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파스 블로그에서 퍼 왔으며 생각했던것과는 다른점이 상당히 보이는 것 같습니다.



게임회사를 그만두면서 그동안 삽질한 경험을 바탕으로 후배 기획자분들을 위한 가이드 성격의 글을 썼습니다.

이것이 베스트는 아니고, 필수도 아닙니다. 개인 경험이니, '아,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라는 정도.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 봐 주시기 바랍니다.

내용 중 일부 과격하거나 자신의 경우와는 틀리다고 생각되는 구절이 있을 수 있으나, 개인적인 경험에 기초한 것임을 이미 전제하고 쓰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항의는 받지 않겠습니다.

참고, 꽤 긴 글입니다.
(이하 존대어 생략)

그대, 기획자가 되고 싶은가?

개인적인 경험만 가지고 따진다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말리고 싶다. 이 기획자라는 직업은 편하게 돈버는 직업과의 거리가 56만 7천 광년은 된다. 자신이 기획한 게임을 세상에 내놓는 것을 시대의 사명으로 안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이 동네는 일찍 발 끊는 것이 시간을 아끼는 길이다.

그러나 '나는 게임 못 만들면 인생의 가치가 없다'라고 진심으로 생각하시는 분이라면, 지금부터 쓰는 글들이 분명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먼저, 기획자로 취직하고 싶다면 다음 사항을 기억하라.

-. 발로 뛰고 자신을 어필하라.

이 항목은 필자의 친구의 경험(을 옆에서 지켜본 것)이다. 참고로 본인은 대학2학년때 기획서 하나 내고 다이렉트로 입사했다.(여러 조건이 겹쳐준 덕에 운이 엄청 좋은 케이스다. 따라하지 말라)

얌전하게 방 안에서 기획서를 쓰고 있는 당신을 벤츠로 모셔갈 경영진은 지구상에서 전멸했다(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기획자가 되고 싶다면 행동하라. 게임잡 등에서의 구인구직 코너도 있지만 여기는 거의 대부분 신생회사가 팀장급을 구하는 경우나 기존 회사가 프로젝트를 위해 개발인력을 추가모집하는 경우다. 어느 쪽이든 초보는 들어가기 힘들다.

그럼 초보는 죽으란 말이냐? 천만에. 길은 분명히 훤히 뚫려있다. 그러나 골방에 틀어박혀 인터넷이나 하고 있다고 길이 보이지는 않는다. 기획 포트폴리오 문구 고치는 데 신경쓰느니 발로 뛰어 인맥을 만들어라. 아는 개발자가 있다면 그를 졸라 개발자 모임에 가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맥을 확대하라. 아는 사림이 없다고? 게임개발 관련 컨퍼런스, 워크샵 등에 참석해 안면을 익히는 방법을 추천한다.

인맥 만들기는 꾸준하게 이뤄져야 한다. 한두번 하다가 그만둘 거면 차라리 안 하는 것이 차비 아끼는 길이다. 집이 서울이나 수도권이라면 지하철비만 들겠지만, 지방 출신은 서울(게임업체가 주로 서울에 있는 관계로, 모임도 서울이 주류다)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자신의 얼굴을 내밀고 다녀야 한다. 걍 참석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수시로 자신을 돋보일 방법을 연구하라. 강의 등에서 강사에게 수시로 질문하는 것도 좋다. 질문하기 위해서는 일어서야 하고, 일어서면 주위의 시선이 전부 자신에게 쏠린다. 최고의 안면 익히기 아닌가? 이 정도의 노력 없이는 살아남기 힘들게 되어버린 것이 최근의 게임 업계다.

인맥이 넓으면 회사의 정보를 알아 자신의 조건에 유리한 회사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이미지가 좋을 경우, 사귀어뒀던 인맥이 회사를 소개시켜주는 경우도 있다.아직까지 한국의 게임업체 채용은 현 개발자나 지인의 소개에 의한 취직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따라서 회사 인사회의에서 '전에 컨퍼런스에서 만난 정**라는 친구가 똘똘하던데, 보조기획으로 함 써 보죠.'라는 말이 나오도록 노력해야 한다.(이런 말 나오면 거의 80%는 합격이다)

다만 이 경우 함정 하나. 증시에 루머가 있듯 게임판에도 괴담이 있다. 모회사 사장이 개발자 왕창 끌어들여 일 혹독히 시킨 뒤 다 되니까 전부 쫓아냈다더라, 모사와 모사가 합병한다더라 등등. 이런 종류의 괴담은 어느 정도 레벨이 되기 전까지는 진위를 구별할 방법이 없다. 가려 들을 줄 아는 귀를 키우기 전까지는 들은 소문이라고 다 말하고 다녀선 안 된다. 자칫 경박한 사람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 귀는 닫을 수 없지만 입은 닫을 수 있다는 옛 명언을 상기할 것.

또, 인맥만들기에는 두 가지 특전이 따라붙는다.

하나는 정보를 얻는 것. 인맥을 넓히면 정보는 알아서 들어온다. 어느 회사의 대우가 좋고 어디의 기획자가 유능하다는 등의 이야기는 금방 들린다. 이 바닥은 의외로 좁아, 공개될 수 없는 뒷이야기 같은 것들도 많이 접할 수 있다. 정보가 힘이라는 사실은 말하면 입아프니 안하기로 하겠다.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 인맥은 강력한 무형자산이다. 인맥이 두터운 사람은 외주 등의 업무를 맡길 때 우수한 프리랜서 개발자에게 싼 가격으로 일을 맡길 수도 있고, 곤란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 외부의 지원사격을 (인맥만큼)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평생 봉급받고 남의 뜻대로 기획하고 사느니 자신의 힘으로 게임 하나 만들어보고 싶은 사람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사 차려 개발할 비용이 수십억씩 되는 이 판에서 누가 혼자 힘으로 게임을 만들 수 있겠는가? 돈이야 어떻게 마련한다치더라도 사람이 없으면 게임은 만들 수 없다. 이럴 때 다른 회사의 우수한 개발자가 놀거나, 현재 사직을 고려중이라면, 포섭작전시 그와 친분이 있을 경우 반은 먹고 들어간다.


-. 기획과 관련된 하나 이상의 특출난 재주를 가져라

기획과 관련된, 지망생들의 '상식의 오류' 두 개.

* 기획자는 게임을 좋아해야 한다?

: 천만에. 기획자의 자격과는 전!혀! 무!관!하다. 물론 기획자는 다른 기획자의 기획요소 등을 연구하기 위해 많은 게임을 접해야 한다. 그러나 게임을 좋아한다는 것은 대개 한 장르에 깊이 빠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럴 경우 다양한 장르의 폭넓은 발상을 접하지 못해, 되려 발목을 잡힌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위험이 높다. 오히려 명 기획자 중에는 게임에 크게 취미가 없는 사람도 많다. 게임을 좋아한다는 것과 기획자의 자질에 연관성이 있다고 믿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데, 전혀 무관하니 현혹되지 말 것.

* 게임에 대해 면밀하게 검토 분석할 수 있는 재주가 있는 기획자가 뛰어난 기획자다?

: 게임에 대한 분석 능력은 기획자의 기본이며, 이는 재주가 아니다. 게임에 대한 분석이란 어차피 자신의 게임 관을 잣대로 삼아 평가하는 것이고, 이것이 객관적이기는 어렵다. 이것을 재주로 쓰려면 차라리 영어나 일어를 숙달해 잡지 필자나 기자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

아래에 기획자가 갖춰야 할 스킬을 설명하겠지만, 이는 기획자로서 갖춰야 할 필수 스킬일 뿐이다. 기획자는 남들보다 하나 정도 뛰어난 재능이 있어야 한다. 지금이야 한 기획자가 시나리오에서 레벨디자인까지 전부 다 맡지만, 장차 직업별로 세분화될 것이다.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문분야를 미리 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수학의 달인이라던가 소설을 한 편 써냈다는 등의(시중에 나도는 쓰레기 판타지 같은 것 말고) 재능이나 경력이 필요한 것이다.

필자의 경우에는 글쟁이인데, 이 분야는 요즘 퇴색하는(어흑~!) 추세다. 싱글 RPG가 대세이던 과거에는 시나리오 때문에 글쓰기 능력이 아주 중요했지만, 최근에는 온라인 게임이 대세인 만큼 그 중요성은 많이 떨어졌다. 그러나 시나리오 분야가 약화되었다고는 해도 글쓰기를 잘하는 사람은 여전히 유용하다.

하나 충고하자면 장문을 쓰는 사람보다는 단문 안에 표현하고 싶은 것을 모두 나타낼 수 있는 능력이 업무 쪽에 쓰임새가 많다.(모든 글쓰기가 다 그렇지만)


-. 경험을 쌓고 책을 읽어라

게임을 많이 한다고 게임을 잘 만들지는 않는다.

게임보다는 책을 읽고 사회 전반에 대한 경험을 쌓아라. 어차피 게임의 월드는 현실세계의 축소판이다. 세계를 모르면 게임은 나올 수 없다. 다양한 분야의 문물과 접하고 체험하는 것이 좋다. 여행이 좋겠지만, 돈 문제가 있다면 책을 읽음으로서 대신할 수 있다.

허접한 소설류 말고, 지오그래픽 등의 사진이 많이 실린 것을 권장한다. 지리, 철학, 의학, 환경, 사회, 언어 등 사회를 구성하는 전 분야에 대해 읽어 폭넓은 지식을 구축하라. 책이 없다고? 도서관은 입시나 고시공부 하는 곳이 아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좋은 책은 사서 두고두고 읽도록.

게임과는 좀 거리가 멀지만 글쟁이라면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권한다.


-. 그래픽과 프로그램을 알라

갓 입사했을 때의 실화 한 토막

“기획서에 따르면 캐릭터가 타일로 섰을 때 검을 휘두르는 손이 몹을 뚫어버리는데 괜찮겠어요?”

“...저, 타일이 뭐죠?”

지금 되살리니 굉장히 창피한 기억(그래픽 담당자가 황당해하던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참고로 맵 단위 설정시, EQ등의 3D게임은 캐릭터간 좌표를 사용하고 2D게임은 타일, 혹은 셀이라는 가상의 사각형을 만들어 필드에 깔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픽과 프로그램을 이해해야 기획을 할 수 있다. 그래픽과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배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실무에 적용할 때 어떤 루틴으로 구동되는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는지, 적용시 제한 요소는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특정요소를 게임에 넣는다고 할 때, 그래픽이나 프로그램적인 문제로 걸리는 부분은 분명히 발생한다. 사실, 기획은 무슨 방법을 쓰든 그 기획요소가 게임에서 구현되기만 하면 된다(안 되는 걸 되도록 어거지로 우겨 넣으라는 소리가 아니다!). 따라서 방법상 정면돌파가 안 된다면 우회적인 방법으로 구현될 수 있도록 머리를 짜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그래픽과 프로그램이 게임에서 어떻게 동작하는지 알아야 한다.

예를 들자. 온라인 게임에서 유저들의 대규모 전쟁을 위해, 지금까지 게임에 적용된 적이 없는 초대형 맵, 가령 1024*1024 크기의 맵을 게임에 적용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회의에서 프로그램이, 용량이 큰 맵 파일을 한꺼번에 메모리에 올릴 경우 저사양 컴퓨터에서는 속도가 느려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또는 맵 크기 제한이 되어 있어 768*768 크기 맵이 최대 제한이라고 경고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768*768로는 전쟁에 나선 유저 전원을 수용할 수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럼 기획의 대답은? 안되니까 할 수 없군요? 이런 대답이 나올 것 같으면 일치감치 짐 싸라. 제한이 있다면 제한 안에서 최대한 머리를 굴리는 것이 기획자의 할 일이다.

위의 문제에 대한 고전적인 해결방법 중 하나는, 큰 맵을 작은 맵 여러개로 쪼개어 따로 로딩하는 것이다. 큰 맵 하나를 로딩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들어갈 작은 맵 하나를 먼저 로딩하는 것이 훨씬 빠르다. 그리고 그 맵에서 유저가 움직이는 동안 주위의 작은 맵들의 데이터를 미리 로딩함으로써 맵 이동시에도 정체를 거의 느낄 수 없게 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전쟁시 사람이 많이 몰리는 중앙 맵에 로딩 우선권을 주어 속도를 원활히 할 수 있는 등의 장점도 생긴다.

경험이 짧아 그래픽이나 프로그램을 잘 모르겠다고? 모르면 그들에게 가서 물어라! 불치하문(不恥下問;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 것)이라는 공자님 말씀도 있거니와, 초보라면 두말 할 것도 없지 않은가? 몰라서 물어보는 것을 놀리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사람은, 자신이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좋아한다. 따라서 아주 곤란한 상황이 아니라면 기꺼이 당신을 도울 것이다.


기획자가 반드시 갖춰야 할 필수 스킬

-. 말하기

: 엄밀하게 말하면 자신의 의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스킬을 마스터해야 한다. 필자가 이 스킬을 첫머리에 둔 것은, 기획을 하면서 가장 뼈!저!리!게! 느낀 부분이기 때문이다.

아이디어 발상 → 아이디어의 체계화 → 전달 → 작업 검수의 4단계가 기획의 업무라고 볼 때, 아이디어는 기획자만이 짜내는 것이 아니고, 체계화 및 검수는 기술적인 부분에 속하므로 수련만 하면 부족하지 않을 정도까지는 향상된다. 그러나 전달 과정은 아주 중요하며, 다른 기획관련 서적에도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이름으로 강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가볍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기획서만 만들었다고 기획 작성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전달하는 과정까지 완수되어야 한다. 기획자가 직접 3DMAX나 포도가게를 돌려서 그래픽을 만들 것도 아니고, C로 프로그램을 짤 것도 아니고, 사운드를 녹음할 것도 아니다. 해당 분야에는 전문가가 있다. 그 전문가들에게 기획이 의도하는 바를 명확히 전달하지 못하면, 애써 만든 기획서 다 휴지조각 되는 거다. 아래의 드로잉 능력과도 연관되는데, 기획자는 자신이 원하는 기획의 방향을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개발자의 머릿속에 때려박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또한 말하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요소 : 왜 이 작업을 해야 하는지의 방향성을 제시하라. 사람이 일을 할 때 제일 괴로운 것은 골인지점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지금 작업을 하는지 모르는데 그 작업의 퀄리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요소가 게임에 들어감으로서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등등을 미리 개발자들에게 숙지시켜라. 때때로 그들에게서 개발요소를 개량할 좋은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수도 있다.


-. 드로잉 능력

: 콘티 구성을 위해 필요하다. 수백페이지의 기획서와 수백번의 설명? 개발자들은 기획서를 보는 즉시 잊어버리고 설명은 듣자마자 다른 귀로 흘러나간다(농담일 것 같은가?) 그러나 단 한 컷의 원화는 기획자가 노리는 게임의 이미지를 개발진의 머릿속에 박아넣을 수 있다(그래서 옛말이 틀린 것 없으니 =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다못해 졸라맨이라도 그릴 줄 알아야 캐릭터의 동작이나 특수기술시 액션 등에서 기획자가 의도하는 바를 표현할 수 있다. (실무중인데 정말 졸라맨밖에 안 그려진다면 팀장을 닥달해서 원화맨을 끌어오라. 자신이 그리는 것보다 시간이 배는 걸리겠지만, 수백페이지의 기획서와 수백번의 설명보다는 낫다)


-. 문서Tool의 사용능력

: 워드, 파워포인트, 액셀, 프로젝트, 비지오의 달인이 되라. 의외로 한글은 잘 쓰이지 않는다. 타 회사에서는 워드가 잘 쓰이는 모양인데, 필자는 파워포인트를 많이 썼다. 파워포인트는 텍스트의 항목 분류를 자동으로 잡아주어 알아보기가 편하고 어떤 양식도 옮겨올 수 있다는 강력한 장점이 있다. 엑셀은 엑셀베이직까지 터득하고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웬만한 기능은 모두 알고 있는 것이 좋다.

아, 비지오가 뭐냐고? 마름모, 원, 사각형과 선을 사용해 알고리즘을 그리는 프로그램이다. 사용방법이 간단하고 Copy & Paste로 파워포인트에 옮기기가 쉬워 적극 추천. 프로젝트는 스케쥴을 짜기 위해 필요한 프로그램인데, 팀장급이 되려면 반드시 익혀둘 것. 초보라면 잠시 신경쓰지 않아도 좋다.


-. 기획서의 체계화 및 상세화(문서작성력)

: 물어보러 올 것을 염두에 두고 문서를 작성하지 말라. 어차피 한 번의 설명회는 반드시 거쳐야 한다. 아무리 기획서를 잘 써놔도 결국 기획서란 말하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간단한 구성으로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상세하게 기술하라. 글자의 두께를 달리 주거나 색을 넣어 눈에 띄게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것은 수백페이지의 기획서를 만들라는 의미가 아니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수백페이지의 기획서는 쓰는 기획자에게도 고역이요, 읽는 개발자에게도 고역이다. 고생을 사서 해서 일의 효율을 떨어뜨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간단하고 알기쉬운 용어로 표현하여 전달력을 높이는 것이 키 포인트. '입니다', '습니다'등의 경어도 전달력을 떨어뜨리므로 불필요하다.


기획자의 마음가짐

-. 귀를 열되 휘둘리지 말 것

: 개발자의 속성 중 하나는, 음으로 양으로 개발방향에 대해 간섭하려 하는 것이다. 그들도 인간이고 (대개는)게임 마니아인 만큼, 게임관이라는 거창한 것까지는 없더라도 '어떤 게임이 재밌더라' 라는 관념 정도는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들이 바라보는 게임의 재미요소가 각기 다르다는 것. 기획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환웅 시대부터의 명언도 있고(정말?) '다 받아주어라~!'라는 이순신 장군의 금언(金言)도 있지만, 이들의 의견을 다 받아주다 보면 배는 산으로 가고 기획은 골로 간다.

그렇다고 이들의 의견을 무시하면 기획이 전횡하네, 독단적이네, 우리가 기획 쫄따구냐는 등의 불평들이 쏟아져나오게 되는데, 사실 그들의 말이 맞다. 주의하라. 기획은 독단적으로 '보여져서는' 안 된다.

관건은 필요한 만큼 받아들이고 불필요한 의견은 쳐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함으로써 의견에 대한 피드백을 주어, 의견 제시자들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절대로 자신의 생각을 대책없이 우겨선 안된다. 아무리 말빨이 좋아도 근거가 없다면, 논쟁 모드로 가게 될 경우 거의 진다. 설사 이기더라도 개발자의 감정은 나빠진다. 논쟁 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우리나라 특유의 정서 탓도 있겠지만, 개발자 자신의 의견을 생까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예 처음부터 개발자 전부를 모아놓고 워크숍을 개최, 일주일이고 한달이고 미친듯이 회의하면서 그들이 가진 아이디어와 발상(이라는 것)을 모두 토해내게 만들어, 게임 기획 초기에 반영하게 하는 방법이 제일 건설적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회사가 몇이나 될지는 모르겠다. 결국은 기획자의 말빨(!)로 개발자들을 어르고 달래는 것이 현 시점에서 최선의 방법이다.

노하우 하나, 신뢰받는 기획자가 되려면 그들의 아이디어를 그들 앞에서 바로 기록하도록. 자신의 의견을 존중해준다는 표시니까. 그리고 대개 이런 아이디어들은, 조금만 손보고 조건만 갖춰지면 아주 훌륭한 게임의 요소가 될 수 있다.

어르고 달래기를 위한 몇 가지 레퍼토리

"좋은데요. 하지만 지금 게임과는 좀 안 맞으니 차기작에 도입해 보죠."

"나이스!... 에... 그런데 이거 하려면 그래픽(제안자가 프로그램이면 프로그램)일이 꽤 많아질듯한데... 스케쥴을 좀 보여주실래요? ...스케쥴이 빡빡하네... 이거까지 들어가면 맞출 수 있겠습니까?(이때쯤 제안자는 슬슬 빼기 시작한다) ... 그렇죠. 이건 여유가 생기면 스케쥴에 반영해보죠. (아주 아쉽다는 얼굴표정과 말투를 잊지 말 것)"


-. 타인의 기획을 존중하라.

기획 진행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적은 개발 중간에 참여한,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기획자다. 그들은 대개 자신의 경험과 실력을 믿고, 기존의 기획을 우습게 보는 속성이 있다.

물론 정말 이걸 기획이라고 짜논 건지 한심한 기획서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알아둘 것. 기존의 기획자들도 바보는 아니다. 대개는 회사 사정에 의해 기획이 최소 서너 번 이상 뒤바뀐 경우가 많다(신생회사일수록 이런 경우가 심하다). 제한된 환경 안에서 고생고생해가며, 게임 마인드라고는 사하라 사막의 천연광천수만큼이나 없는 경영진과 다퉈가며 만든 기획서다. 피와 땀이 서린 그들의 결정체인 것이다(쓰다보니 웬지 뭔가가 마음속에서 울컥 치민다, 젠장).

깨놓고 말해 무제한적인 환경. 즉, 기획자 말 고분고분 잘 듣는 최강의 개발진과 무한의 자금과 기간을 가지고 있다면 대박 터뜨릴 자신 없다고 말할 기획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래도 기존 기획이 맘에 안 든다면 이 문서 쭉~ 아래에 있는 '기획자가 삼가야 할 일 / 개발도중에 뛰어들기'를 읽으시라.


-. 신속한 정보공개

기획자가 게임의 틀을 잡으며, 또한 게임의 발전방향에 대한 비전이 있음을 개발자들에게 주지시켜라. 그리하여 확정된 개발방향은 최대한 빨리 전 개발진에게 공개하라. 개발진들은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바보가 아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한번 더. 그들에게 목적의식을 제공해 주지 않는 한 그들의 작업 속도와 퀄리티의 향상을 바랄 수는 없다.

더 위험한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개발방향을 모르면 개발자들은 자신의 작업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고, 더 나아가 기획자와 기획에 대한 불신과 함께 자신의 게임관을 게임에 적용시키고자 한다. 그러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공 많은 배가 되어버린다. 배에 연료와 식량(자금과 기간)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사공이 많으면 대양을 헤메다가 가라앉기 십상이다.


-. 기획자는 시다바리가 아니다.

'친구'에서 명대사, '내가 니 시다바리가!?'

기획자들이여, 외칠지어다. '내가 개발팀 시다바리가!?'

그런데, 사실 시다바리가 맞다. 다만 그 사실을 개발팀이 몰라야 한다. 여기에서 또 역사적인 명대사를 상기할 것. '나의 죽음(시다바리임)을 알리지 말라~.'

한국의 게임 개발사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대부분의 개발사에서 기획자는 온갖 잡일담당이 될 수밖에 없다. 기획자의 시다바리化 현상은 주로 기획 업무가 개발 초반에 완료된다는 일반적인 편견(편견이닷!)에서 비롯되며, 특히 게임제작시 게임 전반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유일한 부서라는 특성상 관련잡무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은데, 기획자의 성격이 물렁(!)하거나 경험이 없기 때문에 배운다는 저자세로 나가면 이 현상은 더욱 빨리 찾아온다(필자의 경우, 둘 다였다. 어흑).

또한 개발진의 특성상, 자료수집 등 누구나 할 수 있는 시다바리 일은 회피하려는 속성이 있다. 저변에는 '나 같은 전문인력이 이런 짓이나 하고 있어야 하나.'라는 의식이 깔려 있기 때문인데. 대부분 기획팀에 이런 자료 수집 등의 잡무까지 요구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획자는 개발팀에서 거의 하인 취급을 받으며, 본업인 기획업무와 타 팀의 요청 업무에 휩쓸려서 아무 것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가 된다. 이렇게 되기 전에 일을 쳐낼 줄 알아야 한다.


몹 제작을 예로 들자. 유명한 몬스터인 오크의 디자인이 필요하다. 기획팀은 이러이러한 이미지로 해달라고 요청할 것이다. 그럼 그래픽의 한마디.

'소스 될만한 것 없어요?'

구해주면,

'이걸로 모자란데... 다른 거 없나요?'

이렇게 되면 끝이다. '알아서 구하세요.'라고 해도 '에이, 구해보셨잖아요. 찾는데는 우리보단 낫겠죠.'가 되어 버리니까.

이럴 경우 방법은 간단하다. 기획서에 이미지 러프와 함께 자료 사진 몇 장을 구해 추가해주면서, '이상의 추가자료는 직접 구해 주십시오'라고 써놓으면 끝. 기획은 할 만큼 했다, 나머지는 그대들에게 맡긴다 라는 식으로 가는 것이다. 즉, 처음부터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여담이지만, 워크래프트 시리즈의 오크는 아무리 봐도 과거 서양을 침공한 몽고군을 연상하게 한다. 몽고군은 폴란드까지 쳐들어갔다는데, 이때부터 백인들의 집단무의식에 표정없는 황인종들에 대한 공포가 자리잡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말 그렇다면 무의식까지 연구한 워크래프트의 캐릭터 디자이너(혹은 기획자)는 정말 난 놈이라는 결론.)

기획자가 삼가야 할 일

-. 개발도중에 뛰어들기

: 초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웬만하면 개발 초기부터 참여할 것. 프로젝트 기획 단계부터 단계적으로 밟아나가라.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든 되지 않든, 개발 초기부터 참여하여 개발한 기획자는 전체 흐름을 꿰뚫을 수 있으므로 총괄적인 입장에서 게임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중간에 들어와서 게임을 파악하려면 고생 꽤나 할 것이다(프로그래머의 하소연이 정말이라면, 개발 중간에 투입된 프로그래머가 프로그램 소스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시간과 고생에 맞먹는다)

어쩔 수 없이 도중에 투입된다면, 게임의 개발방향과 흐름을 파악하고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주도적으로 개발에 참여하라. 개발방향이 아무리 불만이더라도 객관적으로 보아 '돈이 된다'면 무엇이 문제랴!

개발방향도 시원찮고 돈도 안되는데 기존 기획자들이 자신들의 기획을 성경처럼 다루는, 도저히 답이 없는 프로젝트라면... 쥐도 침몰하기 전의 배에서 달아난다는데, 당신 거기 뭐하러 있는가?

-. 만들고 있는 게임을 사랑하기

: 냉정하게 바라보라. 게임제작은 현실이다. 자신이 만드는 게임에 정이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필요하다면(바꿔말해 돈이 안 된다면) 과감하게 때려치울 수 있어야 한다. (실제 그럴 경우가 생긴다면) 태어나지도 못한 아이를 위해 3분의 묵념 정도는 해 주자.

더 무서운 것은, 게임에 대한 애정을 무기삼아 게임의 방향에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려 하는 개발자다.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수준이 아니라 게임의 장르와 판매 타겟을 바꾸려고 든다. 설사 게임의 원 방향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하더라도, 과감히 무시 때려라. 한 번 개입이 허용되면 그들은 끝까지 달려들어 게임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려 하는데, 그 기세가 마치 16강 결판내기 직전의 한국팀 같다(포르투갈을 이겼다 오예~!).

그가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관철시키려 한다면, 팀장에게 그의 기획 전직을 슬쩍 제안하는 것도 좋다. 물론, 다른 회사의.



쓰다보니 웬지 서점에 널린 성공비결 류의 글이 되어버렸습니다만, 그만큼 인간이 성공하는 길은 의외로 단순하다는 거겠지요.

사실, 제가 쓴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봅니다. 저 또한 그러니까요. 요는 이 조건들을 만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항상 진보하고 개발하는 기획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게임의 진화를 위해서는 기획자가 진화해야 합니다. 제 졸렬한 글이 여러분들의 진화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