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즘에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탁구를 가르치고 있다. (사실 내가 누구에게 탁구를 전문적으로 가르칠 자격이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그 부분은 일단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패스)

2. 일단, 탁구를 가르치는 대상은 탁구를 전혀 못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탁구 교실에 가서 탁구를 돈내고 레슨을 받아가면 배울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내가 사장이고 학생은 직원이라는 특수 관계 때문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가능한 환경이다.

3. 본인이 꼭 탁구를 배우고 싶었던 것도 아니지만, 회사에 탁구대가 비치되어 있는 관계로 잘 치는 사람들을 구경할 기회는 간혹 있기 때문에 아주 모티베이션이 없다고도 볼 수 없는 상태.

4. 난 동네 근처의 탁구교실에서 정식으로 레슨을 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탁구교실에 있는 장비 (공 120개, 날아가는 공을 받아서 통에 모아주는 연습용 네트, 공이 멀리 나가지 않도록 막아구는 펜스 등) 를 회사에 비슷하게 비치해놓고, 내가 교습을 받았던 순서대로 가르치고 있다. 현재 제자는 토탈 4명 정도 (남자 3인, 여자 1인)

5. 탁구를 완전히 처음부터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기초중의 기초부터 가르친다. 일단 라켓을 쥐게 하고, 나는 최대한 일정한 위치로 계속 탁구공을 쳐서 보내줘서, 학생이 쥐고 있는 라켓에 내가 맞춰주는 연습부터 시작한다. 아무리 공에대한 감각이 없는 초보자도, 번트수준으로 공을 쳐내는 것은 10분 이내에 해낸다. 그 후에는 조금씩  라켓을 이용해 공을 쳐내는 연습을 시킨다. 사람에 따라 약 30분~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완전히 공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 상태부터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공을 못 받아치더라도 부정적인 피드백은 주지 않는다.

6. 공을 받아서 치다보면, 어떤 자세로 쥐고 어떤 느낌으로 공을 받아쳤을 때, '딱'하고 경쾌한 소리가 나며 공이 힘차고 정확하게 상대편으로 날아가는지를 손과 손목의 느낌으로 알게 된다. 계속 일정하게 코치가 공을 보내주다보면 점점 그 느낌을 찾아가게 되고, 정확히 쳤을 때, 코치가 잘했다는 신호를 보내줘서 2중의 피드백을 준다.

7. 2시간정도 배우고 나면 손에 감각이 알듯말듯 남게 된다. 그 후부터는 탁구하자고 권하지 않아도, 알아서 교습을 받으러 찾아온다. 집에가서 자려고 잠자리에 누으면 천장에 탁구공이 딱딱거리는 환청이 들리기 시작한다.

8. 내가 완전 초보자들에게 탁구를 가르치는 이유는 몇가지가 있다. 교습을 통해서 직원과 좀 더 가깝게 유대감을 쌓을 기회가 생긴다는 점이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9. 나는 사람이 완전한 백지상태 (타뷸라 라사라는 심리학 용어로 표현되는) 에서 하나씩 사람이 뭔가를 익히고 습득하고 몰입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다. 가장 가까운 예로는 아기를 낳아 키우면서 행동과 말을 익히는 단계를 옆에서 관찰한 사례들이다.

10. 아기들은 모든 면에서 백지상태로 출발하기 때문에 타뷸라 라사 상태를 관찰하기 쉽지만, 성인의 경우에는 교육과 취업등을 거치면서 백지 상태가 점점 줄어들게 된다. 하지만 드럼같은 악기 연주라던가 탁구같은 스포츠의 영역에는 아직 무궁무진한 백지상태가 남아있다. 취미활동의 중요한 의의중 하나는 자기자신의 백지상태를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11. 뭔가에 대해 백지상태에서 시작해서 그것에 익숙해지고 난 후 그 대상에 대한 관심이나 애착은 익숙해진 후에 다른 유사한 것을 접했을 때의 감정과 매우 다르다. 많은 사람들은 생애 첫 번째 즐긴 RPG 를 가장 인상 깊은 RPG 라고 생각한다. 내게도 울티마3(생애 최초로 접한 RPG) 의 기억은 그 어떤 게임과 비교해도 각별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내 추측에 의하면 학습자가 백지상태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평소에 비해 사용하지 않던 뇌의 영역을 자극하게 되고, 연속되는 도전에서 성공을 경험하게 되면서 강렬한 도파민 호르몬의 분비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숙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뇌의 다른 영역으로 옮겨지게 되고, 최초의 감정적 경험을 일으키는 호르몬의 분비는 차츰 줄어들게 된다. 이런 과정을 편의상 후크(Hook)된다라고 부르기로 하자.

12. 나 스스로 탁구에 대해 진지한 재미를 느끼게 된 것은, 놀러간 후배네 사무실에서 탁구를 치면서부터였다. 그 때 그냥 탁구를 치다가 친구가 한번 연습해보라고 하면서 공을 일정한 코스로 반복적으로 보내주는 것을 받아치면서 '공이 제대로 맞은 느낌' 을 체험하면서부터 흥미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한번 후킹이 되고 난 후부터는 나 스스로에게 탁구를 쳐야 하는 이유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래 나이 먹었으니까 운동 좀 해야지. 근데 헬스 같은건 재미가 없지만 탁구는 재미도 있잖아. 탁구는 비가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고 돈도 별로 안 들어. 골프를 안 칠거라면 탁구라도 쳐야 하지 않을까. 탁구는 늙어서도 꾸준히 할 수 있는 운동이고 선진국에서도 생활체육으로 많이 보급되었잖아. 우리 엄마도 예전에 탁구선수할 뻔 했었다는 기억도 떠오르고 등등

13. 그러고 나서 인터넷에서 탁구장 리스트를 구해서 집과 회사 사이에 있는 탁구교실에 등록해서 다니게 되고, 내 탁구채를 장만하고, 레슨을 받고 급기야는 회사에 탁구대를 들여놓게 된다.

14. 타뷸라 라사 상태를 지나서 숙달의 단계를 거치게 되면 몰입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처음 타뷸라 라사 상태에서 뭔가를 접한다는 것은 거부감 내지는 용기 등 심리적 관성을 많이 극복해야 한다. 이것을 극복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전부가 좌우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때 후킹을 돕는 요소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15. 드럼을 배울 때도 처음부터 전자드럼을 사고 드럼을 PC와 미디로 연결해서  dtxmania라는 PC용 드럼매니아 클론을 통해서 곡 연습을 시작했다. 악보도 없이 그냥 드럼을 혼자 연습하다가 좌절한 기억이 몇년전에 있었기에 이번에는 스스로 후킹될 수 있는 여건부터 만들었다. dtxmania의 연습용 프레이즈를 시도해서 반복 훈련끝에 거의 비슷하게 통과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예전에는 통과할 수 없었던 드럼 연주의 초보단계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16. 탁구를 배울 때도 친구가 예측 가능하게 공을 쳐주고 받아치는 자세에 대해 조언을 해주서 연습에 대한 힌트를 준 것이 중요한 후킹요소였다. 나에게 탁구를 배우는 4명의 팀원들도 나의 반 강제 제안에의해 타뷸라 라사 상태에서 출발을 하게 되었지만 초보자도 가능한 수준에서 후킹을 유도함으로써 탁구 교습의 궤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17. 위의 이야기를 게임개발에 접목하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혁신적인 게임, 플레이어를 타뷸라 라사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게임, 반대로 기존의 익숙한 게임과 유사한 스타일과UI를 갖추고 나온 게임중 어떤 게임에 유저에게 강렬한 몰입을 줄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을까? 유저를 타뷸라 라사 상태를 빨리 통과하게 만들 게임 내의 후킹 요소에는 무엇이 있을까?

imcgames 의 김학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