맥락을 파악해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된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는 심력저하 ( = 좌절 OTL) 의 가장 큰 원인중 하나이다)

3. 열중해서 일을 하다가 심력이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일을 파트너에게 넘기고 나는 다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일에 대해서는 집중을 유지할 수 있다.

4. 심력을 고양시키는 데에는 적절한 압력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페어워킹을 하게 되면 내 옆의 파트너와 같이 있는 시간동안 성실히 작업에 임해야 하는 무언의 압력을 받게 된다. 작업에 불만이 많은 것이 아닌 이상 옆에서 파트너가 열심히 일하는데 딴짓을 하게 되는 일은 상당히 줄어든다.

5. 파트너와의 지속적인 상호피드백 상태를 통해 유대감이 형성된 상태에서는 심력이 더 잘 모여진다.


인터넷 써핑이나 채팅등은 심력보강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방법이다. 별다른 압력이 없는 상태에서 한번 인터넷을 켜고 여기저기 싸이트를 돌아다니다보면 시간은 후딱 지나가지만 뭔가를 해야겠구나! 라는 의욕이 충전되는 일은 별로 없다. 의욕이 충전되지 않으니까 일이 안되고, 일이 안되니까 휴식을 해야 하고, 휴식을 해도 의욕은 충전되지 않고... 이것이 폐인모드의 악순환이다.

반대로 올바르고 심력을 충전해가면서 일을 하면 일의 성과와 보람에 의해서 다시 심력이 재충전된다. 그 심력으로 다음 목표에 도전할 수 있고, 목표달성에 의해 더 심력이 충전되고, 이것은 선순환이다. 이것을 진정한 일중독상태라고 할 수 있으며 열혈모드라고도 부른다. 이런 경우에는 체력과 활력만이 유일한 제약요소가 되므로, 체력안배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


이상으로 일이 안되는 원인에 대한 6가지 원인분석, 정신노동에 있어서의 심력의 의미, 심력을 증진시키는 방법으로서의 페어워킹을 알아보았다. 여러분의 작업에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imcgames 의 김학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