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라가나로 코토미 부를때는 코토미짱  ~ 라는 대사로 유명한 코토미



"Day before yesterday I saw a rabbit, and yesterday a deer, and today, you."

그저께는 토끼를 봤어요, 어제는 사슴, 그리고 오늘은 당신




클라나드에서 등장하는 민들레 소녀라는 단편 소설 'ㅁ'/  

짧은 내용이지만 여운이 남는 글.







http://www.scifi.com/scifiction/classics/classics_archive/young2/young21.html

↑ 원문



↓ 번역

민들레 소녀 (The Dandelion Girl) by Robert F. Young

마크는 언덕의 한 소녀를 보고 에드나 밀레이※를 떠올렸다. 그건 아마도 오후의 햇빛 아래서 그녀가 거기 서 있는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민들레가 꽂힌 그녀의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녀의 철지난 흰 드레스가 길고 가녀린 두 다리 둘레에서 펄럭이고 있었으니까. 마크는, 어찌된 일이었든 그녀가 과거를 지나 현재로 나아오고 있다는 뚜렷한 인상을 받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명백히, 그녀는 과거에서가 아니고 미래에서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에드나 성 빈센트 밀레이(Edna St. Vincent Millay): 여성 최초로 퓰리처 시문학상을 탄 미국의 시인이자 극작가.
왜 여기서 하필 이 이름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음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거리를 두고 오르는 내내 힘겹게 숨쉬었다. 그녀가 아직 그를 보지 못했기에, 그는 어떻게 하면 그녀를 놀래지 않고 자기가 있음을 알게 할까 궁리하고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그는 담뱃대를 꺼내 채우고 불을 붙였다. 대통을 손으로 감싸고, 담배가 불타오를 때까지 연신 불어댔다. 그가 소녀를 다시 보았을 때, 그녀는 주위를 돌며 재미있다는 듯 그를 알아보았다.

하늘은 신경이 쓰일 만큼 낮은데, 그는 그녀의 앞장을 서면서 얼굴에 맞는 바람의 느낌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혼자 하이킹을 더 자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덕에 이를 때까지 그는 숲 속을 거닐고 있었다. 이제 숲은 뒤에 퍽 낮아져 있었고 가을 첫 단풍이 희미하게 불타올랐다. 숲 너머에는 작은 호수에 오두막과 낚시터 따위도 있었다. 그의 아내가 갑작스레 배심원 일로 소환된 바람에, 그는 기껏 마련해놓은 2주 여름휴가를 홀아비로 보내야 했다. 적적한 시간을 보내며, 낮엔 낚시터에서 내내 고기를 낚고 저녁엔 거실 서까래 밑의 큰 벽난로 앞에서 내내 독서를 했다. 이틀이 지나니 나날이 지겨워져서 뜻도 없이 정처도 없이 무작정 숲으로 들어갔다가 언덕으로 오게 되었고, 그곳에 오르게 되었고, 소녀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 소녀를 보았을 때 마크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보았다. 가냘픈 그녀의 그림자가 비쳐 오르던 하늘만큼이나 푸른. 얼굴은 약간 길고 어리고 보드라우니 예뻤다. 찌르는 듯한 데자뷰 때문에 그는 다가가서 건들바람이 쓰다듬는 듯한 그 볼을 어루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두 손은 여전히 옆에 제대로 머물러 있었지만, 역시 손이 근질근질했다.

‘아니, 난 마흔넷이고,’ 그는 이상히 여겼다. ‘저 애는 끽해봐야 스물이 못 된다. 내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는 개소리괴소리로 “경치 좋죠?” 물었다.

“아, 네.” 대답한 그녀는 돌아서서 척하니 허리에 손을 얹고 대답했다. “진짜 훌륭하지 않아요?”

마크는 그 시선을 따라가 보며 “그러네요.” 대답했다. 아래로 숲들이 다시 펼쳤는데, 구월의 따스한 빛깔로 물든 저지대로 뻗어가고, 몇 마일 너머에 있는 작은 마을을 둘러싸 마침내 교외 변두리에서 끝나고 있었다. 저 멀리 코브시(市)의 윤곽이 어룽어룽 보였다. 드문드문 있는 중세풍의 성곽들은 알아볼 수 있어서, 꿈결처럼 느껴지진 않을 만큼이었다. 그는 물었다. “도시에서 오셨나요?”

“제 입장에서는요,” 그녀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웃어보였다. “전 지금부터 240년 뒤의 코브시에서 왔어요.”

그는 그 웃음에서, 소녀는 사실 자기가 그걸 믿어줄 거라곤 기대하지 않음을 읽어냈다. 하지만, 맞장구를 쳐주면 꽤 재미있어지겠다는 암시를 받았다. 그도 웃어주며 일렀다. “그럼 기원후 2201년에서 왔다? 그쪽은 정신 못 차리게 변해 버렸겠는데.”

“네, 그렇죠.” 그녀가 받았다. “지금은 대도시의 한 구역이 됐고, 모조리 거기로 뻗어나가고 있어요.” 그녀는 그들의 발치에 보이는 숲 언저리를 가리켰다. “2040번 길은 이 단풍나무 숲을 곧장 가로질러 나가요.” 말을 이어, “저기 저 아카시아 나무 같은 거 보이세요?” 남자는 대답했다. “보이네.”

“저기에 신시가지가 있어요. 거기 슈퍼마켓이 얼마나 크냐면 횡단을 하는 데만도 반나절은 걸리고, 아스피린부터 공중자동차까지 그 안에서 거의 다 살 수 있어요. 슈퍼마켓 옆에 너도밤나무 있는 자리엔 유명 드레서들의 최신작이 잔뜩 쏟아지는 옷가게가 있어요. 지금 입고 있는 이 드레스도 오늘 아침 막 산 옷이에요. 멋지지 않아요?”

멋지다고 한다면, 소녀의 말솜씨 때문이었을 거다. 그렇지만 그저 그걸 바라볼 뿐이었다. 그 옷이란 마크에겐 낯선 재료로 지어져 있었는데, 합성면직물, 바다거품, 눈꽃 비슷한 재료들인 듯싶었다. 초섬유 직조기로 만들고 짜는 그런 인공물에는 더 이상 어떤 한계도 없었다. 물론 그녀가 지어낸 이야기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겠지만.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왔나 보네.” 그는 대꾸했다.

“네. 아버지가 하나 만들어주셨어요.” 그는 그녀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또랑또랑한 표정은 처음 보는 것이다. “그럼 여기 자주 오니?” “그럼요. 여긴 제가 즐겨 찾는 시공간점이에요. 가끔 여기 네 시간쯤 서서 노박이로 구경하고 또 구경하고 그래요. 엊그젠 토끼, 어젠 사슴, 오늘은 아저씨를 만났어요.”

마크는 되물었다. “어떻게 어제가 있을 수 있지? 똑같은 시점으로 매번 돌아온다면서?”

“아, 그거요.” 그녀가 대답했다. “이유가요, 이 기계는 다른 것들과 똑같은 시간 경과에 영향을 받거든요. 그러니 완전히 같은 때를 유지하고 싶으면 스물네 시간 뒤로 계속 돌려 맞춰놔야 되는 거예요. 해 본 일은 없어요. 올 때마다 매일매일 새로운 날이 되는 게 더 재밌으니까요.”

“아버지는 같이 안 오시니?” 머리 위로 기러기의 V자 행렬이 느릿느릿 떠가고 있었고, 그녀는 말을 꺼내기 전 몇 번 그걸 지켜보았다. 그리곤 끝내 입을 열었다. “요즘은 편찮으세요. 할 수만 있으셨다면 얼마든지 오셨겠지요. 하지만 제가 본 거에 대해서 다 말해 드렸어요.” 그리고 급히 덧붙였다. “이젠 아버지가 진짜 오신 것 같아요. 그렇다고 좀 말해주실래요?”

남자를 바라보는 소녀의 눈길엔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뜨거움이 있었다. “분명 그럴 거야,” 대답해주더니, “타임머신이 있으면 좋겠다.” 그녀는 진지하게 끄덕였다. “그건 기분 좋은 풀언덕을 좀더 누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은총이나 다름없어요. 23세기엔 이렇게 좋은 초지가 별로 없어요.”

그가 웃었다. “20세기 들어서서 그런 것들이 별로 없게 됐어. 이런 걸 일품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니? 난 여길 좀더 자주 와야 될 거 같아.” 소녀는 질문했다. “이 근처에 사시나요?”

“3마일쯤 떨어진 오두막에서 살고 있지. 휴가를 보내야 되는데, 그렇게 못 됐어. 아내는 배심원 업무로 불려간 바람에 같이 올 수 없고 미루지도 못하고, 결국 마지못해 소로우※처럼 살고 있는 거야. 내 이름은 마크 랜돌프야.”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미국의 저술가이자 자연주의자. 산 속에 파묻혀 살며 ‘월든’을 썼다

그녀도 말했다. “줄리라고 해요, 줄리 덴버.”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흰 드레스도, 푸른 하늘도, 언덕바지와 9월의 바람결도 그녀에게 걸맞은 것이었다. 아마도 두메산골에 살 터였겠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래에서 온 척하려는 거라면 그에겐 나쁠 게 없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의 느낌이나 그녀의 순진한 표정을 볼 적마다 일어나는 친근감 등이었다. “줄리야, 넌 무슨 일을 하니?” 그가 물었다. “아니면, 학교 다니나?”

“비서가 되려고 공부하는 중이에요.” 그녀는 대답했다. 반걸음 앞으로 나가더니 발끝으로 한 바퀴 귀엽게 돌아 이내 손뼉을 쳤다. “진짜 비서가 될 거예요.” 말을 이어, “대기업 사무실에서 고위직 어른들 얘기를 받잡는 일이라니 참 훌륭하죠. 제가 비서가 되어드릴까요, 랜돌프 님?” 랜돌프가 대답했다. “그럼 좋지. 내 아내는 한때, 전쟁이 나기 전까지 내 비서였어. 우린 그렇게 만나게 된 거고.” 그가 이 이야기를 왜 꺼내야만 했을까? 그는 이상해했다.

“좋은 비서였었나요?” “정말 최고였어. 그녀를 떠나보내게 되어서 참 서운했지마는 보질 못할 뿐이니까, 다른 쪽으로 기억할 수 있지. 뭐 그러니까 떠나보냈다고 말하긴 어렵겠네.” “예, 그러네요. 어, 이젠 돌아가야겠어요, 랜돌프 씨. 제가 본 거에 대해서 아버지가 듣고 싶으실 거예요. 저녁도 차려드려야 되고.”

“내일도 올 거니?” “아마도요. 매일 여기 왔으니까요. 안녕히 계세요, 랜돌프 씨.” 그가 인사했다. “잘 가라, 줄리야.”

그는 언덕길을 가뿐히 내리달아 단풍 숲으로 사라지는 소녀를 지켜보았다. 거기쯤에 240년 뒤의 2040번 길이 있겠지. 그는 웃으며 생각했다. 참 재밌는 애네.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 삶에 대한 그런 열정으로 산다면 정말 흥미진진하겠다. 그는 지금껏 이런 두 자질을 거부해 온 터라, 이를 충분히 좋게 평가할 수 있었다. 20세에 그는 무뚝뚝한 로스쿨 신입이 되었고 스물넷에는 조그맣긴 했으나 자기 사무소도 차린 터였다. 그곳은 온전히 그로 인해 굴러갔다, 아니, 꼭 그만 굴렸던 건 아니다. 그가 앤과 결혼했을 때, 살림이 제대로 꾸려지지 않던 한동안이 있었다. 그 뒤엔 전쟁이 벌어졌고, 좀더 긴 공백기가 찾아왔다. 이때의 살림이란 원격조종 같은 것이어서 때로는 억지춘양 같기도 했다. 그래도 다시 민간인이 되자, 두 사람은 곧바로 관계를 회복했고 이젠 아내뿐 아니라 먹여 살려야 할 아들도 하나 얻게 되었다. 그래서 매년 보내기로 그가 최근 작정한 4주간의 휴가 외엔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일해야 했다. 2주간은 앤과 제프가 고르는 휴양지에서, 나머지 2주는 제프가 대학에 간 이후로 앤과 함께 그 호수 옆 오두막에서 지내는 것이다. 근데 올해는 둘째 2주간을 외톨이로 보내는 것이다. 딱히 외톨이라 하긴 그렇지만.

그의 담배가 조금 전에 다 떨어졌지만 그는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다시 불을 붙이고 바람을 흩뿌리려는 듯 깊게 내뿜은 뒤, 언덕을 내려와 숲을 헤치고 오두막까지 돌아왔다. 추분이 지나 해가 확실히 짧아졌다. 하루도 거의 다 지났고, 저녁의 축축한 기운은 짙은 안개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느릿느릿 걸어 호수에 이르자 해가 떨어졌다. 작지만 깊은 호수였고, 가에는 나무들이 펼쳤다. 물가에서 좀 떨어진 솔숲 사이 오두막이 있었고, 굽이진 길이 낚시터로 이어져 있었다. 그 뒤로는 자갈밭이, 먼지 많은 길이, 고속도로로 들어갈 수 있는 길목이 있었다. 뒷문에 선 역마차는 문명사회로 언제든 재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었다.

부엌에서 저녁상을 차려먹은 후, 거실에 독서하러 들어갔다. 차고의 발전기가 이따금 부릉거렸지만, 그래도 현대인의 귀에 익숙한 소리들은 저녁 시간을 망치지 않았다. 난로 옆의 명품 책장에서 미국시문학명작선을 집어 들고, 그는 기대어 앉아 ‘언덕의 낮’이 있는 데를 뒤적였다. 이 명시를 그는 세 번 읽었고, 그때마다 그는 햇살 아래 선 소녀, 머릿결 바람에 휘날리는 소녀, 아름다운 두 다리를 감싸고 함박눈처럼 펄럭이던 드레스를 입었던 그 소녀를 보는 것이었다. 차마 울컥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책꽂이에 그걸 다시 집어넣고 나가 시골풍 현관에 서서 다시 담뱃대에 담배를 먹이고 불을 붙였다. 그는 억지로 앤에 대해 생각하려고 했다. 곧 그녀의 얼굴에 집중할 수 있었다. 굳지만 둥그런 턱, 따스하고 속 깊지만 마크가 그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던 어떤 두려움을 지닌 눈빛, 참 보드라운 뺨, 온화한 미소… 그 모든 속성들은 파르르 떨던 그녀의 연갈색 머릿결과 그녀의 키, 상냥한 품위에 대한 기억들로 인해 더욱 끌리는 것이 되었다. 그가 그녀를 생각하는 어떤 때든지 그녀는 그런 모습이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나이를 모른다. 그 옛날 그가 뭔가를 뒤져보다가 자기 책상 앞에 선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던 옛날 그 어느 아침처럼이나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내내 있었다니 놀랍지 않은가. 겨우 이십 년쯤 뒤에 그가 자식뻘이나 될 어린 몽상가 소녀와 만날 약속을 잡고 목 빠지게 기다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를 일이었다. 사실, 그는 정말 그런 인물은 못 되었다. 단지 그는 순간 흔들렸던 거다. 그뿐이다. 잠시 그의 마음의 평정이 깨졌고 그는 흔들렸다. 이제 그는 진정했고, 세상은 다시 똑바로 정상적으로 굴러갔다.

마크는 담배를 털고 안으로 되돌아갔다. 침실에서 옷을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불을 껐다. 쉬이 잠이 와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잠들었을 때, 감질나는 꿈들이 온통 가리산지리산 보였다.

“엊그젠 토끼, 어젠 사슴, 오늘은 아저씨를 만났어요.”



둘째 번 낮에 소녀는 하늘색 드레스에 파란 리본을 민들레빛 머리칼에 맸다. 언덕을 올라 잠시 머문 마크는, 목메는 심정이 가라앉을 때가지 더 가질 않았다. 그리고 그는 다가가 바람과 함께 소녀의 옆에 섰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부드럽게 뻗은 목과 턱 때문에 다시 목이 메여 왔다. 그래서 그녀가 돌아서서 “반가워요, 안 오실 줄 알았는데.” 라고 건넸을 때도, 대답하는 데 꽤나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그가 “그래도 왔잖아, 너도 그렇고.” 라고 대답하자 소녀도 말했다. “예, 기뻐요.”

가까이에 솟아오른 화강암이 벤치 비슷한 것이 되어서, 둘은 그곳에 앉아 대지를 바라다보았다. 그는 다시 담배에 불을 당겨 바람에 담배연기를 날려 보냈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 아버지도 담배하세요. 불을 붙일 때마다 아저씨처럼 대통을 손으로 감싸요. 바람이 안 불 때도 꼭. 아저씨는 아버지랑 많이 닮았어요.”

그는 물었다. “네 아버지나, 너에 대해서 좀 이야기해 다오.” 그녀는 이야기하기를 자기는 스물한 살 먹었고, 아버지는 정부에서 일하다 은퇴한 물리학자이며, 자기들은 2040번 길의 조그만 아파트에 살면서 4년 전 어머니의 별세 이후 자기가 죽 아버지를 보살펴드린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가 그녀에게 자기와 앤, 제프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후에 제프를 자기 동료 삼을 계획이라든가, 아내의 카메라 기피증이라든가, 그래서 결혼식 때마저 자기 사진을 찍는 걸 뿌리쳐 온 일이나, 셋이서 지난여름 캠핑 때 겪었던 멋진 시간 등등을.

그가 이야기를 마치자 그녀는 반응했다. “행복한 가족생활이잖아요. 1961년은 살기에 훌륭한 해로군요!”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타임머신이라면, 여기서 어디든지 내키는 데 갈 수 있잖니.” “말이 쉽죠. 아버질 두고 다닐 생각이 전혀 없는 건 둘째 치고, 시간여행 단속반이 문제거든요. 그러니까, 시간여행은 정부 차원에서 역사 답사하는 사람한테나 허용되는 얘기지 일반인은 접근금지예요.”

“너한텐 권리가 다 있는 거 같은데.” “아버지가 그 기계 발명자니까요. 그리고 단속반은 아는 게 없어요.” “어쨌든 넌 범법자잖아.” 그녀는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그네들이 가진 시간 개념에 비추어서 하는 말이고요, 아버지는 아버지만의 다른 개념을 가지고 계셨어요.” 그녀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즐거웠다. 그는 이야기가 빙빙 돌든 말든 그녀가 장황하게 늘어놓아주길 바랐다. “그 애길 좀 해 봐,” 그가 재촉했다.

“정부에서 채택한 개념을 먼저 얘기하자면 그래요. 미래에서 온 사람은 과거에 일어난 일에 물리적으로 참여를 해선 안 된다고. 왜냐면 그가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모순이 벌어지고, 미래의 사건은 그 모순에 맞게 뒤바뀌어 버린다니까. 현재로썬 시간여행부가 허가한 사람만 타임머신을 쓸 권한이 있어요. 시간여행부는 또 경찰을 시켜서, 옛날 단순했던 삶이 그리워서 시대를 도피하려는 사람들이나 다른 시대에 눌러앉으려고 역사학자로 가장하는 사람들을 붙잡아요.”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에 따르면 ‘시간의 책’은 벌써 탈고가 됐대요. 아버지 말씀에, 우주적이고 거시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세상에서 되어야 할 일은 다 되었다 이거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과거의 사건에 끼어들면, 그 사람은 단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아주 간단한 이유로 그냥 과거사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대요. 그러니 모순 따위는 있을 수도 없다고.”

마크는 담배를 깊게 빨았다. 담배가 필요했다. “네 아버지는 대단하시다,” 그가 말하자 “그럼요!” 그녀의 볼은 열정으로 더욱 붉어졌고 눈은 더욱 파르라니 빛났다. “랜돌프 씨는 아버지가 여태껏 읽으신 책들에 대해서 절대 못 믿을 걸요. 왜, 저희 집은 그것들 때문에 초만원이에요! 헤겔부터 칸트며 흄, 아인슈타인에 뉴턴 그리고 바이츠재커※까지. 뭐, 저도 몇 갠 읽어봤죠.”

※칼 하인리히 바이츠재커(Karl Heinrich Weizsäcker): 독일의 신교도 신학자.
신학 간행물 편집장을 했으며 “교회의 사도신경 세대”를 저술. 잘 알려지지 않은 철학자인 듯하다

“나도 그 정돈 있어. 사실은, 꼭 그대로.” 그녀는 그를 경이로이 우러러보며 말했다. “신기해요, 랜돌프 씨. 우린 어쩜 이렇게도 공통점이 많을까요?”

뒤이은 대화는 그 둘이 정말로 서로 닮았음을 확인해주었다. 선험론이나 버클리※ 철학, 상대성 이론 같은 건 9월의 야산에서 마흔넷이나 먹은 남자랑 스물하나밖에 안 되는 젊은 여자가 논하기엔 뭔가 어색한 것이었다. 하지만 운 좋게도 그럴 가치가 있었다. 선험론에 대한 두 사람의 불붙은 이야기는 선천성과 후천성에 대한 결론뿐 아니라, 소녀의 눈에 반짝이는 별빛까지 끌어내었다. 그들의 버클리에 대한 분석은 착한 주교님 이론의 근본적인 약점을 집어낸데다가 그녀의 얼굴도 더욱 달아오르게 했다. 그들이 상대성 이론을 훑어보는 동안에는 E가 변함없이 mc2이라는 사실도, 지식이라는 것이 여성에게 장애는커녕 오히려 매력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드러났다.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y): 아일랜드의 철학자이자 성공회교주. 극단적인 경험론자

그 순간의 느낌은 평소와는 달리 좀처럼 떠나질 않는 것이었고, 그 기분은 잘 때까지 이어졌다. 이번에는 아예 앤에 대해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소용없었으니까. 대신 그는 어두움 가운데 거기 그대로 누워 아무 생각이나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두고 맘껏 공상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공상이라는 게 죄다 민들레빛 머리칼을 가진 가을 동산의 소녀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엊그젠 토끼, 어젠 사슴, 오늘은 아저씨를 만났어요.’

다음날 아침 그는 그 산골마을로 차를 몰아, 자기에게 온 우편물이 있는지 확인하러 우체국을 들렀다.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제프는 마크 못지않게 편지 쓰기를 싫어했고 당시 앤은 연락두절이었으니까. 평소 하던 대로 그는 비서더러 긴급한 연락이 아니면 귀찮게 하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그는 근처 지역에 덴버네 집이 있는지를 말라깽이 우체국장에게 물을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관두었다. 그랬다간 줄리가 여태 공들여 믿게 만든 그럴듯한 세상을 망가뜨리는 셈이니까. 그 세상의 타당성을 믿지 않았던 그였지만, 그걸 망칠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그날 오후 소녀는 머리와 아주 살짝 다르게 샛노란 드레스 차림이었다. 그녀를 본 그는 다시 울컥하여 입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첫 때가 지나가고 말을 트자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두 사람의 말과 생각은 출렁이는 물결처럼 흘러내려 오후의 물길을 쾌활히 굽이쳐나갔다. 이번 헤어지게 되었을 때는 소녀가 물었다. “내일도 오실 거지요?” 그녀가 마크의 대사를 뺏긴 했지만, 그 말은 귓전에, 수풀 사이로, 오두막집에서 울려났다. 늦은 저녁 현관에서 담배를 빨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그는 그로 인해 잘 잤다.

그가 다음날 낮에 언덕에 이르렀을 땐 아무도 없었다. 처음은 실망스러워 얼떨떨했지만, 곧 그는 생각했다. 늦나 보다. 괜찮아. 언제든 오겠지. 그는 화강암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그러나 소녀는 오지 않았다. 분침이 돌고 시침이 돌았다. 어두움의 그늘이 숲에 드리웠고 이내 언덕 중턱까지 엄습해왔다. 공기도 차가워졌다. 결국 그는 포기하고 빛없이 오두막으로 향했다.

다음날 낮에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는 식음을 전폐했다. 낚시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뭘 읽을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 자신, 꼭 연애하는 학생처럼 구는 자신이 싫었다. 이건 반반한 애한테 상놈들이 해대는 짓거리랑 뭐가 다르나. 바로 며칠 전만 하더라도 그는 다른 여자들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는데, 한 주도 안 되는 사이 그는 관심이 아니라 아예 그녀를 좋아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넷째 날 언덕을 올라와보았을 때 꿈은 깨어졌다가 갑자기 다시 말짱해졌다. 햇빛 가운데 선 그녀를 발견한 때문이었다. 소녀는 이번엔 검은 드레스를 입었고, 그는 그녀가 자리에 없던 이유를 짐작해야 했지만 그는 열없이 그녀에게 다가섰다가 소녀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과 숨길 수 없는 그 입술의 떨림을 보고 말았다. “줄리, 왜 그래?”

소녀가 그에게 매달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소녀는 그의 코트에 얼굴을 묻고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이리하여 그는 지금 소녀가 눈물을 삼키며 앉고 일어서고 장례까지 치르고서 입때 참고 있다가 이제야 울음을 터뜨리는 줄을 알았다.

그는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는 지금껏 그녀에게 입을 맞춘 적도 없었고, 지금도 역시 그러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앞머리를 잠시 스치고 지났을 뿐이었다. 그가 말했다. “안됐다, 줄리. 소중한 분이셨을 텐데.”

줄리가 대답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되실 줄 아셨어요. 실험실에서 스트론튬 90을 다루실 때부터 알아차리셨어야 했어요. 근데 아무에게도, 제게조차도 아무 말도… 살기 싫어요. 아버지 없이 뭐 하러 살아요? 뭣 땜에, 뭣 땜에!”

그녀를 붙들고 그가 말했다. “살 이유라면 찾을 수 있을 거야, 줄리. 뭐가 됐든 누가 됐든. 아직 넌 어리잖아.” 머리를 번쩍 들어 뚝 그친 눈으로 그의 눈을 갑자기 들여다보았다. “누가 어리다고요? 당신이 누군데 날 애라는 거예요?” 그는 깜짝 놀라 그녀를 놓고 물러섰다. 그렇게 화내는 모습은 처음 본 것이다. “내, 내 말은…….” 그는 변명을 시작했다. 그녀도 쉬이 화를 그쳤다. “상처 주려고 그런 거 아니라 이거죠, 랜돌프 씨. 알아요. 하지만 진짜 전 애가 아니거든요. 다신 그렇게 부르지 말아주세요.”

“알았어, 안 그럴게.” 그가 대답하자 그녀가 말했다. “이제 전 가야 해요.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예요.” “내일… 내일도 올 거니?”

그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한여름 개부심처럼 눈에 눈물이 어룽어룽 고여 있었다. “타임머신이 못쓰게 되고 있어요. 교체할 부품이 있는데, 어떻게 교체하는지 몰라요. 우리, 아니 제 거 가지곤 고작 한 번쯤이나 더 여행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잘은 모르겠어요.”

“어쨌든 오도록 해 볼 거지?” 그녀는 끄덕였다. “해 볼게요. 그리고 랜돌프 씨?” “왜, 줄리?” “혹시 실패할지 모르니까 하나 확실히 해둘게요. 사랑해요.”

그리곤 언덕 아래로 내리달려 단풍숲 속으로 그녀는 사라졌다. 벌벌 떠는 손으로 담뱃불을 붙이다가 그는 손가락을 데었다. 그 뒤 그에겐 오두막으로 돌아가는 길이나 밥 먹을 일이나 잠잘 일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들은 일상이었고 그도 실은 깨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주방에 들어간 뒤에는 설거지대에 끼니가 차려졌다.

설거지를 하곤 커피를 끓였다. 아침은 아무 생각 없이 낚시터에서 줄곧 고기를 낚았다. 곧 현실을 직시해야 했을 것이다. 당장은 소녀가 자기를 사랑했고 몇 시간 뒤에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 정도면 충분했다. 그 못쓰게 됐다는 타임머신도 마을에서 언덕까지 그녀를 아무 일 없다는 듯 쏘아 주겠지.

그는 일찍 그 자리에 가서 화강암 벤치에 앉아 소녀가 숲에서부터 언덕을 타고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 가슴이 방망이질을 쳤고 팔은 떨고 있었다. ‘엊그젠 토끼, 어젠 사슴, 오늘은 아저씨를 만났어요.’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오지 않았다. 그림자가 길어지고 공기가 스산해지자 그는 언덕을 내려와 단풍숲으로 들어갔다. 곧 그는 길을 찾아 숲 속으로 접어들어 마을로 향했다. 작은 우체국에서 멈추어 자기에게 온 편지가 있나 확인했다. 빼빼 마른 국장이 그런 것 없다고 일러 주었지만, 그는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불쑥 꺼내는 것이었다. “이… 이 주변 어딘가에 덴버라는 사람이 사는 집이 있습니까?”

국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없다니까요.” “근처에서 장례식이 없던가요?” “올핸 없쇠다.”

그 뒤로 그는 휴가가 끝날 때까지 낮에 언덕을 들렀지만, 이제 그녀는 언제 오기나 했느냐는 듯이 절대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마다 그는 국장이 뭔가 실수했던 것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으로 마을에 자꾸 갔다. 하지만 그는 줄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그녀에 대한 그의 설명은 부정적인 답변을 부를 뿐이었다.

10월 초 그는 도시로 돌아왔다. 그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듯 앤에게 최선을 다해 주었지만, 그녀는 그를 만났을 때 무언가 바뀌었음을 직감한 듯했다. 그녀는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지만, 한 주 두 주 지날수록 그녀는 점점 말이 없어졌고, 이전부터 그가 이상히 여겼던 앤의 두려워하는 눈빛은 더욱 뚜렷해져 갔다.

그는 주일 오후에 차를 타고 그 언덕에 가 보기 시작했다. 이젠 숲이 금빛이 되었고, 한 달 전보다 훨씬 더 하늘은 푸르디푸르렀다. 몇 시간이고 그는 화강암 벤치에 앉아서 소녀가 사라진 쪽을 우두커니 보고 있는 것이었다. ‘엊그젠 토끼, 어젠 사슴, 오늘은 아저씨를 만났어요.’

그리고 11월 보름께의 비 오는 어느 밤 그는 한 가방을 발견했다. 앤의 것이었는데, 실은 어쩌다가 보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빙고 게임을 하러 시내로 나갔고 그는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두어 시간 재미없는 TV 프로를 보다가 작년 겨울 모아뒀던 직소퍼즐이 생각났다.

줄리를 잊기 위한 뭔가가, 뭐가 됐든 절실히 필요했던 그는 그걸 꺼내려고 더그매로 올라갔다. 좌우편에 잔뜩 쌓인 상자들 속을 뒤적이는 와중에 선반에서 그 가방이 떨어졌고, 바닥에 부딪치자 그것이 덜컥 열린 것이다.

그는 그걸 주워 올리기 위해 구푸렸다. 신접살림 때 조그만 아파트를 전세 낼 적 그녀가 가지고 다니던 바로 그 가방이었다. 그는 기억해 보았다. 앤은 언제나 그걸 걸어 잠그곤 그더러 세상엔 와이프가 남편한테 비밀로 해야 할 것도 있는 법이라고 농담처럼 허구한 날 단단히 일렀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자물쇠는 녹슬었고, 떨어진 바람에 부서지고 만 것이다.

그는 뚜껑을 닫으려다 비어져 나온 흰 드레스의 끝자락을 보고 멈칫했다. 어디서 많이 본 듯 가물가물한 재료들이었다. 그런 걸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 면직물, 바다거품, 눈꽃을 연상시키는 물질들. 다시 뚜껑을 열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 드레스를 들어보았다. 어깨를 잡고 포개자, 내리는 눈처럼 그 자리에 뜨는 것이었다. 그걸 오래도록 지켜보던 그의 마음이 아려 왔다. 그리곤, 그는 다시 그것을 얌전히 포개어 가방 안에 두고 뚜껑을 닫아 처마 밑 선반에 되돌려놓았다. ‘엊그젠 토끼, 어젠 사슴, 오늘은 아저씨를 만났어요.’

빗물이 지붕을 때렸다. 어찌나 가슴이 미어지는지 일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 그는 느릿느릿 더그매에서 내려왔다. 나선계단을 내려와 거실로 갔다. 벽로 선반에 놓인 시계가 10시 14분을 가리켰다. 이제 몇 분만 있으면 빙고버스가 아내를 골목에 내려다줄 거고, 그녀는 길을 내려와 집 앞까지 걸어 오를 것이다. 앤… 아니 줄리가. 줄리안?

그게 그녀의 본명이었을까? 그럴지도 모르지. 사람들은 자기 호칭을 만들 때 꼭 자기 본명을 어느 정도 남겨놓으니까. 그리고 자기 성을 완전히 바꿔 버리면 그녀는 자기 이름을 완전히 자유롭게 지켜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터이다. 시간여행 단속반을 피하기 위해서, 그녀는 아마 이름 바꾸기 외에도 이런저런 일들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니 사진도 찍지 못하게 했던 게지! 까마득한 그 옛날 취직을 하려고 파들파들 떨면서 사무실에 들어올 적부터, 그녀는 너무나 겁을 먹고 있었어! 그녀는, 아버지의 시간 개념이 옳은지도, 스무 살 때나 마흔일 때나 자기를 변함없이 사랑해 줄 남자가 있을지도 확실히 알지 못한 채 홀로 낯선 시대로 들어왔던 거다. 그녀가 스스로 말했던 대로 그녀는 별 탈이 없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스무 해 동안이나 그녀는 알고 있었겠지. 어느 구월 내가 언덕에 올라서, 햇살 속에 선 젊고 사랑스러운 자기를 발견할 거고, 난 또다시 그녀에게 빠지게 될 줄을. 그 순간이 내 미래의 한 부분이고, 그런 만큼 똑같이 자기 과거의 한 부분이니까 알고 있어야 했는데. 그러면 왜 나한테는, 왜 지금까지도 나한테 그걸 말해주질 않지?’

그는 순간 깨달았다. 가쁘게 숨쉬며 그는 현관으로 가서 우비를 걸치고 빗속으로 들어갔다. 빗길을 걸어 내려가는 동안 빗물이 그의 머리에 쏟아져 뺨을 타고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 중에는 빗방울과 눈물방울이 섞여 흐르고 있었다. 앤, 아니 줄리처럼 불로의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이 과연 늙는 걸 겁낼까? 그가 보기에 그녀는 나이를 먹지 않음을 깨닫지 못했던 걸까? 그녀는, 그가 책상을 뒤적이다가 그 조그만 사무실 한구석에 선 그녀를 본 순간에 사랑에 빠져버린 이래로 나이가 들지 않는 듯했는데. 언덕에서 만난 민들레 소녀가 그에게는 초면처럼 느껴진 이유가 거기 있는 줄을 몰랐던 것일까?

그는 거리로 접어들어 골목을 향해 걸어갔다. 빙고버스가 브레이크를 밟아 멈출 때쯤에 그는 거의 거기 도착했다. 흰 트렌치코트를 입은 여자가 내렸다. 이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민들레빛 머리는 더욱 어두워졌고 소녀다운 매력은 없었지만, 그녀만의 풋풋한 아름다움은 여전히 푸근한 얼굴과 표정에 남아있었다. 길고 가녀린 두 다리는, 9월 햇빛의 금빛 광채 가운데선 미처 알지 못했던 세련된 균형을 11월 길거리의 불빛 가운데서 뽐내었다.

앤이 마크에게 다가갔다. 익숙한 그녀의 극(極)한 두려움의 눈빛이 그의 눈에 비쳤다. 그녀가 눈앞에서 희미해졌다. 그는 막무가내로 그녀 쪽으로 걸음을 떼었다. 그녀에게 다다랐을 때, 그의 앞은 다시 또렷해졌다. 그는 마침내 오랜 세월 너머에 이르러, 비에 젖은 그녀의 볼을 어루만져 주었다. 이제 그녀는 모든 게 괜찮아진 줄을 알았다. 두려움은 영원히 사라졌고,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집을 향하여 빗속으로 걸어갔다.












역자 후기 by 김어진(yuptogun@Gmail.com)

처음으로 도전한 외국문학 번역입니다. 양도 적당히 적고, 단어도 사전에 다 나오니 적절히 말을 맞추면 되겠지 안 될 건 뭐야 하고 덤볐던 겁니다. 그런데 웬걸, 갈수록 진이 빠지는 작업이었습니다. 에드나 밀레이부터 온갖 이상한 인명들과 옛날식 단어들이 자꾸 나와서 번역 자체보다 주석 몇 줄 달려고 구글하고 위키하는 시간이 더 길었습니다. 그나마 제사날로 벌인 일이라 누구한테 푸념 한 마디도 할 수 없으니……. 아무튼 끝내고 생각해 보면, 외국 문학을 원서와 우리말로 병행 감상한다는 것, 굉장히 새롭고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하지만 업으로 하라고 하면 손사래를 치겠어요).

저는 이 소설이, 공상과학 소설답지 않게 회화적이고 색채 지향적인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부분에서 줄리의 외모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제게는 푸른빛의 그림이 굉장히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뭐, 공상과학의 틀과 껍데기를 빌린 연애소설이라고 하면 좀 과장일까요. 아무튼 SF라는 느낌은 별로 없는, 그럭저럭한 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하 잡담―.

1. 이 문서는 산돌명조L, 산돌명조B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또, 소설 원문을 번역한 문단 바로 밑에 두었습니다. 혹여나 오역한 부분이 있을지 몰라 남겨두었으니 참고하세요(솔직히 자신 없는 번역문도 몇 군데 있습니다).

2. 유난히도 ‘legs’와 ‘gentle’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와 골탕 많이 먹었습니다. 이 변태 로버트 아저씨는 뭐든지 쌔끈하다 싶으면 무조건 gentle이라고 해댑니다. 게다가 또 왜 이렇게 각선미는 강조하는지… 끙!

3. 우리식 표현을 좀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입에 오르지 않는 말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개소리괴소리’, ‘제사날로’ 등 여러 개의 순우리말을 가능한 적절한 상황에 넣으려고 애써 봤습니다. 모르시는 단어는 사전을 반드시 찾아보시길. 그리고 영어식 표현을 자연스러운 서술로 바꾸는 것도 연습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one's throat tightened’였습니다. 이걸 ‘목이 메다’, ‘가슴이 미어지다’, ‘울컥하다’ 등으로 바꾸느라고 힘이 들었습니다. 하나도 문학적이지 않아!

4. sooye님께. 띄엄띄엄 읽더라도 ‘열심히 읽는’ 연습이 중요합니다. 솔직히 저도 한컴사전 켜놓고 내내 찾아가며 번역한 겁니다. 외국어가 뭐 있나요, 결국 말귀 알아듣기 아니겠습니까. 자꾸 하다 보면 트이는 것이 말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졸렬한 번역을 보시고 기운을 내세요.

5. 이거 애니메이션으로 각색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러브히나 느낌이면 좋겠는데. (오타쿠인가…)

6.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직도 사태파악은 안 됩니다. 시간여행 같은 거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런가 봅니다.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7. THX 2 Sooye, Scifi.com, en.wikipedia.org, and "the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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