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얘기하다보니 결국 옛날 얘기로 나오게 되는군요.

글 쓴 내용에 기억나는 부분을 조금씩 더 살을 붙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쓰다보니 자기소개서가

되고 있네요. 김학규라는 사람의 자기소개서를 받아봤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처음 게임제작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건 대학에 들어가게 된 92 년부터였습니다.

그때는 아마추어 팀의 형태였고, 직업이나 먹고 산다라는 생각보다는, 게임이란 것을 내 손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큰 동기였습니다.

여러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우여곡절끝에 94년 리크니스가 발매되서 손에 들어온 돈은 약 200만원

여러해동안의 수고에 비하면 많은 돈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만들고 배우는 과정 자체가 큰 소득이었기

때문에 손해를 봤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점이라면 게임기로 쓰이기에는 부적합하다고 생각되었던 IBM PC/AT

기종에 VGA 를 가지고 슈퍼패미콤급에 필적하는 부드러운 화면처리를 구현해냈다는 점입니다.

당시 존 카맥이 만들었던 커맨더 킨 같은 게임과 비교하더라도 기술적인 면에서 내가 더 낫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가 군대 문제가 다가올 무렵 저는 다행히 병역특례업체에 취업하게 되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를 빌어 저에게 병특자리를 소개해주신 박기훈 선배님, 저를 뽑아주셨던 김기환 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게임과는 별 관련이 없는 아파트 관리사무소 전산화를 하는 회사에서 고지서 생성, 회계, 인사급여

등의 프로그램을 짜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업무용 프로그램을 짜면서 프로그램의 좋은

구조는 무엇인가? 요구사항을 잘 반영시킬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등등의 현장 경험과

OOP 에 대한 원리를 깨닫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업무용 프로그램은 주로 코볼이나 클리퍼

로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저와 동료는 C++ 과 코드베이스라는 xBase 호환 라이브러리를

이용해서 프로그램을 만들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도 계속 게임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컴퓨터의 사양은 계속 좋아지고 있었습니다

Dos4gw 같은 Dos extender 의 등장 덕분에 32비트의 성능을 이용한 게임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라스더 원더러라는 게임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640KB 메모리 제한의 벽이 계속 존재해왔는데 왓콤씨와 DOS4GW 같은 라이브러리를

이용해서, 한 화면에 수북히 이펙트와 캐릭터들이 등장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되서

이런 것을 응용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들자라는 컨셉으로 게임을 만들게 되었죠.

엔딩을 보신 분이라면 아마 허무감에 치를 떨었을지도 모를 허술한 마무리로 끝난 게임입니다만

악튜러스와 더불어 다시 제대로 리메이크를 만들어보고 싶은 게임중 하나입니다.


역시 그때까지만해도 게임을 만드는 것은 취미활동의 일환에 불과한것이었고, 본업은 따로 있었기

때문에 게임을 만들어서 먹고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었습니다.

병역특례업체에서의 일이 끝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복학생이 되어 학교를 다니면서도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복학을 해서 돌아온 학교에서 한참 어린 후배들과 같이 강의를 듣고 있노라니 후배들에게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복학 초반에는 거의 도서관에서 살면서 열심히 공부를 했었습니다.

사회경험을 거치고 더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지 1,2 학년때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전공 교재들의

글자들이 머리에 들어오고, 문제들의 해답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보게 된 시험에서는 전공과목

들을 모두 A+~A 를 맞는 유례없는 결과를 맞이하면서, 아 나이먹으면 머리가 썩는다는건 다 거짓말이라

는 것을 깨닫게 되었었지요.



학교를 다니는 와중에 복학생들이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나의 미래는 무엇일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한명의 성인이 되어 가정이든 회사든 뭔가를 책임질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고민을

끝없이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게임을 좋아하는건 확실한데 게임을 만들어서 먹고 살 수 있을 것인가?

게임 이외에 내가 잘할 수 있는 다른 일은 혹시 없을까? 등등의 생각도 여러가지 들었습니다.



그러던 와중 어쩌다보니 당시 하이텔 게임제작동호회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가 일거리가 생겨서 다시

게임제작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2학기부터는 노트북을 학교에 들고다니면서 코딩과 공부를

병행하기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공부는 다시 뒷전이 되어버렸습니다.

역시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끼리 모여서 외주거리 일을 받아서 하는 것이 되다보니


'사람들과 같이 모여서 일을 할 수 있는 작업실이 있었으면!'

'내가 게임을 만드는데 집중할 수 있도록 누가 월급을 주었으면!'

하는 것들이 너무나 절실한 소원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후반부에는 외주일을 준 회사 (n소프트) 에 공간을 마련해서 거기로 출퇴근을 해가면서 일을 하게

되었었는데, 밥먹을때마다 돈이 없어서 어떻게 싸게 끼니를 해결할까 고민하던 기억이 납니다.



어쨌든 외주프로젝트는 완성이 되서 목돈이 약간이나마 생기게 되었고, 해는 넘어가서 98 년이 될 무렵

결단의 순간이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그 프로젝트를 하고 난 이후의 팀을 계속 끌고 갈 것인가? 아니면

해체하고 각자의 길을 갈 것인가?

학교에 계속 다니게 되면 해체하고 각자의 길을 가는 셈이 되는 것이고, 팀을 유지하려면 학교를 다니면서

병행하기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일에 열중하다보니 학교에서 강의를 들어도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거의 못 알아듣고 자리만 채우다 오는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결론은 학교를 때려치고 게임쪽으로 어떻게든 뭔가 해보자는 것이 되었습니다.

외주프로젝트를 마쳐서 번 돈으로 집 근처에 반지하 작업실을 내고 각자 집에서 컴퓨터를 가져와서

작업공간을 마련하였습니다. 처음엔 3명으로 시작했지만 몇주 되지 않아 한명이 자기의 길을 가기로 해서

곧 2 명이 되었습니다.

회사를 차렸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지만, 할 수 있는 인력도, 돈도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투자를 받아서

일을 시작한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2명은 결국 지금까지 해오던 가장 잘 아는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다른 회사에서 외주거리 일감을

받아왔고 (프로그래밍, 기획, 음악등) 일단 유지를 하기 위해서 게임 제작 학원에 강사일도 나가기 시작

했습니다.

92 년 초반에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때의 가장 큰 목표중 하나는 '대작 RPG'를 만드는 것이었

습니다. 98년까지 경험을 쌓고, 회사를 창업하였지만 아직도 그 목표를 이루는 시작조차도 멀어보였습니다

그러던 중 외주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내게 되었고, 장기적인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확실히 깨닫고 있었던 점은 '우리는 돈도 없고, 사람도 없고, 인지도도 없으므로 한번에

우리 힘만으로 모든걸 할 수 없다' 라는 점이었습니다.

더 장기적으로 생각해야 하고, 더 남의 힘을 빌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남에게 힘을 빌려주어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게 되었고, 그러던 와중에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손노리의 멤버 서관희씨와 얘기가

통하게 되어 합작 프로젝트 '악튜러스' 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부터의 얘기는 어느정도 알려져 있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제 경험을 일반화하긴 어렵겠지만, 게임만드는 사업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처음부터 욕심만 앞선 상태에서 경험, 사람, 인맥을 비롯한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업을 하고 싶은데 투자를 해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일을 하던 중간에도 수많은 게임 회사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경험과 실력을 갖춘 유능한 인재의 수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단시간에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많습니다. 또한 이러한 조직을 이끌어나갈 리더에게 책임감, 끈기, 집중력

등이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았다면 수많은 어려움의 관문을 쉽게 지나가진 못할 것입니다.

저같은 경우에는 여러건의 외주작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일을 하는 기술과 경험, 리더가 갖추어야

할 여건들, 그리고 사업의 밑천이 될 자금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사업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을 벌려면 사업을 해야 하는 닭과 달걀같은 관계만 생각하고

있으면 이런 문제는 풀 방법이 없습니다.

투자를 받아서 하면 되지! 라고 생각해도 눈먼 돈이 넘쳐나던 시절이 아니면 지금은 그렇게 투자해줄

사람도 없을 뿐더러, 눈먼돈을 운좋게 받아서 고생모르고 사업을 시작한 사람도 끝까지 제대로 유지를

한 사람은 정말 드뭅니다.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확신이 들면, 그 일을 하기 위해서 5년-10년까지도 그 일을 못 하고 다른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해야 하고, 같은 각오를 가진 동료를 찾아야 합니다.

끝까지 한 우물을 파겠다는 집념을 가지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일에 접근하시기 바랍니다.

imcgames 의 김학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